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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풀의 죽음>과 시민 배당, 해석과 이용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풀의 죽음>과 시민 배당, 해석과 이용

OneTiger 2019. 7. 3. 20:11

존 크리스토퍼는 <풀의 죽음>을 썼습니다. 소설 <풀의 죽음>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작물들이 죽어나가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심각한 위기에 부딪힙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아비규환에 빠집니다. 유럽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우리는 유럽이 우월하고 고상하고 똑똑하고 세련되었다고 생각하나, 소설 속에서 유럽 사회는 무법천지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유럽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부려먹고, 잡아먹고, 성 폭행합니다. 소설 <풀의 죽음>은 이런 끔찍하고 비참한 상황들을 냉정하게 늘어놓습니다.


소설 시점은 누군가를 특정하게 애도하거나 동정하거나 비판하거나 나무라지 않습니다. <풀의 죽음>은 냉정한 시선으로 얼마나 고상한 유럽 사람들이 폭력적인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북반구 유럽 백인이 고상하고 남반구 아프리카 흑인이 미개한 열대 깜둥이라고 쉽게 생각하나, <풀의 죽음>은 그게 착각이라고 지적합니다. 인간이 기아에 직면한다면, 얼마든지 인간은 비참하게 타락하고 몰락할 겁니다. 유럽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이 똑같이 기아에 직면한다면, 양쪽 모두 비참하게 타락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프리카 흑인보다 유럽 백인이 훨씬 고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왜 우리가 아프리카 흑인보다 유럽 백인이 훨씬 고상하다고 생각하나요? 왜 우리가 북반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남반구를 미개하다고 무시하나요? 어제 게시글이 이야기한 것처럼, 지리가 우월와 미개함을 나누나요? 그건 아닙니다. 경제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지 모릅니다. 서구 자본주의는 부유합니다. 아프리카 사회주의는 가난합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딪힌다고 해도, 서구 자본주의는 위기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 공황은 세계 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미칩니다. 2008년 금융 대란이 증명한 것처럼, 아직 세계 경제가 산소 호흡기를 떼지 못한 것처럼, 경제 공황은 어마어마한 난리법석입니다.


2008년 이후, 이미 10년이 지났으나, 미국 정부는 자본주의 경제가 다시 호황을 누린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금융 대란 이전,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다시 공황을 두들겨맞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으나, 심지어 더 이상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완벽하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완벽하지 않음에도, 서구 자본주의는 위기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엄청난 구제 금융을 퍼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프리카 사회주의는 너무 취약합니다. 아프리카 사회주의가 기근에 부딪힌다면, 기근은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뒤흔들 테고, 아프리카 사회주의는 당장 망할 겁니다.



민약 아프리카 사회주의가 부유하다면, 아프리카 사회주의는 숱한 식량들을 수입하고 기근을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회주의에게는 막대한 부가 없습니다. 오히려 흑인 인민들이 굶어죽음에도, 아프리카 정부들은 환금 작물들을 팔기 원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회주의는 쉽게 망하고, 우리는 "남반구 깜둥이들, 빨갱이들은 미개하고 멍청해."라고 말합니다. 부유함과 가난함에서 우월과 미개함은 비롯합니다. 왜 서구 자본주의가 부유하고, 왜 아프리카 사회주의가 가난한가요? 갑자기 하늘에서 부유한 서구 자본주의와 가난한 아프리카 사회주의가 뚝 떨어졌나요?


하늘에서 부유함과 가난이 뚝 떨어졌나요? 고상한 유럽 백인들이 태생적으로 부유하고, 미개한 아프리카 깜둥이들이 태생적으로 가난한가요? 그래서 자본주의가 옳고 사회주의가 틀린가요? 갑자기 하늘에서 부유한 자본주의와 가난한 사회주의가 뚝 떨어졌나요? 동아시에서 일본은 서구 자본주의를 빠르게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은 서구 자본주의를 모방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과 달리, 유럽에게는 모방 대상이 없었습니다. 유럽 문명은 모방하지 못했습니다. 유럽 문명은 스스로 자본주의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유럽을 비롯해 서구 문명이 스스로 자본주의를 만들 수 있었나요?



정말 백인들이 고상하고 우월하고 세련되고 똑똑하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백인들이 뚝딱뚝딱 부유한 자본주의를 만들었나요? 막스 베버가 설명하는 것처럼, 정말 백인들이 스스로 뚝딱뚝딱 부유한 자본주의를 만들었나요?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서구 문명은 대항해 시대, 인클로저 사태, 흑인 노예 무역, 마녀 사냥을 거쳤습니다. 대항해 시대는 아메리카 열대 밀림을 파괴했고, 인클로저 사태는 농민 공유지를 수탈했고, 노예 무역은 흑인들을 탄압했고, 마녀 사냥은 여자들을 억압했습니다. 산업 혁명 시대에서 유럽 남자들은 현모양처를 찬양했으나, 사실 수많은 여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비정규직 노동자들로서 앳된 소녀들조차 죽어나가야 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와 소녀 노동자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나요? 자본주의와 대항해 시대, 인클로저 사태, 흑인 노예 무역, 마녀 사냥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나요? 오직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서구적인 근대화가 여자들을 죽였나요? 만약 이런 것들 사이에 필수적인 연결 고리들이 있다면, 존 크리스토퍼가 이런 것들을 강조하기 원했을까요? 소설 <풀의 죽음>이 이런 것들을 강조하나요? 이 게시글에서 첫째 문단은 소설 <풀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제 넷째 문단은 산업 자본주의와 처참한 비정규직 소녀 노동자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논의가 옳은가요? 소설 <풀의 죽음>은 산업 자본주의와 비정규직 소녀 노동자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풀의 죽음>이 비정규직 소녀 노동자를 이야기하지 않음에도, 이웃집 영희가 <풀의 죽음>을 이용해 비정규직 소녀 노동자를 외친다면, 이게 올바른 논의인가요? 심지어 이웃집 영희가 참여 민주주의와 국유화 경제와 시민 배당과 돌봄 노동 사회화를 주장한다면, 이게 올바른 해석인가요? 이웃집 영희가 <풀의 죽음>을 이용해 시민 배당을 주장할 수 있나요? 뭐라고 존 크리스토퍼가 생각했든, 분명히 <풀의 죽음>은 산업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풀의 죽음>은 시민 배당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남한 정부가 매월 90만 원을 모든 성인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가 <풀의 죽음>을 이용해 시민 배당을 주장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이웃집 영희가 틀렸다고 비판할 겁니다. 옆동네 철수는 <풀의 죽음>이 시민 배당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반박할 겁니다. 하지만 이웃집 영희에게는 논리적인 오류가 없습니다. 첫째 문단부터 넷째 문단까지, 논리 전개 과정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소설 <풀의 죽음>이 시민 배당을 주장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논리적인 오류 없이 영희가 <풀의 죽음>을 이용해 시민 배당을 주장할 수 있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 속에서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풀의 죽음>은 서구 우월주의를 꼬집습니다. 서구 우월주의는 서구 자본주의에서 비롯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위해 백인들은 서구가 제3세계를 수탈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백인들은 "서구는 미개한 제3세계를 근대화시켜야 한다. 서구에게는 근대화를 위한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서구 자본주의를 모방하는 동안, 일본 제국주의는 똑같이 이런 주장을 모방합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은 미개한 동아시아를 근대화시켜야 한다. 일본에게는 근대화를 위한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종 차별, 서구 우월주의, 제국주의 침략, 식민지 근대화 이론은 자본주의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풀의 죽음>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 속에는 이미 필수적인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이웃집 영희는 <풀의 죽음>을 읽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는 서구 중심주의, 세계화 자본주의, 인종 차별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비판에는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대안으로써 시민 배당과 돌봄 노동 사회화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웃집 영희는 <풀의 죽음>과 시민 배당과 돌봄 노동 사회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를 비판할 겁니다. 분명히 <풀의 죽음>은 매월 남한 정부가 9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존 크리스토퍼는 남한 정부가 돌봄 노동들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개인적으로 육아에 매달려야 합니다. 여자들이 개인적으로 육아에 매달린다면, 여자들에게는 오직 엄마라는 역할만 있을 겁니다. 여자는 인간입니다. '여자=엄마' 공식은 엉터리입니다. 여자들은 엄마 이외에 다른 역할들을 원할 수 있습니다. 왜 엄청난 스트레스들 속에서 여자들이 억지로 돌봄 노동자들이 되어야 합니까?


아이들이 정말 인류 사회의 미래라면, 인류 사회는 사회적으로 돌봄 노동들을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존 크리스토퍼는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존 크리스토퍼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생각했다고 해도, 소설 <풀의 죽음>은 가난한 미혼모와 돌봄 노동 사회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자신에게 논리적인 오류가 없다고 반박한다면,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가 소설 <풀의 죽음>을 해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겁니다.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가 소설 <풀의 죽음>을 '이용'했다고 비판할 겁니다.


'해석'과 '이용'은 다릅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무엇이 해석이고 무엇이 이용인지 완벽하게 규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이용보다 해석을 좋아할 겁니다. 독자가 소설을 '이용'한다면, 이건 작가와 소설보다 독자에게 힘을 실어줄 겁니다. 어쩌면 이건 독자에게 너무 많은 힘을 실어줄지 모릅니다. 해석은 훨씬 공정합니다. '해석'은 작가, 소설, 독자에게 골고루 비중을 분배합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작가, 소설, 독자가 골고루 비중을 분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비평, 기호학, 언어 철학에서 작가, 소설, 독자는 오랜 논쟁거리입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는 작가를 중시하고, 어떤 철학자는 작가보다 소설을 중시하고, 어떤 기호학자는 독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합니다. 심지어 어떤 철학자들은 독자가 무궁무진하게 소설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해석보다 이용에 가까울 겁니다. 이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이건 독자에게 너무 많은 비중을 일방적으로 분배합니다. 아무리 소설이 수많은 해석들을 낳는다고 해도, 해석에는 어느 정도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독자가 기준을 넘는다면, 이건 해석보다 이용이 될 겁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가 <풀의 죽음>을 '이용'했나요? 시민 배당을 주장하기 위해 이웃집 영희가 <풀의 죽음>을 이용했나요? 이웃집 영희가 <풀의 죽음>을 (해석하지 않았고) 이용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사라져야 하나요? 반드시 독자가 소설을 해석해야 하나요? 독자가 소설을 이용하지 못하나요? 버지니아 울프는 문학 속의 여자 등장인물과 현실 속의 여자 권리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문학 속에서 여자 등장인물이 중요하게 활약한다면, 독자가 "와, 여자들은 중요하게 활약할 수 있어. 인류 사회는 평등해. 성 차별 따위는 없어."라고 '해석'해야 하나요?



소설 <잃어버린 세계>에서 여자 동물학자 새러 하딩이 활약한다면, 독자는 "와, <잃어버린 세계>는 가부장적인 편견을 거부해! <잃어버린 세계>는 여자 과학자를 중시해!"라고 호평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독자는 "이건 엉터리야! <잃어버린 세계>와 달리, 현실 속에서 여자들은 쉽게 과학자가 되지 못해!"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고, 독자는 호평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호평하든 비판하든, 결국 독자는 현실(가부장적인 사회)을 인식해야 합니다.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야 합니다. 다른 창작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디오 게임 <심파크>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심파크>는 절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심파크>와 인공 생태계 SF 소설을 함께 언급한다면, 이게 해석인가요, 아니면 이용인가요? 만약 이웃집 영희가 <심파크>와 생태학 SF 소설을 이용해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비판한다면, 이게 해석인가요, 아니면 이용인가요? 분명히 이웃집 영희는 현실 속의 커다란 연결 고리들을 이용해 인공 생태계 SF 소설과 <심파크>와 급진적인 환경 운동을 함께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오류가 없습니다. 문학 평론가가 이걸 비판해야 하나요?



[생태학 SF 덕질이 <Among Ripples 2>를 외면해야 하나요, 아니면 이걸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나요?]



뜻 인공 생태계 SF 소설과 <심파크>와 급진적인 환경 운동은 이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들은 서로 독립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가 이것들을 함께 말한다면, 문학 평론가는 영희를 비판할지 모릅니다. 비단 문학 평론가만 아니라 SF 독자들 역시 이웃집 영희가 황당무계하다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고로 덕후가 1)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2)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 3) 좋아하는 것으로 무엇을 하는지 규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게 '덕질 3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3번째 단계 "덕후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무엇을 하는가?"는 가장 어려운 문제일지 모릅니다. 1번째 단계와 2번째 단계에서 덕후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반면, 3번째 단계에서 덕후는 스스로 새로운 뭔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건 재생산입니다. 열정적인 SF 독자들이 SF 평론가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처럼, 사실 이런 재생산은 SF 팬덤을 뒷받침하기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덕후가 뭔가를 좋아한다면, 덕후는 자신이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규정해야 할 겁니다. 생태학 SF 덕후들은 생태학 SF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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