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칼 세이건과 우주 대장정과 아서 클라크 본문
<칼 세이건의 말>은 말 그대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인터뷰 모음입니다. 이 책에서 칼 세이건의 여러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뻔하고 뻔한 SF 창작물을 비판하는 과학자로서의 세이건입니다. 왕년에 <미지와의 조우>를 보고, 제3종 근접 조우는 저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한마디 날렸군요. 이 양반은 영화 속 외계인들이 그저 짜리몽땅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세이건은 외계인이 인간과 다른, 뭔가 다른 생명체가 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미지와의 조우>보다 <2001 우주 대장정>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스탠리 큐브릭이 이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세이건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세이건은 외계인을 그저 피부색만 다른 인간이나 괴상망칙한 괴물로 만들지 말라고 조언했고, 이 영화에는 외계인이 아예 나오지 않죠. 그저 별의 관문과 별의 아이가 나타날 뿐이고, 검은 비석이 외계 문명의 존재를 암시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주 대장정>이 저런 영화가 된 까닭은 그저 칼 세이건의 공로만 아닐 겁니다. 사실 이 영화의 진정한 공로자는 아서 클라크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 <2001 우주 대장정>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말하기 힘들 겁니다. 아서 클라크와 스탠리 큐브릭이 함께 소설과 영화를 만들었으니까요. 제가 알기로 그렇습니다. 그 이전에 클라크가 단편 소설을 썼고, 이 소설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으나, 그래도 <우주 대장정>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하기 힘들 겁니다. 어쨌든 클라크는 피부색만 다른 인간이나 괴상망칙한 괴물을 외계인이라고 우기는 양반은 아니죠. <라마와의 랑데부>도 외계 문명이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여기에 뻔하고 뻔한 외계인 따위는 나오지 않습니다. <유년기의 끝>에는 외계인이 직접 나오지만, 오히려 그게 아주 중요한 복선이 됩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칼 세이건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어도 (아서 클라크 덕분에) <우주 대장정>은 세이건의 마음에 들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 인터뷰를 보면, 칼 세이건이 아서 클라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오지 않더군요. 음, 정말 별 생각이 없었으려나. 아니면 클라크를 잘 몰랐으려나. 세이건이 클라크와 이야기했다면, 그것도 재미있는 대담이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