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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플래닛 베이스>와 과거 시제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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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닛 베이스>와 과거 시제들

OneTiger 2019. 12. 2. 21:13

[사이언스 픽션과 미래학 서적은 똑같이 외계 개척 기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양쪽은 비슷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우주 이야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양쪽에는 아주 뚜렷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수마트라 호랑이와 아프리카 치타가 비슷한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우주 이야기는 비슷합니다. SF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는 천문학 서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외계 탐사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에, 독자는 SF 소설을 읽기 원할지 모릅니다. SF 소설과 우주 이야기는 모두 궤도 엘리베이터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SF 소설과 우주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주 이야기'는 제프리 베넷이 쓴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다> 같은 작업들을 가리킵니다.


많은 SF 독자들은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 SF 소설이 아니라고 판단할 겁니다. 이건 천문학 서적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게 천문학 서적이라고 해도, 어떤 SF 독자들은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 사이언스 픽션에 아주 가깝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입니다. 사변 장르에는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판타지가 있습니다. 사변 장르 안에서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유럽 판타지는 비슷한 분류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여기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제프리 베넷이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사변 장르에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 사변 장르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외계인>보다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는 훨씬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사변 장르 안에서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가 비슷하다고 해도, 어떤 SF 독자들은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를 갈라놓고 사이언스 픽션과 <우리는 모두 외계인>을 함께 묶기 원할 겁니다. 만약 <화성의 공주>와 중세 판타지 소설이 비슷한 분류가 된다면,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사변 장르 안에서 <화성의 공주>와 중세 판타지 소설은 비슷한 분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소한 정의> 같은 소설은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과 중세 판타지 중에서 <사소한 정의>가 무엇에 가까운가요? 만약 <사소한 정의>가 문제가 된다면, <식스 웨이크>는 훨씬 커다란 문제가 될 겁니다. 적어도 <사소한 정의>는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듄>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는 판타지에 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식스 웨이크>는 사이언스 판타지보다 하드 SF에 훨씬 가깝습니다. <사소한 정의>와 <식스 웨이크>는 다르고, 많은 SF 독자들은 중세 판타지와 <식스 웨이크>보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과 <식스 웨이크>가 훨씬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낙원의 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화성의 공주>부터 <낙원의 샘>까지, SF 울타리 안에는 아주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다채로운 스펙트럼 속에서 어떤 것은 중세 판타지에 가깝고, 어떤 것은 <우리는 모두 외계인>에 가깝습니다. 중세 판타지 소설과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SF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하나, SF 울타리에서 다채로운 스펙트럼은 튀어나오고 중세 판타지 소설과 만나거나 <우리는 모두 외계인>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에게 사이언스 픽션과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비슷한 항목이 됩니다. 이런 독자들은 <화성의 공주>를 멀리 치우고 <식스 웨이크>와 <낙원의 샘>과 <우리는 모두 외계인>을 함께 묶기 원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 SF 울타리에 직접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과 <우리는 모두 외계인>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이런 유사성들은 그저 단순한 연결 고리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서구 근대화를 이용합니다. 어떤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연 과학 지식들을 훨씬 엄중하게 적용합니다.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환상적인 차원을 향해 도약해야 하나, 훨씬 튼튼한 받침대 위에서 어떤 사이언스 픽션들은 도약하기 원합니다. 이런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연 과학 지식들을 훨씬 엄중하게 적용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는 모두 외계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우주를 둘러봅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우주 안에서 어디에 우리가 있는지 묻습니다. 이런 물음은 아주 장대하고, 이런 물음 덕분에, 독자는 아득한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이것을 물을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무한한 우주 안에서 인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플래닛 베이스> 같은 외계 개척 게임조차 물어볼 수 있습니다.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플래닛 베이스>가 그저 건설 게임에 불과하다고 느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이 풍력 발전기를 짓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들은 우주와 인류 위상을 묻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와, 세상에. 나중에 정말 외계 행성에서 인류가 살 수 있을까? 이게 가능할까? 여기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 만약 외계 행성에서 인류가 살아간다면, 인류가 크게 바뀌지 않을까? 외계 행성에서 지구 일상이 이어질 수 있을까? 이게 그저 지구 중심주의에 불과하지 않나?"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 속의 인류 위상을 물어볼 수 있습니다. <플래닛 베이스>는 이런 것들을 직접 제시하지 않으나, <플래닛 베이스>에는 이것들을 묻기 위한 가능성, 잠재력, 재료가 있습니다. 적어도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보다 <플래닛 베이스>에는 훨씬 구체적인 잠재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이 엄청나고 멋지고 감동적인 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독자는 막막한 우주와 낯선 외계와 인류 위상을 묻지 않을 겁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 독자가 적극적으로 묻고 해석하고 의심한다면,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 독자는 막막한 우주와 낯선 외계와 인류 위상을 이끌어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중세 판타지 소설은 재료들을 직접 늘어놓지 않습니다.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 외계 얼음 행성과 두꺼운 대기와 미약한 항성 에너지와 거친 바람과 풍력 발전기와 바이오 돔과 무인 로봇과 장거리 우주선은 주된 재료들이 아닙니다. <플래닛 베이스>에서 이것들은 주된 재료입니다.


"와, 사방은 얼음이야. 만약 우리가 얼음을 캐고 산소를 분리할 수 있다면, 호흡 걱정은 없을 거야."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는 농담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게 그저 가벼운 농담에 불과하다고 해도, 분명히 게임 플레이어는 과학자들과 얼음 행성을 향해 농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농담은 훨씬 아득한 격차를 향해 나아갑니다. 우주 탐사 소설에서 호흡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장거리 항해 우주선은 (얼어붙은) 소행성이 로또라고 여길 수 있으나, 던전 모험가 일행에게 얼음은 산소를 분리하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얼음에서 산소를 분리한다고 해도, 이건 아득한 격차를 향해 나가지 않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 과학을 이용하고 비일상적인 상황을 상정합니다. 그래서 <플래닛 베이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커다란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지구 일상은 인류 문명의 전부가 아닙니다. 언젠가 인류 문명은 바뀔지 모릅니다. 얼음 행성에서 무인 로봇들과 함께 개척 과학자들은 풍력 발전기와 바이오 돔을 지을지 모릅니다. 비록 이런 미래가 그저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해도, 아무도 미래 개척을 장담하지 못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안주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시대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이런 격차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가 이런 격차를 제시한다고 해도, 격차를 제시하기 위한 가능성, 잠재력, 재료들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독자는 엘프 도시를 읽고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처럼, 중세 판타지 역시 비일상적인 상황, 비인간 존재를 제시합니다. 외계 얼음 개척 기지의 무인 로봇이 비인간 존재인 것처럼, 웅장한 중세 성채의 화려한 엘프 성직자 역시 비인간 존재입니다. 하지만 개척 기지의 무인 로봇과 중세 성채의 엘프 성직자가 똑같이 비인간 존재라고 해도, 개척 기지의 무인 로봇은 서구 근대화에 기반합니다.



반면, 중세 성채의 엘프 성직자는 신화와 전설, 민담에 기반합니다. 서구 근대화가 수많은 것들을 (부정적/긍정적으로) 바꾸었고, 여전히 서구 근대화가 장엄한 외계 골디락스 행성을 파악하거나 지독한 온실 가스를 뿜기 때문에, 서구 근대화는 인류 문명을 계속 바꿀 겁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가 얼음 행성과 풍력 발전기와 개척 생물학자와 바이오 돔과 무인 로봇을 바라보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시대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외계 얼음 행성에서 무인 로봇들과 개척 과학자들이 풍력 발전기와 산소 공급기와 바이오 돔을 뚝딱뚝딱 짓는다면, 그들은 계획 경제를 시도할지 모릅니다.


지구에서 지배적인 경제 현상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하지만 외계 얼음 행성에서 많은 것들은 바뀔 테고, 자본주의 역시 바뀔지 모릅니다. 바이오 돔은 개인적인 소유, 개인적인 생산 수단보다 모든 개척 과학자의 공동 소유, 공유 생산 수단이 될지 모릅니다. 인종, 성별, 나이, 민족, 역할에 상관없이, 모든 개척 과학자는 평등하게 바이오 돔을 이용하고 하루를 생활하기 위해 충분한 열량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건 시대 격차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는 이런 시선과 전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 판타지, 웅장한 성채, 엘프 성직자에게는 이런 전망이 없거나 다소 부족합니다.



웅장한 왕궁과 성채는 봉건 사회일 겁니다. 여기에는 왕족들과 귀족들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현명하고 덕스러운 권력자들일지 모르나, 현실 속에서 상당히 많은 봉건 귀족들은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9세기 파리 코뮌을 비롯해 혁명 세력들이 평등을 주장했을 때, 지배 계급들, 귀족들, 성직자들은 평민들을 압박했습니다. 웅장한 왕궁과 성채에서 봉건 엘프 귀족이 덕스러운 권력자라고 해도, 이건 정말 '판타지'입니다. 솔직히 이미 봉건 사회 그 자체는 평등과 어긋납니다. 평등한 바이오 돔과 달리, 봉건 왕궁과 성채는 평등해지지 못합니다. 봉건 성채는 시대 격차를 말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중세 판타지에서 왕권 신수설, 혈통 계승은 단순한 지배 계급 논리보다 설정이 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신은 왕족을 점지합니다. 중세 판타지는 왕족을 정당화합니다. '왕족'은 과거입니다. (이른바) 20세기 문명인 독자에게 '왕족'은 과거입니다. 어떻게 '왕족'이 시대 격차를 말할 수 있나요? 어떻게 '왕족'이 인류 사회가 고정적이지 않다고 호소할 수 있나요? 과거 왕족이 시대 변화를 탄압했음에도, 과거 왕족이 고정적인 세계관을 선호했음에도, 어떻게 봉건 사회가 드넓은 우주와 인류 위상을 물을 수 있나요? 엘프 성직자는 유사 종족 위상을 신학적으로 물을 수 있으나, 신학적인 물음이 웅장하고 광범위하다고 해도, 결국 이런 물음은 변화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건 시대 격차가 아닙니다. 사회 과학적인 측면과 자연 과학적인 측면 양쪽에서 엘프 성직자는 변화를 말하지 못합니다.



이건 중세 유럽 판타지가 고루한 구닥다리 골동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근대 사회는 절대적으로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근대 인류 문명은 피곤하고 바쁜 도시 생활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근대 사회는 얄팍한 상술과 비열한 장사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근대 과학은 복잡하고 두렵고 어려운 대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변화, 시대 격차를 말하나, 변화와 시대 격차가 반드시 긍정적인가요? 엄마가 새아빠와 결혼할 때, 아무리 진실한 사랑으로서 엄마와 새아빠가 이어진다고 해도, 아이는 새아빠를 싫어하고 미워할지 모릅니다. 변화는 반드시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종종 변화는 두려움입니다.


왜 우리가 미래를 내다봐야 하나요? 심지어 시대 격차는 영성을 지울지 모릅니다. 과거에서 많은 것들은 베일에 쌓였습니다. 베일 덕분에, 사람들은 신, 초월적인 것, 영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과학은 우주와 자연과 사회와 인간을 계속 파악하고 밝히기 원합니다. 근대 과학이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과학 그 자체는 우주를 파악하기 원할 겁니다. 과학이 우주를 파악하기 때문에, 과학은 베일을 벗기고 벗기고 벗기고 다시 벗깁니다. 인간은 초월적인 것, 영성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만약 해저 도시가 일상이 된다면, 어떻게 우리가 경외적인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나요?



[엘프 도시는 비일상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변은 인류 문명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걱정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정말 과학이 우주 만물을 파악할 수 있나요? 우리가 불확정성 원리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주는 너무 광대합니다. 과학은 우주 만물은 밝히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과학이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벗어난다면, 심지어 과학은 자신을 멈출지 모릅니다. 둘째, 만약 과학이 자연을 파악한다고 해도, 우리가 영성을 버려야 하나요? 중세 성직자와 달리, 오늘날 고생물학자들은 스테고사우루스와 아르켈론을 압니다. 하지만 고생물학자들은 자연 생태계와 생명 진화 역사가 정말 신비롭고 웅장하다고 느낍니다. 인간에게 영성이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과학과 영성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미래를 싫어할지 모릅니다. 누가 미래를 장담할 수 있나요? 아무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외계 얼음 행성에서 무인 로봇들이 바이오 돔을 무사히 뚝딱뚝딱 지을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미래는 '무지'입니다. 미래가 '무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미지, 무지에서 두려움은 출발합니다. 반면, 이미 우리는 과거를 압니다. 우리는 미래보다 과거를 바라봐야 합니다. 근대가 중세를 지났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과거, 중세, 봉건 사회를 압니다. 봉건 사회는 절대 평등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중세 봉건 사회를 얼마든지 미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세 봉건 사회를 미화하고 중세 판타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아, 여기는 안락합니다. 이미 근대가 중세를 지나쳤기 때문에, 중세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피곤하고 바쁜 도시 생활이 없고, 얄팍한 상술과 비열한 장사치가 없고, 복잡하고 어려운 과학 기술들이 없습니다. 중세 판타지가 이런 것들을 말한다고 해도, 이런 것들은 지배적이지 않습니다. 중세 판타지에는 전근대적인 미덕들, 명예, 충성, 신앙, 기사도, 공동체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근대 사회는 너무 개인주의적일 겁니다. 반면, 중세 판타지에는 자본주의가 없습니다.


중세 판타지에 자본주의, 자유주의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는 개인의 자유, 개인주의가 없고, 중세 판타지는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 독자는 안락하고 포근한 공동체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외계 얼음 행성? 개척 과학자들과 무인 로봇들? 바이오 돔? 이런 것들은 두렵고 위험하고 복잡하고 비열한 미지들입니다. 외계 얼음 행성은 미지의 세상입니다. 엘사 여왕은 "Into the unknown~♬"을 즐겁게 부를지 모르나, 많은 사람들은 미지의 세상을 쉽게 반기지 않을 겁니다. 'Unknown Worlds' 게임 제작자들은 미지의 세상, 비경 탐험 <서브노티카>를 만들었으나, 미지는 두려움입니다.



<네버윈터 나이츠 2>에서 드루이드가 데이노니쿠스를 소환한다고 해도, 이건 변화, 시대 격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스테고사우루스를 이용하고 시대 격차, 생명 진화 역사를 떠들 수 있으나, 드루이드는 떠들지 말아야 합니다. 드루이드가 생명 진화 역사를 떠든다고 해도, 이건 장대한 미래 생물 다양성으로 이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가 미지, 무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Into the unknown~♬"을 즐겁게 부르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외계 생물 다양성 같은 'Unknown Worlds'를 향해 뛰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솔직히 엘사 여왕 역시 시대 격차를 풍기지 않습니다.


시대 격차는 위험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엘사 여왕이 미지의 세상을 찾아간다고 해도, 이건 판타지 속의 미지입니다. 판타지 속의 미지는 시대 격차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아무리 엘사 여왕이 미지의 세상을 찾아간다고 해도, 민중들은 무산자 계급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왕족 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민중들은 "인간은 평등하다!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혈통 계승을 폐지하라! 민중들은 토지, 강물, 바다, 하늘을 공유해야 한다!"고 외치지 않을 겁니다. 판타지 속의 미지에는 무산자 계급 혁명을 뒷받침하기 위한 잠재력이 없습니다. 무산자 계급 혁명은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무산자 계급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판타지에서 우리는 공주님과 왕자님을 만나고 동화를 꿈꿀 수 있습니다. 판타지 속에는 예쁜 공주님과 잘생긴 왕자님이 있습니다. 얼마나 이게 안락하고 행복한가요. 반면, 외계 심해 생태계와 첨단 미래 잠수정은 위험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외계 심해 생태계는 지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첨단 미래 잠수정은 과학 기술입니다. 과학 기술은 세상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첨단 과학 기술은 세상을 계속 (긍정적/부정적으로) 바꾸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주 승무원은 외계 바다 괴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첨단 기술이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구에서 인간이 벗어날 수 있나요? 인간이 외계 바다 괴수를 만나는 것처럼, 첨단 과학 때문에,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계속 바뀔 겁니다.


만약 세상이 계속 바뀐다면, 심지어 무산자 계급은 혁명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아아, 이건 너무 두렵습니다. 붉은 깃발! 폭력과 투쟁! 얼마나 이게 끔찍합니까. 볼셰비키와 로마노프 왕조가 대립하는 것처럼, 이미 혈통 계승 그 자체가 억압이고, 그 자체로서 엘사 '여왕'은 끔찍한 폭력이나, 고작 무산자 민중 따위가 중요한가요. 안락한 봉건 사회, 왕궁과 성채에서 우리는 엘프 성직자를 만나야 합니다. 개척 과학자는 독자를 미지의 세상으로 떠밀고 시대 격차를 제시하나, 엘프 성직자는 안락하고 미화된 과거를 제시합니다. 이렇게 외계 개척 기지와 웅장한 왕궁, 개척 과학자와 엘프 성직자,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는 다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중세 판타지 사이에는 다른 많은 차이들이 있으나, 시대 격차는 아주 커다란 차이입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변화, 시대 격차를 반드시 제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이언스 픽션들보다 어떤 판타지들은 훨씬 전복적일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 <솔라리스>와 <노변의 피크닉>에서 여자는 주체보다 대상입니다. 남자들은 주체가 되나, 여자들은 보조적입니다. 반면, 중세 판타지 <업루티드>에서 여자는 적극적인 화자입니다. <스타 워즈>와 달리, 고대 신화 판타지 <모아나>에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친가에 속한다고 해도, <모아나>에서 할머니와 손녀 관계는 중요합니다. 이런 사례들처럼, 그 자체로서 장르는 전복적이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변화, 시대 격차를 제시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1차원적이고 안락한 시대 격차를 제시할지 모릅니다. 근대 인류 역사는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근대 인류 역사는 너무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18~21세기 초반 동안, 우파가 좌파를 일방적으로 탄압했고, 학살했고, 고립시켰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탄압과 학살과 고립을 은폐하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우파와 좌파가 동등하게 대립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세뇌에 빠지고 우파와 좌파가 동등하게 대립한다고 믿습니다. 이건 망상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망상이 현실이라고 굳건하게 믿습니다.



이런 망상 속에서 사람들은 중립을 인정합니다. 너무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립이 존재하지 못함에도, 사람들은 중립을 믿습니다. 이런 중립은 보수 우파를 향해 수렴합니다. 이건 우파와 별로 다르지 않으나, 이런 얄팍한 중립들은 우파와 좌파를 모두 거부하고 인간의 본질을 외칩니다. 사상과 당파성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얄팍한 중립들은 인간의 본질에 치중합니다. 현실주의라는 이름과 달리, 존 그레이의 현실주의 같은 것들 역시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을 비현실적으로 상정합니다. 아무리 얄팍한 중립들이 인간의 본질을 외친다고 해도, 지배적인 관념에서 중립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SF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파가 좌파를 일방적으로 고립시켰음에도, 존 그레이가 이런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SF 작가들은 우파와 좌파가 동등하게 대립한다고 믿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시대 격차를 제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장르 그 자체는 전복적이지 않습니다. SF 작가가 장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당파성을 불어넣을 때, 마침내 장르는 전복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시대 격차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고, 사이언스 픽션이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한다고 해도, 다른 측면들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시대 격차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이 과학 학습 만화조차 드넓은 우주 속의 인류 위상을 물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차이, 변화 가능성, 시대 격차가 기준이 된다면, 얼음 행성 기지와 웅장한 왕궁 중에서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 무엇에 가까운가요? 많은 사람들은 얼음 행성 기지라고 대답할 겁니다. <플래닛 베이스>와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가깝습니다. <플래닛 베이스> 같은 사이언스 픽션과 <우리는 모두 외계인> 같은 '우주 이야기'는 가깝습니다. 그래서 얼어붙은 아렌델 왕국과 얼음 외계 행성이 똑같이 사변 장르라고 해도, 많은 SF 팬들은 <플래닛 베이스>와 <우리는 모두 외계인>을 함께 묶기 원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 근대 자연 과학(서구 근대화)을 이용하고 변화, 시대 격차, 우주적인 시각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과 이런 우주 이야기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정말 '이야기'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이야기'로서 풍력 발전기와 무인 로봇과 바이오 돔은 존재합니다. <플래닛 베이스>는 "무인 로봇들은 풍력 발전기와 바이오 돔을 지었다. 이제 외계 개척 기지는 전력과 영양분을 자급자족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풍력 발전기와 바이오 돔은 과거 시제 "~지었다."와 현재 시제 "~있다."를 붙일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 미래 사건을 친숙하게 설명하기 원한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외계인>는 과거 시제를 붙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미래를 추정합니다.



<우리는 모두 외계인>에서 얼음 행성의 바이오 돔은 기정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 이것을 기정 사실화한다면, 독자는 제프리 베넷이 사기를 친다고 느낄 겁니다. 현실 속에서 얼음 행성의 바이오 돔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얼음 행성의 바이오 돔은 기정 사실이 될 수 있으나, <우리는 모두 외계인>은 추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나중에 얼음 행성에서 무인 로봇들은 바이오 돔을 뚝딱뚝딱 지을지 모른다." 이렇게 우주 이야기는 추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과 미래학 서적이 무인 로봇과 바이오 돔을 똑같이 말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에서 무인 로봇과 바이오 돔은 기정 사실입니다.


많은 문학들은 어떤 사건이 기정 사실이거나 현재 진행형 사건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문학들은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를 이용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미래 사건이라고 해도, '이야기'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개척 생태학자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탑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탑승했다'는 과거 시제입니다. 현실 속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코빼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야기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과거 시제를 붙일 수 있습니다. 반면, 천문학 서적이나 미래학 서적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개척 생태학자에게 과거 시제를 붙이지 못합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문학이 어떤 사건을 과거, 기정 사실이라고 간주하나요? 어쩌면 신화는 대답이 될지 모릅니다. 신화는 어떻게 자연이 나타나고 문명이 나타나는지 이야기합니다. 고전적인 웅녀 설화부터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테 피티 전승까지, 신화는 무엇 때문에 자연과 문명이 나타나는지 이야기합니다. 이미 자연과 문명은 존재합니다. 어떻게 처음 자연과 문명이 나타났나요? 신화는 이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만약 신화가 이것을 설명한다면, 문명(민족)은 명분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신화는 문명에게 명분을 제공합니다. <모아나>는 어머니 섬이 생명체들을 퍼뜨렸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섬 덕분에, 모투누이 부족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미 어머니 섬은 생명체들을 퍼뜨렸습니다. 이건 기정 사실입니다. 전승은 기정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미 어머니 섬이 생명체들을 퍼뜨렸기 때문에, 이건 과거입니다. 그래서 전승은 "어머니 섬은 생명체들을 퍼뜨렸으나, 마우이는 심장을 훔쳤다."라고 과거 시제를 동원합니다. 근대 사회는 신화에서 벗어났(거나 벗어난 것 같)으나, 문학은 인생을 반영합니다. 이미 인생은 존재합니다. 인생보다 문학은 선천적이지 않습니다. 이미 인생은 기정 사실입니다. 신화처럼, 많은 근대 문학들은 과거 시제를 동원하고,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비로운 외계 해양 생태계와 첨단 잠수정은 '기정 사실'입니다. 미래학 서적에는 오직 추정만 있습니다.]



문학이 인생을 반영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가상의 미래) 인생을 반영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속의 개척 생태학자에게는 인생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이것을 반영합니다. 문학에게 인생이 선천적인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게 개척 생태학자의 인생은 선천적입니다. 비록 현실 속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개척 생태학자가 없다고 해도, 문학에게 인생이 선천적인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개척 생태학자의 인생이 선천적이라고 간주합니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은 개척 생태학자 인생을 혼자 상상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참고하고 개척 생태학자 인생을 만듭니다.


SF 작가가 개척 생태학자 인생을 쓰든, SF 독자가 개척 생태학자 인생을 읽든, 작가와 독자 모두 현실을 참고합니다. 문학이 우주 만물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우주 만물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특히, 현실 속에서 개척 생태학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훨씬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할 겁니다. 문학에게 인생이 선천적인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게 현실 속의 생태학자는 선천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이용하고 가상의 미래 인생을 상정합니다. 이미 가상의 미래 인생은 존재합니다. 이게 '기정 사실'이기 때문에, SF 소설은 "~했다."라고 말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기정 사실이나, 미래학 서적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그저 추정에 불과합니다. 만약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툰드라 구역 생태학자와 통제실 기술자가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에서 이건 기정 사실이나, 미래학 서적에서 이건 그저 추정에 불과합니다. 두근거리는 사랑 속에서 생태학자와 기술자가 물고, 빨고, 들이대고, 만지고, 쑤시고, 받아준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에서 이건 기정 사실이나, 미래학 서적에서 이건 그저 추정에 불과합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미래학 서적이 똑같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기정 사실과 추정은 다릅니다. 독자는 추정보다 기정 사실에 감정을 훨씬 깊게 이입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자는 기술자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고, 기술자는 생태학자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빨았다."와 "어쩌면 생태학자와 기술자는 섹스할지 모른다."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이끌었고' 및 '빨았다'와 '어쩌면' 및 '모른다'는 다릅니다. 독자는 후자(추정)보다 전자(기정 사실)에 감정을 훨씬 깊게 이입할 겁니다. 심지어 전자(기정 사실)는 탐스럽다는 주관적인 감성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기정 사실보다 추정에 감정을 이입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기정 사실과 추정은 다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미래학 서적이 똑같은 것을 이야기함에도, 만약 어떤 SF 팬들이 미래학 서적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면, 그 이유는 '기정 사실'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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