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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지상의 여자들>과 가부장적인 언어의 물질성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지상의 여자들>과 가부장적인 언어의 물질성

OneTiger 2019. 4. 24. 08:57

붉은색과 푸른색 중에서 무엇이 훨씬 훌륭한가요?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어떤 강사는 묻습니다. 아이들은 붉은색과 푸른색에 우열이 없다고 말합니다. 붉은색과 푸른색은 그저 다를 뿐입니다. 다른 것보다 어떤 것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푸른색보다 붉은색은 낫지 않고, 붉은색보다 푸른색은 못나지 않습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아이들은 새로운 단어들을 배웁니다. 흔히 사람들은 부드러운 것을 연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드러움과 연약함은 동일어가 될 수 있으나, 부드러움과 강함은 대조적입니다.


강사는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부드러움이 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단어, 새로운 개념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새로운 개념을 머릿속에 집어넣습니다. 단어와 개념은 서로 이어집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왜 아이들이 단어와 개념을 새로 배우나요? 사회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소설 제목처럼, <지상의 여자들>에서 여자들은 지상에 남습니다. 남자들은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사회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 언어, 개념은 서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단어와 새로운 개념은 오직 소설 속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작가 후기에서 소설 <지상의 여자들>을 쓰는 동안, 박문영 작가는 '그녀'라는 대명사를 쓰지 않기 위해 자신이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SF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외계인들을 언급하나, 외계인들이 정말 존재하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계인들이 아닙니다. 외계인들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않을 겁니다. 외계인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외계인들보다 새로운 사회 분위기는 훨씬 중요할 겁니다. 소설 속에서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여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당장 판도를 뒤집지 않으나, 이 소설은 점차 사회가 바뀐다고 말합니다. 사실 박문영 작가 역시 남자들이 사라질 때 무슨 사회가 나타날지 확신하지 못할 겁니다. 21세기 남한은 아직 여자들의 공동체를 겪은 적이 없습니다. 미래 시대에 여자들의 공동체가 있다고 해도, 이건 미래이고, 아직 아무도 미래를 겪은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미래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박문영 작가가 SF 소설을 쓴다고 해도, 박문영 작가 역시 미래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박문영 작가는 가부장적인 사회가 문제라고 말할 수 있으나, 박문영 작가는 새로운 사회를 완벽하게 그리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박문영 작가는 사회 분위기가 바뀐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하고 문제를 고칠 수 있습니다. 문제를 고치기 위해 박문영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따라가지 않기 원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사회는 이미 여러 언어들을 물들였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순수하게 언어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언어는 파생합니다. 언어는 사회를 반영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공부한다면, 우리는 비단 언어만 아니라 언어가 파생하는 사회와 문화를 함께 공부해야 할 겁니다.


어떤 영어 학습 광고가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어는 "코트를 벗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영어는 "코트를 계속 입으세요."라고 말합니다. '코트를 벗지 마세요'와 '코트를 계속 입으세요'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문구는 비슷합니다. 만약 이렇게 영희가 철수에게 말한다면, 결국 철수는 코트를 벗지 않고 계속 입어야 합니다. 영희가 영어로 말하든 한국어로 말하든, 결국 철수는 코트를 벗지 않고 계속 입어야 합니다. 하지만 양쪽 문구가 비슷한 뜻이라고 해도, 한국어는 부정을 말하고 영어는 지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영어 학습 광고에서 광고 모델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인은 새롭게 사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익힐 때, 우리는 오직 단어나 문법만을 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고 방식을 익혀야 합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영어 관용어들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영어 관용어들에는 역사와 흐름과 과정이 있습니다. 만약 하늘에서 모스라가 날아갈 때, 영희가 "Hey, What's up?"이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철수가 대답해야 하나요? 이 문구는 하늘을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이렇게 영희가 물었을 때, 철수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모스라가 날아간다고 대답한다면, 영희는 꽤나 당황할 겁니다.


하늘에서 모스라가 날아간다고 해도, 영희는 철수가 모스라를 올려다봐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what's up?'은 그저 안부를 묻는 인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철수는 이걸 직역했고 자신이 하늘을 올려다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한국인이 영어를 익힐 때, 한국인이 그저 단어들과 문법들만 외운다면, 한국인은 크게 실수할 겁니다. 단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영어 단어에서 파운드는 무게 단위를 나타내고 동시에 화폐 단위를 나타냅니다. 왜 무게 단위가 화폐 단위를 나타내나요? 과거에 영국 사회가 금본위 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을 재는 무게 단위는 화폐 단위가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어에도 이런 단어는 있습니다. 격려의 의미로서 이른바 높으신 분들이 어떤 봉투를 준다면, 사람들은 그걸 '금일봉'이라고 부를 겁니다. 하지만 '금일봉'이라는 단어와 달리, 봉투 안에는 금이 있지 않습니다. 봉투 안에는 돈(화폐)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돈이 있는 봉투를 금이 있다고 부르나요? 과거에 한반도 사회 역시 화폐로서 금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금융이 '금융'인 이유는 금이 화폐(일반적인 등가물)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금융 기관들은 더 이상 금본위 제도를 따르지 않고 금태환 제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돈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돈을 금과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는 돈으로 금을 사야 합니다. 하지만 언어에는 역사와 흐름과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금일봉을 '금'일봉이라고 부르고 금융 기관을 '금융' 기관이라고 부릅니다. 사회 구조는 언어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사회 구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한 사회는 더 이상 금본위 제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1997년 IMF 사태나 2008년 금융 대란이 다시 터진다고 해도, 남한 시민들은 돈을 금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이른바 뱅크런이 터진다고 해도, 남한 시민들은 금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경제 현상에서 금은 중요한 수단이고, 여전히 우리는 금이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황금 만능주의는 그저 심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현상입니다.



자본주의 경제 현상이 언어에 영향을 미친다면, 가부장 문화 역시 그럴 겁니다. 작가 후기에서 박문영 작가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아빠라는 단어보다 엄마라는 단어를 먼저 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엄마야!" 이렇게 박문영 작가는 소리쳤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박문영 작가가 글을 쓸 때, 박문영 작가는 엄마와 아빠를 부모라고 적어야 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박문영 작가가 아빠보다 엄마를 먼저 찾는다고 해도, 글을 쓸 때, 박문영 작가는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써야 합니다. 만약 박문영 작가가 부모보다 '모부'라고 쓴다면, 독자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겁니다.


물론 박문영 작가는 '모부'라는 신조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강사가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을 가르치는 것처럼, SF 소설은 신조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언어가 사회에서 파생한다면, 새로운 사회가 나타날 때, 새로운 언어 역시 나타날 겁니다. 그래서 비록 시간이 너무 짧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의 여성적인 사회는 부모라는 단어를 없애고 모부라는 단어를 새롭게 만들지 모릅니다. 아니면 부모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보호자라는 단어는 널리 퍼질지 모릅니다.



SF 소설을 쓸 때, 이렇게 SF 작가는 언어의 물질성과 신조어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물론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SF 만화, SF 영화, SF 게임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화와 영화와 게임보다 소설은 훨씬 많이 단어들을 이용합니다. 소설은 글자들을 나열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은 글자들을 나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합니다. '아, 이번에 나는 정말 철수에게 고백할 거야.' 이렇게 영희가 생각할 때, 영희는 언어를 이용합니다. 물론 언어 없이 영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희가 철수의 잘 생긴 얼굴과 탄탄한 몸매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언어 없이 영희는 철수의 얼굴과 몸매를 생각할 겁니다.


영희가 언어로 사고하기 전에 영희는 철수의 몸매를 시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영희가 '정말 미치겠네. 왜 이렇게 철수가 잘 생겼지?'라고 언어로 사고한다고 해도, '잘 생기다'라는 언어는 철수의 잘 생긴 얼굴을 100%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합니다. '잘 생기다'라는 언어는 보편적입니다. 이건 철수의 고유한 특징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언어 없이 영희가 사고할 수 있고, 언어가 고유한 특징을 가리키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고할 때, 언어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 이번에 나는 정말 철수에게 고백할 거야.' 이건 언어입니다.



소설은 사고 방식, 의식, 심리, 철학을 늘어놓습니다. 소설은 언어를 이용해 이런 것들을 늘어놓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은 글자들입니다. 소설 <타이거! 타이거!>처럼, SF 소설이 타이포그래피를 화려하게 동원한다고 해도, 결국 <타이거! 타이거!> 역시 막대한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언어가 구질구질하고 낡고 닳아빠졌다고 해도, SF 소설은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만화, 영화, 게임보다 소설에게 언어의 물질성은 커다란 장벽일지 모릅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강사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가부장적인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기 원했습니다.


강사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그저 다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한 가지를 주의해야 할 겁니다. 강사가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을 가르칠 때, 강사는 상대적인 특징을 강조하기 원했습니다. 가부장적인 언어는 상대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강사는 여성적인 언어가 상대적인 특징을 존중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뜻이 아닐 겁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간주한다면, 우리는 계급 의식을 잃을 겁니다. 붉은색과 푸른색은 그저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붉은색과 푸른색이 그저 다를 뿐인 것처럼, 가부장 문화와 에코 페미니즘이 그저 다를 뿐인가요?



가부장 문화와 에코 페미니즘 사이에 그저 상대적인 차이만 있을 뿐인가요?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오직 상대적인 차이만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 오직 상대적인 차이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급 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소설 주인공은 여성적으로 자신이 고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남성적인 사고 방식과 여성적인 사고 방식이 그저 다를 뿐이라고 말할 겁니다. 어떤 것보다 어떤 것은 낫지 않습니다. 어떤 것과 어떤 것은 그저 다를 뿐입니다. 가부장 문화보다 에코 페미니즘은 낫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와 에코 페미니즘은 그저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지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상대적인 차이를 지지할 뿐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오직 상대적인 차이만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 방식은 억압과 차별과 오염을 타파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차이보다 계급 의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보다 에코 페미니즘은 낫습니다. 가부장 문화 같은 썩은 쓰레기 따위보다 에코 페미니즘은 훠어어어어어얼씨인 낫습니다. 우리가 관용을 인정한다고 해도, 계급 의식 위에서 우리는 관용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SF 소설이 가부장적인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날 때, SF 소설은 이걸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소설 <지상의 여자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지상의 여자들>은 언어의 물질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박문영 작가는 가부장적인 언어의 물질성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상의 여자들>은 우리가 언어의 물질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적어도 SF 소설은 시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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