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킨> - 자유와 노예 사이의 참혹한 괴리 본문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갑갑한 소설입니다. 네, 아주 갑갑하죠. 배경은 19세기 미국 남부 농장이고, 당연히 노예들의 참혹하고 끔찍한 삶이 과감없이 드러납니다. 아, 물론 이 세상에 노예가 나오는 창작물은 많고 많습니다. <킨>은 그런 수많은 소설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아마 이것보다 훨씬 슬프고 처절한 소설이나 드라마가 넘쳐날 겁니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과 달리 <킨>은 시간 여행물,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임 슬립입니다.
주인공은 사실 19세기 사람이 아니라 20세기 사람입니다. 1960년대의 흑인 여자입니다. 아직 인종 차별이 극심하게 남아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흑인이 (공식적으로) 노예처럼 취급을 받지 않았죠. 적어도 (공식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피부색은 차별 대상이 아닙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이런 개념에 익숙한 현대인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난데없이 시간을 거스르고 과거에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하필 주인공이 떨어진 장소는 1810년대 미국 남부 농장입니다. 백인 농장주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흑인 노예를 감시하는 중이었죠.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 경악합니다. 자신이 시간을 거스르고 과거로 여행했다는 사실도 문제지만, 하필 그 장소가 19세기 미국 농장이라는 점은 더욱 문제입니다. 이 상황에서 주인공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1960년대의 평등 개념도 중요하지 않고, 피부색은 차별 대상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흑인이고, 아무것도 흑인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현실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주인공의 속내는 20세기지만, 주인공의 외부는 19세기입니다. 그 차이를 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인공은 20세기 사람처럼 생각하지만, 19세기 사람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아니, 그냥 19세기 사람이 아니죠. 대농장의 흑인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다. 당연히 온갖 굴욕과 폭행, 수탈은 기본입니다. 노예의 삶을 다룬다면, 그런 것들은 아주 자연스러운 요소겠죠. 어떤 독자라도 이 책을 읽는 순간, 주인공의 앞길이 훤히 보일 겁니다. 백인 주인에게 채찍으로 죽어라 두들겨 맞는 그 암당한 상황이 눈에 보일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인공은 그런 지경에 처하고 죽도록 두들겨 맞습니다. 독자는 그걸 압니다. 인류는 그런 역사를 거쳤으니까요.
이 소설은 무섭습니다. 브람 스토커의 괴기스러움은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 무섭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어떻게 공포를 표현할 수 있는지 꿰뚫는 작가입니다. 이 소설이 무서운 이유는 노예들의 삶이 비참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심하기 때문입니다. 노예 제도는 (표면상) 사라졌습니다. 미국에서 흑인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독자도 알고, 주인공도 압니다. 그게 아주 당연한 사실이고, 우리 머리 속에 태어나면서부터 자리잡은 것처럼 틀어박힌 사상이죠.
하지만 그런 당연하고 당연하고 또 당연한 사상은 19세기 미국 농장에서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독자와 주인공은 그저 어떤 일이 닥칠지 예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상황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잘못된 상황에서 수탈을 당하고 폭행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은 남북 전쟁이나 노예 해방이나 평등권을 줄줄이 읊을 수 있지만, 그건 아무 도움이 안 되고 현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20세기 흑인 여자는 그냥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이 소설의 공포는 바로 여기에서 튀어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입니다. 20세기의 평등과 19세기의 노예 제도 사이에서 괴리가 튀어나옵니다. 그 괴리가 폭력적인 현실과 맞닥뜨리는 순간, 백인 농장주가 주인공의 등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순간, 그 괴리는 공포로 승화합니다. 이게 바로 피부를 찢고 생생한 고통을 안겨주는 현실입니다. 주인공은 그냥 죽도록 두들겨 맞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머릿속으로 현대의 인권이나 평등을 떠올려봤자 하등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 시대가 존재한다는 것에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도 없습니다.
그건 너무 먼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언젠가 노예 제도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고 그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오히려 그런 괴리 때문에 현실의 비참함만 더욱 드러날 뿐이죠. 아무리 주인공이 20세기 사람이라도 19세기의 참혹한 현실을 혼자 바꿀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가끔 현대인의 우월성을 과대 평가하지만, 카를 마르크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 구조 속에서 결정됩니다. 19세기 미국 농장에서 주인공은 그저 흑인 여자 노예로 결정될 뿐이고, 그 이상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그래도 주인공은 20세기 사람이고, 어딘가 튀는 구석이 있습니다. 일단 시간을 여행했고, (그 당시 흑인치고) 굉장히 똑똑하고 결단성이 있고 딱 부러집니다. 책도 읽을 수 있고 글도 쓸 줄 알고 말도 조리 있게 잘 합니다. 다들 어떻게 주인공이 그리 똑똑할 수 있는지 신기하게 여깁니다. 시간 여행물의 특징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조이고, 이 소설에서 이런 대조는 대부분 공포로 승화합니다. 하지만 과거를 뒤돌아보며 역사적 발전을 깨닫는 재미가 아예 없지 않습니다.
사실 주인공은 노예치고 좋은 대접을 받습니다. 백인의 목숨을 구해줬고 머리가 좋고 뭔지 모를 기운을 풍기기 때문입니다. 농장 사람들은 주인공이 시간을 거스른다는 점을 잘 모르지만, 주인공이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압니다. 덕분에 주인공은 보통 노예가 누릴 수 없는 이득을 누리고 여러 가지를 시도합니다. 뭐, 주인공이 주변 노예들을 이끌고 혁명이라도 일으킨다면 속 시원하겠지만…. 그건 <헝거 게임> 같은 소설에나 어울릴 너무 안이하고 순진한 전개겠죠. 위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20세기 인간 혼자 그 꽉 짜인 사회 체계에 맞서겠어요. 아무리 똑똑해도 개인은 그저 개인일 뿐입니다.
기가 막힌 점은 소설 속의 남부 농장은 평범한 농장이라는 점입니다. 노예들은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듯하지만, 여기에도 웃음과 미소와 작은 행복이 있습니다. 인간미와 박애 정신도 있습니다. 여기는 지옥이 아닙니다. 흑인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백인 주인들도 결코 악마가 아닙니다. 그냥 인간입니다. 그냥 사회 체계를 따르는 인간일 뿐입니다. 백인 주인이 채찍을 휘두르고 흑인 노예를 죽도록 때리는 이유는 그 백인이 엄청나게 사악하거나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회 체계가 그렇게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흑인은 노예니까. 그게 당연한 상식이고 당연한 체계고 당연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흑인 노예를 이용해 작물을 수확하고, 그게 하등 이상하지 않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백인 농장주는 가끔 분별력이나 공정함을 보여줍니다. 비단 노예 제도만 그렇지 않을 겁니다. 어떤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을 착취할 때, 그 사람들도 그저 사회 체계를 따라갈 뿐일 겁니다. 따라서 상식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상식을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상식은 패러다임에 불과합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오직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일 겁니다.
노예 제도를 차치한다면, <킨>은 '애증'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소설입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또 다른 소설 <야생종>에서 안얀우와 도로의 관계처럼 주인공과 백인 농장주의 관계는 애정과 증오로 얽혔습니다. 주인공은 백인 농장주를 미워합니다.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아무리 그 농장주가 상식을 따른다고 해도 어쨌든 다른 사람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거나 고문하니까요. 하지만 주인공은 그 농장주의 목숨을 구해주고 묘한 애정을 느낍니다. 이성 간의 사랑은 아닙니다. 그보다 어떤 운명으로 얽힌, 구속적인 느낌이라고 할까요.
자신은 원하지 않았으나, 자꾸 그 존재와 얽히는…. 그래서 함부로 떨어질 수 없고, 함부로 미워할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자꾸 주인공을 괴롭히죠. 백인 농장주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한편 주인공을 구속하는 존재입니다. <야생종>은 초인 소설이고 <킨>은 시간 여행물이지만, 이런 관계는 양쪽 소설에서 비슷하게 등장하는 듯합니다. 아니, 비단 이들 소설만은 아니겠죠. 버틀러 자신이 그런 구속적인 관계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는 내내 '정말 SF답다'고 몇 번씩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이언스 픽션의 정수는 하드 SF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하드 SF 소설이야말로 SF 장르의 꽃이고 중심이고 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SF의 전반적인 미덕은 인식의 지평선일 겁니다. 다른 존재, 다른 세계, 다른 시간대를 이용해 인식의 지평선을 넓히고 고정 관념을 타파하는 것. 그것이 바로 SF의 미덕이라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사이언스 픽션은 돌연변이나 로봇, 외계 행성, 우주선 등으로 고정 관념을 부수려고 노력합니다.
<킨>에는 외계인이나 괴수 따위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 19세기의 참혹한 현실이 제공하는 '단절'은 고정 관념을 타파하기 충분하다고 봅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집니다. 솔직히 <킨>을 읽기 전에 <야생종>만큼 전율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단단히 착각한 셈입니다. 뭐가 더 좋은 소설인지 논하는 거야 시간 낭비일 테고, 두 소설 모두 전율이 넘칩니다. 책장을 덮어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군요.
안타까운 점은 이런 노예 제도가 여전히 유지된다는 점이죠. 노예 제도 자체는 사라졌을지 모르나, 노예와 착취는 남아있습니다. 성 노예가 아주 대표적인 사례죠. 자, 여기 어떤 가난한 여자가 있습니다. 재개발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났거나 홍수 때문에 집을 잃었거나 대기업들 때문에 직장을 잃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자본주의 사회는 이 여자를 가난 속으로 몰았습니다. 이 여자는 먹고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고, 그러던 중 포주에게 딱 걸렸습니다. 신체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무조건 섹스만 해야 하는 성 노예가 되었죠. 이런 여자들이 아직 많다고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대기업들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원주민이나 소수 민족의 구역에 함부로 들어가지만, 그들은 대기업에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합니다. 대기업들이 고향 땅을 마구잡이로 파헤쳐도 소수 민족은 그저 바라만 봐야 합니다.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해요. 솔직히 이게 노예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내전 지역의 소년병이나 매춘 소녀들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죠. 아무리 입으로 인권과 자유를 외치면 뭐 하나요. 이런 꼴을 보면, 블라드미르 레닌이 왕년에 지적한 바가 맞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발전하고, 끊임없이 수탈과 착취를 확장합니다.
<킨>의 책 뒷면에는 박상준님이 해설을 달았습니다. 그 해설에서 박상준님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삶을 잠깐 언급하시는군요. 아마 버틀러는 흑인 여자로서 너무 굴곡이 많았던 삶을 보냈겠죠. 그저 천문학 책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없었겠죠. 하드 SF 장르는 SF 장르의 꽃이지만, <킨> 같은 소설이 없었다면 SF 장르는 정말 삭막했을 것 같습니다. 아서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작가들도 좋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SF 장르에서 밑바닥 사람들이나 멸종 위기의 동물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런 소설이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