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필립 딕과 <소마>와 SF 소설들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필립 딕과 <소마>와 SF 소설들

OneTiger 2018. 2. 13. 22:40

비디오 게임 <소마>는 해저 기지를 돌아다니는 생존 공포물입니다. 2015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게임 주인공은 뇌 실험에 참가했으나, 잠시 정신을 잃은 후, 기이한 해저 기지에서 깨어납니다. 멀쩡한 대도시에서 갑자기 폐허가 된 해저 기지로 이동했죠. 게임 주인공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사방을 돌아다니고, 괴상한 로봇들과 대면합니다. 뇌 실험, 자아 분열, 괴이한 해저 기지, 괴상한 로봇들. <소마>는 필립 딕을 떠올리게 하는 게임이고, 그런 게임답게 서두에서 필립 딕을 언급합니다.


"현실은 당신이 그것을 믿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게임 <소마>는 이런 문구에 충실한 사건들을 전개하고, 그래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한 적이 없습니다. 게임 설정이 전형적으로 보였고, 구태여 플레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소마>에 관한 몇몇 정보나 소감을 읽어봤고, 역시 이 게임이 여러 SF 작가들이 제시한 의문이나 발상,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마>라는 게임이 SF 작가들의 전철만 따라간다거나 진부한 주제를 답습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 발상이나 주제, 철학이 사이언스 픽션의 전부라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SF 소설들이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분열된 자아나 자아 전송 같은 소재가 필립 딕의 전유물인 것처럼 사람들은 이야기해요. 하지만 필립 딕은 그런 소재를 말하는 유일한 SF 작가가 아니죠. 필립 딕 이전에도 그런 소재를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있었고, 다른 작가들 역시 필립 딕과 비슷한 시기에 좋은 작품들을 내놨습니다. 창작가들은 자신들만의 색깔, 성향, 개성, 필력 등을 자랑합니다. 게다가 똑같은 발상이나 주제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서로 다른 이야기 구조나 내용을 전개할 수 있겠죠.


똑같이 자아 전송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어떤 SF 소설은 우주 전쟁을 터뜨릴 수 있고, 어떤 SF 영화는 가상 공간을 그릴 수 있고, 어떤 SF 게임은 해저 기지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SF 소설과 SF 영화와 SF 게임은 각자 다른 느낌을 풍길 수 있고, 똑같은 주제를 서로 다르게 펼칠 수 있습니다. 창작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발상이나 주제라고 해도, 우리는 이런 방향성을 무시하면 안 될 겁니다. 이런 방향성에 따라 창작가들은 주제를 서로 다르게 수용하거나 해석할 수 있죠. 독자나 관객이나 게임 플레이어 역시 그럴 테고요.



저는 <소마>가 꽤나 전형적인 주제를 풀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소마>는 여러 SF 작가들이 제시한 의문이나 주제에서 별로 멀어지지 않아요. 새로운 발상이 보이지 않고, 별로 하드하지 않죠. 강렬하게 뒷통수를 때리는 충격이 없었습니다. 초반부는 비교적 흥미로웠으나, 중반부 이후 참신하거나 파격적인 시도가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소마>가 좋은 SF 창작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상이나 주제, 철학은 사이언스 픽션을 완성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닙니다. 설사 그것들이 제일 중요하다고 해도, 다른 요소들 역시 사이언스 픽션을 보완할 수 있어요.


<소마>는 멋지고 인상적인 분위기와 음악과 그래픽과 배우 연기와 구성을 자랑하고, 그래서 저는 이 게임이 좋은 창작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적인 주제가 뻔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이 게임을 평가하면, 그건 오류일 겁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유는 그저 주제나 철학을 깨닫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소설에서 필력을 느낄 수 있고, 영화에서 영상미를 감상할 수 있고, 게임에서 퍼즐을 풀 수 있어요. 소설이나 영화나 게임은 어떤 주제를 이용해 다채로운 상황들을 조성할 수 있어요. 저는 창작물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발상이나 주제, 철학을 가장 제대로 전개할 수 있는 매체는 소설입니다.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에서 출발했고, 여전히 소설은 얼마나 사이언스 픽션이 전복적이거나 파격적일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 블로그에서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몇 번 반복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반복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소설을 간과하고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SF 소설은 SF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들 블록버스터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 열광하나, 소설은 그렇게 관심을 받지 못하죠.


그 이유는 영화나 비디오 게임이 감상하기가 편하기 때문일 겁니다. 영상이 있고, 음악이 있고, 소리가 있죠. 텍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비교적 작고, 설사 텍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해도, 영상이나 음악은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서 빠지지 않는 부분입니다. 덕분에 사람들은 쉽게 영화나 비디오 게임을 감상할 수 있어요. 소설은 그렇지 않죠. 하지만 아무리 영화나 비디오 게임이 쉽다고 해도, 결국 핵심은 소설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 몰두하는 만큼 사람들이 소설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소마>를 플레이한 사람들이 <시간의 미로>나 <유빅>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SF 작가들이야말로 정말 핵심적인 주제를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