SF 생태주의
<혹성 탈출>에서 수학 계산을 이용한 소통 본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소설 <혹성 탈출>은 유인원들의 행성에 추락한 인간을 조명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이 한없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만약 이런 관계가 바뀐다면? 인간들에게는 문명이 없고, 유인원들이 문명적이고 지적이라면? 그때 '동물원 우리 속의 원숭이'는 유인원이 아니라 인간을 가리킬 겁니다. 입장은 뒤바뀌고, 정상에서 밑바닥으로 인간은 추락하겠죠. 이는 우리가 유지하는 상식을 산산조각 깨뜨릴 테고, 독자들은 짜릿한 충격을 받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SF 독자들은 SF 소설을 좋아하겠죠. 영화 <혹성 탈출>들은 여러 차례 나왔고, 앤디 서키스가 시저를 연기하는 최근 시리즈 역시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혹성 탈출> 영화들이 소설 <혹성 탈출>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들은 인간을 정상에서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그 아찔한 느낌을 재현하지 않는 것 같아요. 만약 그런 내용을 전달하고 싶다면, 영화는 보다 사변에 집중해야 할 테고, 이는 영화라는 특성에 알맞지 않겠죠. 사변에 집중하고 싶다면, 영화 <맨 프롬 어스>처럼, <혹성 탈출>은 영상미보다 토론과 논의에 치중해야 할지 모릅니다. 토론과 논의에 치중하는 연출은 블록버스터가 되지 못하겠죠.
반면, 소설 <혹성 탈출>은 사정없이 인간을 밑바닥으로 내려보냅니다. 종종 그런 모습은 안쓰럽습니다. 인간에게 진절머리를 내는 회의론자조차 <혹성 탈출>을 읽고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낼지 몰라요. 그렇다고 해도 <혹성 탈출>은 무조건 인간을 내팽개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부분들 중 하나는 유인원과 인간이 서로 신뢰하고 교류하는 장면입니다. 소설 주인공 인간을 연구하는 어떤 여자 유인원 연구원은 무한한 신뢰와 자비를 보여주고, 인간을 야만적인 동물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소설 속에서 여자 유인원 연구원은 수호 천사나 여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연구원이 가장 인상적인 등장인물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연구원은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합리적으로 관찰하고 파악하느라 애씁니다. 다른 유인원들이 소설 주인공 인간을 야만적인 동물이라고 무시한다고 해도, 연구원은 인간에게 지성이 깃들었음을 파악하고 온갖 편견들에 맞서죠. 이런 모습은 꽤나 합리적인 과학자 유형이고, 그걸 넘어 아주 자애롭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이 연구원은 소설 주인공 인간에게 계속 소통을 시도합니다. 만약 여자 유인원 연구원과 소설 주인공 인간이 서로 대화할 수 있다면, 그건 인간에게 지성이 있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소설 주인공 인간은 유인원 언어를 모르고, 그래서 최선의 방법은 손짓발짓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그때 소설 주인공은 기발한 꾀를 내놓습니다. 그건 수학 계산입니다. 언어가 서로 다르다고 해도, 수학 계산 방법은 똑같을 겁니다. 유인원 세계와 인간 세계에서 피타고라스 원리나 미적분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쨌든 '1+1=2'이고, 상식적인 계산 수준에서 이는 바뀌지 않는 법칙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양쪽 세계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제안합니다. 여자 유인원 연구원과 소설 주인공 인간은 수학 계산을 이용해 소통하고, 나중에 이는 본격적인 대화로 발전합니다. 이건 다소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외계 존재를 만난다면, 이렇게 서로 대화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외계 존재가 지적 존재라면, 그들이 피타고라스 원리나 미적분을 계산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외계 행성이 기이하다고 해도, 지구처럼 거기에는 피타고라스 원리나 미적분이 적용될 겁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우리와 외계 지적 존재는 서로 대화할 수 있을지 모르죠. 이게 순진하고 낭만적인 발상일까요. 어떤 SF 소설들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과 외계 존재는 비단 수학 계산만 아니라 화학식 역시 똑같이 사용할 겁니다. 화학식이 서로 똑같다면, 인간과 외계인은 이걸 이용해 소통을 시도할 수 있겠죠.
어쩌면 보이저 골든 디스크 역시 이런 종류일지 모르죠. 만약 외계 지적 존재가 정말 있다면, 그 존재가 골든 디스크를 이해한다면, 여러 계산 방법들이나 도식들은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이런 계산 방법이나 도식들 이외에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그림일 겁니다. 왜 <다곤>이나 <광기의 산맥>이 그렇게 중후장대한 그림을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보여주겠어요. 그림은 가장 보편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매체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과 외계인이 똑같이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신체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문화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테드 창이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보여준 것처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외계인들은 그림을 이해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순차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연대기를 그린다고 해도, 외계인들은 그걸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지 몰라요. 외계인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면, 그런 신체적인 조건은 그림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겠죠. 이런 상황에서 그림을 이용해 두 종족이 소통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하거나 아주 어려울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그림을 그린다면, 1만 년 이후 지적 존재가 나타난다고 할 때, 그 지적 존재가 그 그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20세기 인류는 고대 벽화를 이해했습니다. 아니, 적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고대 벽화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만 년 이후, 인류가 진화하거나 다른 지적 존재가 나타난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들은 고대 벽화를 이해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림을 남긴다고 해도, 그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겠죠. 우리가 위험한 해골 문양을 그린다고 해도, 미래 지적 존재들이 그걸 위험 표시라고 이해할까요? 오히려 그들이 해골 표시가 신성하다고 여기지 않을까요? (이건 다소 조야한 사례이나, <워해머 40K>에서 우주 해병들은 해골을 신성하다고 여기죠.) 아니면 그들은 해골이 뭔지 아예 모를지 모르죠. 어쩌면 <혹성 탈출>이나 보이저 골든 디스크나 화학식을 이용한 소통 역시 통하지 않을지 모르죠. 솔직히 저는 인류가 외계 지적 존재를 쉽게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서로 만난다고 해도,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