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페르디도 기차역>과 하수구 던전 탐험 본문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19세기의 거대한 산업 도시 뉴크로부존을 보여줍니다. 뉴크로부존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도시 판타지와 스팀펑크 설정이 보여줄 수 있는 온갖 요소들을 뉴크로부존에 들이부은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어떤 것은 사소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뉴크로부존에는 흡혈귀들이 있으나, 흡혈귀들은 별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사실 흡혈귀를 이야기하는 도시 판타지들은 넘쳐납니다. <트와일라잇>과 파생 소설들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판타지 독자들은 숱한 흡혈귀 도시 판타지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만약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이 흡혈귀들을 많이 보여준다면, 이 소설 역시 그런 진부한 사례가 되겠죠. 독자들은 그게 시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고요. <페르디도 기차역>은 도시 판타지들과 스팀펑크 설정들을 열심히 쓸어담았고 추석 종합 선물 세트처럼 그것들을 포장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설정들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해요. 그것들은 그저 주변 배경을 구성할 뿐이죠. <페르디도 기차역>은 그런 일반적인 설정들을 이용해 병풍을 쳤고,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징그러운 설정을 중앙에 배치했습니다.
그런 '일반적인 병풍 설정들' 중에는 던전 탐험이 있습니다. 판타지 이야기에서 던전 탐험은 빠지지 않는 소재입니다. 던전 탐험은 중세 유럽 판타지의 주된 소재이나, 다른 판타지 장르들이나 SF 장르들 역시 던전 탐험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어요.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숱한 설정들을 쓸어담았고, 던전 탐험은 예외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에서 던전은 하수구입니다. 19세기 산업 도시로서 뉴크로부존에는 아주 어마어마한 하수도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하수도는 방대하고 복잡하고 위험한 미궁이 됩니다. 뉴크로부존 하수구는 다이달로스가 울고 가는 미궁입니다. 여기에는 온갖 위험한 악마들, 괴물들, 기계들, 종족들이 돌아다닙니다. 뉴크로부존의 지상은 수많은 것들이 어울리는 난리법석 북새통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군사 정부는 도시 치안을 유지합니다.
뉴크로부존의 지하에는 그런 치안이 없죠. 그 덕분에 악마들과 괴물들과 기계들과 종족들은 마음대로 방대한 미궁을 누빌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모험가 일행이 이런 하수구에 들어가고,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괴물들이나 악마들과 싸우고, 귀중한 보물을 얻는다면? 그건 굉장히 짜릿한 모험 이야기가 될 겁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짜릿한 모험을 위한 설정들을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이걸 이용해 던전 탐험을 쓴다고 해도, 그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뉴크로부존에는 여러 마법사들과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위험한 물질이나 생명체나 기계를 연구합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한바탕 소동을 묘사합니다. 만약 마법사가 실험하는 괴물이나 과학자가 만든 살상 기계가 연구실을 탈출했다면? 그것들이 방대하고 복잡한 하수구로 도망쳤다면? 그걸 처치하고 회수하기 위해 마법사들과 과학자들은 모험가들을 소집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들은 군사 정부에 문의하고 병사들을 빌릴지 모르죠. 모험가들이나 병사들은 단단하게 무장하고, 무시무시한 미궁을 방황해야 합니다.
작은 절지류 괴물부터 거대한 악마까지, 수많은 적들은 그들을 맞이할 겁니다. 도시 판타지와 스팀펑크는 숱한 설정들을 뒤섞을 테고, 방대한 미궁 속에서 모험가들은 기괴한 난관들과 함정들을 헤쳐야 할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정말 두근거리고 짜릿한 모험을 펼칠 수 있겠죠. 사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어느 정도 이런 던전 탐험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건 주된 내용이 아니고, 비중 역시 크지 않습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던전 탐험을 슬쩍 보여주고 독자들을 위험한 미궁 속으로 안내하나, 던전 탐험은 절대 길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지하보다 지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요.
솔직히 저는 설정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으으, 왜 차이나 미에빌이 이렇게 멋진 설정으로 던전 탐험을 쓰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차이나 미에빌은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좋아하는 것 같고, 게임을 플레이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던전 탐험을 쓰고 싶었다면, 차이나 미에빌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겠죠. 문제는 던전 탐험이 진부한 이야기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던전 탐험을 워낙 널리 퍼뜨렸기 때문에 던전 탐험은 너무 진부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고 해도, 던전 탐험 이야기는 자칫 진부한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국내 판타지 작가들 역시 숱한 던전 탐험 소설들을 쓰고 쓰고 쓰고 계속 쓰는 중이겠죠.
이런 상황에서 <페르디도 정거장>이 던전 탐험에 도전했다면, 사람들은 이 소설이 시시하거나 진부하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저 또 다른 던전 탐험 소설이 나왔다고 여겼을지 몰라요. 게다가 던전 탐험 이야기는 노동 조합 파업, 비참한 밑바닥 사람들, 지저분한 작업장들, 군사 정부의 횡포, 종족들의 갈등을 쉽게 묘사하지 못하겠죠. 이런 것들은 하수구보다 지상 도시에 속한 상황들입니다. 그래서 차이나 미에빌은 던전 탐험을 주변으로 밀어냈겠죠.
물론 하수구 던전은 폭력적인 자본주의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거대 공장들이 산업 폐기물들을 버린다면, 그것들은 하수구로 흘러들어갈 겁니다. 기업들이 쓰레기들을 버린다면, 그것들 역시 하수구로 흘러가겠죠. 회사 연구소가 위험한 괴물을 만든다면, 몸을 숨기기 위해 괴물은 하수구를 찾을지 모릅니다. 살기 위한 터전이 없기 때문에 해고 노동자들, 가난한 노숙자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희생자들은 하수구를 찾을지 모릅니다. 그런 모든 오염 물질들과 괴물들과 노숙자들은 하수구로 흘러들어가겠죠. 하수구가 밑바닥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사회 구조적으로, 하수구는 밑바닥입니다. 여기는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 곳이고 가장 어두운 곳입니다.
제국주의를 비판할 때,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국주의의 폭력이 가장 밑바닥으로 흘러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곳은 식민지이고, 식민지는 가장 약한 연결 고리가 됩니다. 그렇게 레닌은 식민지의 사회주의 혁명을 긍정했죠. 뉴크로부존 역시 그렇습니다. 산업 도시 뉴크로부존에서 그 곳은 하수구가 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런 밑바닥(하수구 던전)을 탐험한다면, 모험가 일행은 자본주의의 폭력을 목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를 온전하게 살피고 싶다면, <페르디도 기차역>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산업 도시를 무엇보다 중시해야 하겠죠.
그래서 하수구 던전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저는 던전 탐험이라는 소재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저는 산업 도시를 보여주는 것보다 던전 탐험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낍니다. 던전 탐험은 지속적으로 미지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던전 속에서 모험가들은 뭐가 닥쳐올지 알지 못합니다. 다음 복도에는 기괴한 살상 기계가 기다리는 중일지 모릅니다. 다음 방에는 치명적인 가시 함정이 도사릴지 모릅니다. 무심코 모퉁이를 돌 때, 모험가들은 통로를 방황하는 좀비 무리와 마주칠지 모릅니다. 이 거대하고 복잡한 암흑 속에서 모험가들은 무슨 위험이 닥칠지 알지 못해요. 미지와 미지와 미지와 미지. 지속적인 미지. 그건 던전 탐험이 자랑하는 매력이죠. 그걸 이야기할 수 있음에도,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일부러 그걸 살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으아,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