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콩: 해골섬>의 메이슨 위버와 <백경>의 스타벅 본문
[메이슨 위버는 이성, 저항, 자연을 상징합니다. 메이슨 위버와 스타벅은 비슷한 역할인지 모릅니다.]
영화 <콩: 해골섬>에서 사무엘 잭슨은 미국 군대 장교 프레스톤 패커드를 연기합니다. 프레스톤 패커드를 연기하기 위해 사무엘 잭슨은 자신이 소설 <백경>과 에이허브 선장을 참고했다고 말합니다. 프레스톤 패커드와 에이허브 선장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거대한 야수를 증오합니다. 프레스톤 패커드는 킹콩을 증오하고,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 딕을 증오합니다. 양쪽 모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킹콩과 모비 딕을 처지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이건 쉽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비 딕을 처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모비 딕은 여러 포경선들을 내쫓았습니다.
모비 딕은 전설적인 거대 바다 야수입니다. 킹콩 역시 신성한 자연의 힘입니다. 킹콩은 무장 헬리콥터들을 가볍게 날려버립니다. 병사들이 자동 화기들을 쏜다고 해도, 이건 킹콩을 막지 못합니다. 모비 딕과 킹콩을 처치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프레스톤 패커드와 에이허브 선장을 말립니다. 프레스톤과 에이허브는 듣지 않습니다. 거대 야수를 처치하기 위해, 복수를 위해 두 지도자는 사람들을 위험으로 몰고 갑니다. 이런 갈등은 대립으로 이어집니다. 소설 <백경>에서 에이허브 선장과 1등 항해사 스타벅은 대립합니다. 스타벅은 "선장, 복수는 미친 짓입니다. 모비 딕은 그저 야생 동물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스타벅은 옳습니다. 아무리 모비 딕이 포경선들을 침몰시킨다고 해도, 모비 딕은 야생 동물입니다. 모비 딕은 계획적으로 에이허브 선장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향유 고래 모비 딕에게는 이성이 없습니다. 아무리 모비 딕이 전설적인 거대 야수라고 해도, 모비 딕이 숱한 포경선들을 침몰시켰다고 해도, 향유 고래 모비 딕은 그저 야생 동물에 불과합니다. 만약 인간이 돌부리에 걸렸다고 해도, 인간이 돌부리에게 복수할 수 있나요? 돌부리에게는 이성이 없습니다. 돌부리는 계획적으로 인간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돌부리에게 화낸다면, 이건 어리석은 행위일 겁니다. 뭐,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고, 그래서 인간은 돌부리에게 화낼 수 있습니다.
돌부리는 별로 커다란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모비 딕 사냥은 다릅니다. 포경선이 거대 바다 야수를 사냥하기 원한다면, 모비 딕은 포경선을 공격할 테고, 포경선 선원들은 물귀신들이 될 겁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돌부리에게 화풀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방법은 분노를 낮출지 모릅니다. 반면, 모비 딕은 돌부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인간이 욕설들을 퍼붓는다고 해도, 돌부리는 반격하지 않습니다. 돌부리와 달리, 모비 딕은 반격합니다. 모비 딕은 정말 처절하게 반격할 겁니다. 다른 포경선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이허브 선장이 간신히 살아남은 것처럼, 포경선 피쿼드는 비참한 운명에 부딪힐 겁니다. 스타벅은 완강하게 에이허브 선장에게 반대합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에이허브가 광기를 상징하고 스타벅이 이성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에이허브는 맹목적으로 모비 딕을 처치하기 원합니다. 스타벅은 조심스럽게 인간이 바다 야수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언제나 스타벅은 인간이 고래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타벅은 평화주의자가 아닙니다. 스타벅은 그저 고래들이 강력하다고 인정할 뿐입니다. 고래 사냥은 위험한 과정이고, 포경선 선원들이 너무 적극적으로 고래들에게 다가간다면, 선원들은 커다란 피해를 입을지 모릅니다. 스타벅은 평화주의자가 아니나, 스타벅은 이런 피해를 경계합니다.
그래서 2등 항해사 스텁은 포경 업계 사람들 중에서 스타벅이 가장 조심스럽다고 말합니다. 스타벅이 가장 조심스럽기 때문에, 스타벅은 이성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스타벅이 이성을 상징하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스타벅은 신중합니다. 스타벅과 달리, 에이허브는 맹목적입니다. 광신과 이성은 격렬하게 대립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성은 광기에게 굴복합니다. 스타벅은 에이허브에게 굴복합니다. 어쩌면 소설 <백경>에서 이건 가장 슬픈 장면인지 모릅니다. 스타벅이 에이허브를 막았다면, 스타벅이 선상 반란을 일으켰다면, 포경선 피쿼드 선원들은 목숨들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스타벅이 지식인을 상징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포경선 피쿼드가 인류 사회라면, 에이허브는 지도자입니다. 에이허브는 지배 계급입니다. 다른 선원들은 민중 계급입니다. 그들은 지배 계급에게 충성합니다. 스타벅은 지식인입니다. 지식인은 지배 계급에게 가까우나, 지배 계급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지식인은 민중 계급에게 다가가고 민중 혁명을 설파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이 권력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지식인이 민중 혁명을 설파한다면, 민중 혁명은 무모한 지도자를 내쫓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겁쟁이들입니다.
지식인들은 혁명가가 되지 못하고 민중 계급에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지배 계급이 권력을 휘두르고 민중들을 고통에 빠뜨린다고 해도, 지식인은 그저 관망할 뿐입니다. 소설 <백경>에서 스타벅은 이런 지식인과 비슷합니다. 스타벅은 선상 반란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스타벅이 에이허브에게 대항하기 원했다면, 스타벅은 선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스타벅은 굴복합니다. 지식인이 지배 계급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것처럼, 스타벅은 굴복합니다. 아니, 스타벅이 선상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선상 반란은 실패하고, 에이허브는 스타벅을 잔인하게 처벌했을지 모릅니다.
지배 계급은 저항들을 악랄하게 탄압했고, 많은 혁명가들은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스타벅이 선상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많은 혁명가들이 목숨들을 잃은 것처럼, 스타벅은 실패한 혁명가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소설 <백경>은 민중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으나, 독자들은 민중 혁명과 <백경>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교가 옳은가요? 소설 <백경>이 민중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음에도, 독자가 소설과 민중 혁명을 비교할 수 있나요? 분명히 <백경>은 민중 혁명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백경>은 <레 미제라블>이 아닙니다. 포경선 피쿼드에는 붉은 깃발이 없고 급진적인 혁명가가 없습니다.
스타벅이 선원들을 선동한다고 해도, 선원들은 붉은 깃발을 휘두르지 않을 테고 "혁명 만세!"를 외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이런 해석이 과잉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하지만 포경선 피쿼드에는 수직적인 계급 구조와 갈등 관계가 있습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포경선 피쿼드가 국가를 상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포경선 피쿼드가 국가가 된다면, 여기에 붉은 깃발이 없다고 해도, 독자들은 국가 정부와 계급 투쟁과 억압과 해방과 혁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해석이 옳은가요? 문학 평론가들이 피쿼드가 국가라고 해석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민중 혁명을 덧붙일 수 있나요?
둘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영화 <콩: 해골섬>에서 프레스톤 패커드와 에이허브 선장은 아주 비슷합니다. 만약 <백경>이 민중 혁명을 비유할 수 있다면, 영화 <콩: 해골섬> 역시 그럴 수 있나요? 영화 <콩: 해골섬>에서 프레스톤 패커드가 에이허브 선장이고 킹콩이 모비 딕이라면, 누가 스타벅인가요? 어쩌면 메이슨 위버는 스타벅과 가장 비슷할지 모릅니다. 메이슨 위버와 프레스톤 패커드가 가장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프레스톤 패커드는 군대 장교입니다. 군대 장교로서 프레스톤은 아주 호전적입니다. 메이슨 위버는 민간인입니다. 사실 <콩: 해골섬>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은 민간인보다 군대 소속입니다.
제임스 콘라드와 행크 말로우는 프레스톤 패커드에게 반대하고 킹콩을 변호하나, 콘라드와 말로우 모두 군대 소속이거나 군대 출신입니다. 반면, 메이슨 위버는 사진 기자입니다. 프레스톤은 호전적인 장교이나, 메이슨 위버는 반전 운동가입니다. 여러 등장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메이슨 위버는 직접 킹콩과 접촉합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이 킹콩을 변호한다고 해도, 오직 메이슨 위버만 '자연의 힘'과 제대로 접촉합니다. 프레스톤 패커드는 (호전적인) 남자이고, 메이슨 위버는 (평화로운) 여자입니다. 미국 군대는 가부장적인 조직이고, 성별은 중요한 기준일 겁니다. 여자와 자연 역시 중요한 조합입니다.
영화 <콩: 해골섬>에서 킹콩은 수컷입니다. 하지만 호전적인 남자 장교는 킹콩을 처치하기 원합니다. 반전 운동가 여자는 킹콩과 접촉합니다. 킹콩은 단순한 수컷 야수보다 '자연의 힘'에 가깝습니다. 다른 <킹콩> 영화들과 달리, <콩: 해골섬>에서 킹콩 성별보다 신성한 자연은 훨씬 중요한 요소입니다. 비단 킹콩만 아니라 전작 <고지라> 역시 고지라가 자연의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에서 고지라는 인간과 직접 만나지 않으나, 영화 <콩: 해골섬>에서 킹콩은 직접 메이슨 위버와 접촉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와 자연은 중요한 연결 고리입니다.
하지만 조던 보트로버츠 감독이 이런 연결 고리를 집어넣기 원했나요? 브리 라슨이 메이슨 위버를 연기하는 동안, 브리 라슨이 이런 연결 고리를 인식했나요? 영화 속에서 메이슨 위버가 킹콩을 만날 때, 관객들은 이런 것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피부 색깔 역시 기준이 될지 모릅니다. 프레스톤은 흑인이고, 위버는 백인입니다. 하지만 피부 색깔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피부 색깔 때문에 백인과 흑인이 대립한다면, 백인은 흑인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을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 <콩: 해골섬>에서 프레스톤은 호전적인 남자 장교이고, 메이슨 위버는 반전 운동가 여자입니다.
이런 대립 구도와 피부 색깔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노예 제도 역사 때문에, 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 <킨>을 쓴 것처럼, 호전적인 백인 남자와 피지배 흑인 여자는 훨씬 일반적인(지배적인) 관계입니다. 만약 프레스톤이 백인이고 메이슨 위버가 흑인이라면, 영화 <콩: 해골섬>은 인종 차별 문제를 집어넣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거대 야수를 향하는 광기와 복수입니다. 여기에는 인종 차별 문제를 말하기 위한 여유가 없거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프레스톤이 흑인이고 위버가 백인이라고 해도, 피부 색깔은 중요한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프레스톤과 메이슨 위버에게는 여러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관객이 위버와 스타벅을 비교할 수 있나요? 영화 <콩: 해골섬>에서 위버가 스타벅이 되나요? 대답은 다소 모호합니다. 소설 <백경>과 달리, 영화 <콩: 해골섬>에서 위버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프레스톤과 위버는 대립하나, 이런 대립은 핵심 갈등이 아닙니다. <콩: 해골섬>은 등장인물들 갈등 관계를 제대로 살리지 않습니다. <콩: 해골섬>에서 중요한 것은 갈등 관계들보다 거대 야수들입니다. 만약 메이슨 위버가 본격적으로 프레스톤 패커드와 대립한다면, 이런 갈등 관계들은 많은 분량을 차지해야 합니다.
갈등 관계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면, 킹콩과 스컬크롤러들과 다른 괴수들 분량은 줄어들 겁니다. 브리 라슨은 영화 <콩: 해골섬>에 많은 관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관점이 바뀐다면, 주장 역시 바뀔 수 있습니다. 영화는 프레스톤 패커드가 부정적이라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프레스톤 패커드는 자신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수구 꼴통 정치인들이 꽥꽥거리는 것처럼, 프레스톤 패커드는 자신이 옳다고 꽥꽥거립니다. 광신은 현실을 왜곡하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군대 헬리콥터들은 해골섬을 폭격했으나, 프레스톤에게 이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를 지웁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가해자라고 왜곡합니다.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지 수탈을 비판했으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들어처먹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온갖 궤변들을 이용해 식민지 수탈을 미화했고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얄팍한 진보 지식인들은 식민지 수탈을 미화합니다. 강신준 교수 같은 진보 지식인들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미화합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프레스톤 역시 왜곡과 망상을 떠듭니다. 메이슨 위버가 이런 왜곡 및 망상과 대립한다면, 영화는 훨씬 길다란 논쟁을 풀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콩: 해골섬>은 메이슨 위버를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콩: 해골섬>을 <백경>과 비교한다면, 이건 흥미로운 비교가 될지 모르나, <콩: 해골섬>에는 깊은 갈등 관계가 없습니다. 관객들은 메이슨 위버를 어느 정도 스타벅과 비교할 수 있으나, 더 이상 깊은 논의를 전개하기는 힘들 겁니다. 소설 <백경>에서 스타벅은 지배 계급과 민중 계급 사이에 있는 지식인을 가리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스타벅은 겁쟁이 지식인, 실패한 혁명가인지 모릅니다. 반면, 메이슨 위버가 스타벅과 비슷하다고 해도, 영화 <콩: 해골섬>에서 메이슨 위버는 지식인과 혁명가를 대변하지 못합니다.
메이슨 위버는 문자 그대로 운동권이나, <콩: 해골섬>은 억압과 혁명을 깊게 탐구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킹콩과 스컬크롤러들과 다른 거대 야수들에게 비중을 할애하기 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메이슨 위버는 인상적입니다. 다른 <킹콩> 영화들에서 젊은 백인 여자는 그저 '킹콩의 연인'에 불과했습니다. 킹콩 없이, 젊은 여자는 없습니다. 반면, 메이슨 위버에게는 반전 운동가라는 뚜렷한 역할이 있고, 위버가 킹콩의 연인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메이슨 위버는 프레스톤 패커드와 대립할 수 있습니다.
사실 <콩: 해골섬>에서 메이슨 위버는 킹콩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이슨 위버는 탐사대와 함께 행동합니다. 영화 <콩: 해골섬>이 메이슨 위버를 훨씬 강조했다면, 관객들은 흥미롭게 <백경>의 스타벅과 메이슨 위버를 비교할 수 있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