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최신 하드 SF 소설들의 흐름 본문
예전에 <블라인드 사이트>를 읽었을 때, 망치가 뒷통수를 가격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런 이유도 있었으나, 그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최신 SF 소설을 읽는다는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SF 소설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19세기 소설과 1950년대 소설과 21세기 이후의 소설은 서로 다를 겁니다. 게다가 최신 하드 SF 소설은 훨씬 다르겠죠. 저는 자연 과학계가 얼마나 빠르고 복잡하게 변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자들은 수많은 논문들을 쏟아내는 중일 겁니다. 그 논문들은 저 같은 21세기 원시인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내용을 담았겠죠. 저는 대중적인 과학 잡지조차 힘들게 따라갑니다. <과학동아>나 <뉴턴> 같은 잡지는 저에게 다소 버겁습니다. 가끔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잡지 역시 버겁고요. 아마 비단 저만 그렇지 않을 겁니다. 자연 과학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은 <뉴턴> 같은 잡지가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최신 과학 논문은 훨씬 어렵겠죠. 일반인은 당연히 학술적인 논문을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최신 과학 논문은 더욱 그럴 겁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은 그런 최신 과학 논문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겠죠. 하드 SF 작가들은 더욱 그럴 테고요. 그런 작가들이 하드 SF 소설을 쓴다면, 얼마나 기상천외한 결과물이 등장할까요? 그런 작가들은 얼마나 도발적이고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상상을 펼칠까요? 그런 소설을 읽기는 매우 힘들 겁니다. <쿼런틴>이나 <블라인드 사이트> 같은 소설이 증명하는 것처럼 하드 SF 소설을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 그 하드 SF 소설이 고전이 아니라 최신 작품이라면, 독서는 더욱 고통스러울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작가는 소설 속에서 파격적인 상상력을 펼쳤을 테고, 독자는 책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겠죠. 솔직히 저는 <쿼런틴>이나 <블라인드 사이트>가 이야기하는 과학 이론을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소화 불량에 걸린 것처럼 몇 번씩 독서를 멈춰야 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저런 소설들을 읽은 이유는 지적 허영심 때문일지 모르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유치하다고 무시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너무 어렵다고 불평하죠. <쿼런틴> 같은 소설은 왜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어렵다고 불평하는지 증명합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대략적인 얼개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저는 <쿼런틴>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으나, 대략적인 얼개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운 지식을 따라가지 못했으나, 소설이 담은 치밀한 논리를 따라갈 수 있었어요. 자연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이 하드 SF 소설을 읽는다면, 그건 지적 허영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식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도 논리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 역시 하드 SF 소설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죠.
아마 해외에는, 특히 미국 출판 시장에는 그런 파격적인 소설들이 많을 겁니다. 제가 감히 그 내용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놀라운 소설들이 많겠죠. 그런 하드 SF 소설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배를 이끌지 모릅니다. 소프트 SF 소설들 역시 사이언스 픽션을 이끌 수 있으나, 역시 사이언스 픽션의 정수는 하드 SF 소설에게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소설들을 알지 못합니다. 인터넷의 서평들을 읽는다고 해도 직접 책을 읽는 것과 서평을 읽는 것은 확연히 다르죠. 게다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우리나라 출판사들은 그런 책을 선뜻 번역하지 못할 듯해요.
여기에서 제가 SF 소설들을 말한다고 해도, 그저 19세기나 20세기 소설들을 말할 뿐이겠죠. 사이언스 픽션을 이끄는, 선구적인 하드 SF 소설들이 아니라. 영화나 비디오 게임은 어떨까요. 영화나 비디오 게임은 언어적인 장벽이 비교적 낮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배급사들은 꽤나 적극적으로 미국 SF 영화들을 수입합니다. 이런 영화나 비디오 게임을 이용해 하드 사이언스 픽션의 최신 흐름을 접할 수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SF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적인 사변이 아니라 시각 효과나 영상 미술입니다. SF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전술이나 캐릭터 조작입니다.
저는 SF 영화와 SF 게임을 무시하고 싶지 않으나, 이런 것들은 최신 하드 SF 소설에 미치지 못해요. 따라서 저는 최신 하드 SF 소설의 흐름을 접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언스 픽션을 논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쩌면 저는 그저 철이 한참 지난 담론들만 늘어놓는 중일지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겁니다. 뭐, 저는 거창하게 최신 SF 소설을 비평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취향을 떠벌일 뿐이에요. 비록 이게 철이 한참 지난 구닥다리라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