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전체론 생태학과 생체 개척 우주선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전체론 생태학과 생체 개척 우주선

OneTiger 2020. 3. 27. 20:15

[이 장면처럼, 자연 생태계 모식도는 상호 작용을 고려합니다. 생태학은 상호 작용을 폭넓게 파악합니다.]

 

 

"우리가 헤어진 이후, 나는 사랑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전 전형적인 로맨스 장르 대사입니다. 만약 로맨스 장르에서 두 연인이 헤어진다면, 두 연인은 빈 자리를 강하게 느낄 겁니다. 로맨스 장르에서 두 연인은 애정을 순탄하게 나누지 못합니다. 여러 갈등들은 두 연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두 연인은 헤어집니다. 아무리 나중에 다시 두 연인이 만난다고 해도, 이별 기간 동안, 헤어짐은 빈 자리가 됩니다. 빈 자리는 커다란 그리움이 되고 깊은 공허를 드러냅니다. 공허 속에서 연인은 사랑을 절실하게 그리워합니다. 연인은 사랑으로 공허를 채우기 원하고, 헤어짐 때문에, 사랑은 강렬해집니다.

 

만약 나중에 다시 두 연인이 만난다면, 두 연인은 서로 힘껏 끌어안을 겁니다. "나는 너를 정말 원해. 내 곁에서 네가 떠났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정말 절실하게 느꼈어. 또 다시 나는 이런 외로움을 겪기 원하지 않아. 이제 나는 알아.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 로맨스 장르에서 이건 전형적인 재회 장면입니다. 로맨스 장르는 두 연인이 헤어지기 때문에 두 연인이 사랑을 훨씬 절실하게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헤어짐은 '없음', 무(無)입니다. 왜 헤어짐이 없음, 무인가요? 두 연인이 헤어진 이후, 두 연인은 빈 자리를 느낄 겁니다. 빈 자리는 공허를 드러냅니다. 공허는 없음, 무입니다.

 

 

이별은 빈 자리를 만들고, 빈 자리에서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빈 자리는 없음, 무가 됩니다. 연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헤어짐은 무(無)입니다. 반면, 재회는 '있음', 유(有)입니다. 두 연인이 만난 이후, 연인이 빈 자리를 채우기 때문에, 두 연인은 존재를 느낍니다. 두 연인이 빈 자리를 겪었기 때문에, 두 연인은 존재를 훨씬 강하게 느낍니다. 이건 있음, 유가 됩니다. 연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건 존재, 있음, 유(有)가 됩니다. 헤어짐, 없음, 무는 존재, 있음, 유를 강조합니다. 헤어짐, 없음, 무 때문에, 연인은 존재, 있음, 유를 절실하게 느낍니다. 로맨스 장르에서 이건 공식, 전형입니다.

 

로맨스 장르는 이별(無)을 제시하고 사랑(有)을 강조합니다. 많은 로맨스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이런 공식, 전형을 거칩니다. 두 연인은 헤어지고, 빈 자리(無)를 느끼고, 다시 만나고, 사랑(有)을 훨씬 절실하게 느낍니다. 사랑(有)을 훨씬 강조하기 위해 로맨스 장르는 빈 자리(無)를 제시합니다. 없음, 무가 나타날 때, 이건 있음, 유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없음, 무는 있음, 유를 강조합니다. 로맨스 장르는 없음, 무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맨스 장르는 타임슬립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전형적인 타임슬립 로맨스에서 시간 격차는 두 연인을 갈라놓고, 이건 없음, 무를 극대화합니다.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가 보여주는 것처럼, 타임슬립 로맨스는 시각 격차를 이용하고 두 연인을 떼어놓습니다. 두 연인이 시간을 돌이키지 못하기 때문에, 이건 훨씬 커다란 간극이 되고, 이건 훨씬 커다란 없음, 무, 빈 자리, 공허가 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를 관람하고 눈시울을 적실 겁니다. 훨씬 커다란 빈 자리가 아련한 사랑을 훨씬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없음은 있음을 강조합니다. 유(有)를 강조하기 위해 우리는 무(無)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비단 로맨스 장르만 아니라 시장 상인들 역시 이 공식을 압니다. 그들 역시 무를 제시합니다.

 

"얘들은 가라. 얘들은 가라. 자~, 골라. 골라. 이 시장에는 없는 것만 빼고, 전부 있어요. 자, 골라. 골라." 이건 전형적인 홍보 문구입니다. 시장에서 이렇게 상인들은 외칩니다. 시장 상인들은 아이들을 배제하고 나이 차별합니다. 아이들에게 화폐, 구매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장은 상품을 판매해야 하고, 아이들에게는 구매 능력이 없고, 시장은 아이들을 차별합니다. 상품 판매가 목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시장은 뭔가를 차별해야 합니다. 만약 시장이 시장 경제로 확장한다면, 차별은 훨씬 심각해질 겁니다. "얘들은 가라. 얘들은 가라." 이 문구는 얼마나 시장 경제가 차별적인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장 홍보 문구는 오직 차별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시장 홍보 문구는 없음을 이용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없는 것만 빼고, 전부 있어요. 자, 골라. 골라." 이 문구는 없는 것이 없고 전부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너무 이상한 표현입니다. 없는 것은 없습니다. 이건 당연한 명제입니다. 뭔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없음은 없음입니다. 존재와 무(無)는 반대이고, 이건 상식입니다. 시장 상인은 빈 자리를 덧붙입니다. 시장 상인은 시장이 모든 것을 구비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시장 상인은 없음을 덧붙입니다. 왜 시장 상인이 없음을 덧붙이나요? 없음, 무가 있음, 유를 훨씬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갖추었어요."와 "우리는 없는 것만 빼고 모든 것을 갖추었어요."는 다릅니다. 전자는 오직 있음만 표현하나, 후자는 없음을 이용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있음은 자신을 훨씬 부각합니다. 이렇게 무(無)가 유(有)를 강조하기 때문에, 시장 상인들은 오직 있음만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유를 강조하기 위해 무가 나타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SF 장르는 이것을 훨씬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SF 장르에서 가장 커다란 특징이 무엇인가요? 대답은 비(非)현실입니다. SF 장르는 비(非)현실을 이야기합니다. SF 장르에서 이건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무역선을 보여줍니다. 스팀펑크는 증기 기관 보행 로봇을 보여줍니다. 사이버펑크는 증강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주 탐사 소설은 우주 수경 재배를 보여줍니다. 현실에서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비슷한 것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SF 장르는 이것들을 훨씬 과장합니다. 현실에서 과학자들은 우주 수경 재배, 외계 거주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외계 행성 테라포밍을 논의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자들이 진지하게 논의한다고 해도, 아직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현실보다 비(非)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가장 중요한 구역은 바이오 돔입니다. 이름과 달리,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바이오 돔은 돔 형태가 아닐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인공 중력을 생성해야 하나, 돔 형태는 인공 중력을 쉽게 생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돔 형태가 인공 중력을 생성한다고 해도, 이건 거창한 비용을 낭비할 겁니다. 만약 생태 구역이 고리 형태라면, 고리 형태가 회전하는 동안, 회전력은 인공 중력을 생성할 테고, 중력은 생태 구역에 작용할 겁니다. 스탠포드 토러스 같은 우주 거주지가 고리 형태인 것처럼, 인공 중력을 위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고리 형태가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고리 형태가 정말 되어야 하나요? 고리 형태 우주선이 생태 구역을 품을 수 있나요? 고리 형태 우주선에서, 인공 중력 속에서 폐쇄 인공 생태계가 제대로 순환할까요? 인공 중력이 식물 뿌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게 식물 생장을 방해하지 않나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개척선(colony ship)입니다.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몇 백 년 동안, 개척선은 장거리 항해해야 합니다. 장거리 항해 동안, 우주선 승무원들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주선은 생태 구역을 갖춰야 합니다.

 

만약 냉동 수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먹고 살기 위해 장거리 개척 우주선은 생태 구역을 갖출 겁니다. 아무리 냉동 수면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만약 개척자들이 외계 거주지를 짓고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원한다면, 그들은 자연 생태계를 이용해야 합니다. 개척자들이 자연 생태계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개척 우주선은 생태 구역을 갖춰야 합니다. 만약 개척 우주선이 생태 구역을 갖춘다면, 개척 우주선이 이것을 훨씬 응용할 수 있지 않나요? 만약 생태 구역이 확장한다면, 장거리 개척 우주선은 생체 우주선이 될 겁니다. 만약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개조 식물들을 부착한다면?

 

 

[생체 우주선에서 나뭇잎들은 항성 에너지를 이용하고, 영양분을 생산하고, 이것을 동력으로 전환합니다.]

 

 

개조 식물들은 항성 에너지를 받고 이것을 영양분으로 전환합니다. 개척 우주선은 이 영양분들을 소비하고 동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몇 백 년 이상, 개척 우주선이 장거리 항해해야 하기 때문에, 만약 개척 우주선이 생체 우주선이라면, 식물이 광합성하고 영양분을 생산하는 것처럼, 생체 우주선은 항성 에너지를 받고 영양분을 동력으로 전환할지 모릅니다. 장거리 항해 동안, 생체 개척 우주선은 동력을 스스로 만들고 연료를 아낄 수 있습니다. 생태 구역과 개조 식물들은 상호 작용하고, 폐쇄적이고 자체적인 영양분 순환 고리를 구성하고, 생체 개척 우주선은 장거리 항해를 얼마든지 감당합니다.

 

이 발상은 기발합니다. 기계 개척 우주선에게 장거리 연료는 커다란 걸림돌인지 모르나, 자연 생태계에서 식물이 생산자 역할을 맡는 것처럼, 생체 우주선에서 개조 식물들은 동력 생산자가 됩니다. 만약 우주 사업 연구원들이 동력 문제를 고민한다면, 생체 우주선은 대답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체 개척 우주선이 동력을 정말 스스로 생산할 수 있나요? 미래 과학 기술이 이런 개조 식물들을 키울 수 있나요? 어떻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내부 생태계와 외부 개조 식물들이 상호 작용하나요? 만약 우주선 내부 생태계와 외부 개조 식물들이 상호 작용한다면, 더 이상 내부 생태계는 '내부'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정답이 무엇인가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생체 우주선이 되어야 하나요?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외부 개조 식물들을 부착해야 하나요? 정말 외부 개조 식물들이 항성 에너지를 받고, 영양분을 생산하고, 이것을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나요? 가혹한 우주에서 외부 개조 식물들이 생존할 수 있을까요? 아니, 만약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생체 우주선이 될 수 있다면, 왜 오직 장거리 우주선만 생체 우주선이 되어야 하나요? 만약 인공 위성이 개조 식물들을 부착한다면, 인공 위성이 동력을 스스로 생산하고 자체적으로 운항할 수 있지 않나요? 외계 탐사 로봇들 역시 생체 로봇이 될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먹이 그물망입니다. 자연 생태계는 뭔가를 먹입니다. 생체 우주선은 자체적인 생태계가 되고 우주선 승무원들과 우주선 엔진을 먹일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처럼, 생체 우주선은 우주선 승무원들과 우주선 엔진을 먹입니다. 만약 우리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한다면, 우리는 어머니 자연 개념을 생체 우주선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먹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여자를 육아에 억지로 밀어넣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역시 여자가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지랄지랄합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그래서 생체 개척 우주선을 고찰하기 위해 생태학 SF 덕후들은 가부장 제도, 자본주의를 반드시 비판해야 합니다. 만약 생태학 SF 덕질이 가부장 제도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생태학 SF 덕질은 생체 우주선을 제대로 고찰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태학 SF 덕질이 돌봄 노동 사회화를 외친다고 해도, 생태학 SF 덕질은 우주선 내부 생태계와 외부 식물들이 상호 작용하는지 장담하지 못하고 외부 개조 식물들이 가혹한 우주를 견딜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만약 외부 개조 식물들이 항성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면, 나뭇잎이 엄청나게 두껍고 거대해야 하나요? SF 팬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드 SF 작가들 역시 대답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장거리 개척 우주선에게 개조 식물들을 부착한 적이 없습니다. 현실에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없음'입니다. 이건 무(無)입니다. 비(非)현실은 없음, 무입니다. 반면, 현실은 있음, 무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자들은 SF 소설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현실 속의 열대 밀림에서 생태학자들은 식생들을 연구합니다. 아마존 밀림은 유, 있음, 현실이고, 생체 우주선은 무, 없음, 비현실입니다. SF 장르는 무, 없음, 비현실, 생체 우주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SF 장르를 비웃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 없음, 비현실, 생체 우주선을 비웃습니다. "현실에서 생체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아. 생체 우주선에서 개조 식물들이 정말 광합성하고 영양분을 동력으로 정말 전환할 수 있나? 얼마나 개조 나뭇잎이 두껍고 거대해야 하지? 심지어 하드 SF 작가들조차 대답하지 못해. 생체 우주선은 그저 공상에 불과해!"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장거리 생체 개척 우주선이 엉터리라고 비난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 없음, 비현실보다 유, 있음, 현실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이 무(無)를 강조하는 것처럼, 무는 유(有)를 강조합니다.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로맨스 장르가 이별을 제시하는 것처럼, 없음은 있음을 강조합니다. SF 장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없음이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비현실은 현실을 강조할 수 있고, 생체 우주선은 아마존 밀림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생태 구역을 품고 개조 식물들을 부착하는 것처럼, 지구 자연 환경에서 아마존 열대 밀림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SF 팬들은 생체 개척 우주선을 바라보고, "자체적인 우주 생태계? 이게 가능해? 어떻게 우주 생태계가 순환할 수 있지? 생태계가 무엇이지?"라고 묻고, 현실을 환기하고, 아마존 열대 밀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별 없이 로맨스 장르가 오직 사랑만 말한다면, 이건 사랑을 강조하지 못할 겁니다. 로맨스 장르에서 이별, 무, 없음, 빈 자리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처럼, 타임슬립 로맨스는 이별, 무, 없음, 빈 자리를 훨씬 강조하고, 그래서 타입슬립과 로맨스는 좋은 짝궁입니다. 로맨스 장르가 없음(이별)을 제시하고 있음(사랑)을 강조하는 것처럼, SF 장르는 없음(비현실)을 제시하고 있음(현실)을 강조합니다. 생체 우주선은 아마존 열대 밀림을 강조합니다. SF 장르에게 이건 고유한 특징입니다. SF 장르는 현실 도피적이지 않습니다. SF 장르는 아마존 밀림을 강조합니다.

 

판타지 팬과 고딕 호러 팬들은 판타지 장르와 고딕 호러 장르 역시 비현실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겁니다. 드워프, 마법사, 흡혈귀, 좀비는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드워프, 마법사, 흡혈귀, 좀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소설 <트와일라잇>을 읽고 훈남 흡혈귀가 존재한다고 상상할지 모르나, 애석하게도 현실에서 훈남 흡혈귀는 "너는 오직 나만을 위한 마약이야."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생체 개척 우주선처럼, 현실에서 드워프, 마법사, 흡혈귀, 좀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비현실입니다. 하지만 장거리 생체 우주선과 드워프, 마법사, 흡혈귀, 좀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서구 근대화입니다. 서구 근대화 이전에, 이미 전근대(前近代)적인 시대에서 드워프, 마법사, 흡혈귀, 좀비는 존재했습니다. 반면, 전근대적인 시대에서 우주선과 유전 공학 기술과 생물 다양성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홍수 설화에서 거대한 방주는 수많은 동물들을 태우고, 그래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거대한 방주는 비슷할 수 있으나, 거대한 방주는 과학자들이 아마존 열대 밀림을 관찰하고, 생태계 모식도를 그리고, 이것을 개척 우주선에 적용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과학자, 생태계 모식도, 개척 우주선은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서구 근대화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신화, 전설, 민담에서 드워프, 마법사, 흡혈귀, 좀비는 비롯했습니다. 서구 근대화에서 과학자, 생태계 모식도, 개척 우주선은 비롯했습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판타지 장르, 고딕 호러 장르와 다릅니다. SF 장르에서 과학자, 생태계 모식도, 개척 우주선 같은 서구 근대화는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SF 팬들이 SF 장르를 파악하는 동안, SF 팬들은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아니, 비록 SF 팬들이 이것을 묻기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서구 근대화 사회에서 SF 팬들은 살아가는 중입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서구 철학과 서구 과학은 세계를 장악했고, 여기에서 SF 팬들은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장거리 우주 항해는 신화보다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전근대적인 신화는 우주 항해를 계산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서구 근대화, 서구 철학, 서구 과학이 옳은가요? 서구 근대화가 세계를 장악했기 때문에, 만약 서구 철학과 서구 과학이 옳지 않다면, 이건 너무 심각한 문제일 겁니다. "난자는 커다란 비용을 요구하고, 반면, 정자는 적은 비용을 요구한다. 난자가 커다란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난자를 보호하기 위해 여자는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태생적으로 여자는 조신하다. 여자가 조신하기 때문에, 여자는 가정적이고 안정적이다. 정자가 적은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정자가 값싸기 때문에, 남자는 활발히 행동한다. 남자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모험심이 강하다." 이건 전형적인 사회 생물학입니다.

 

이런 진화 심리학, 사회 생물학은 자연 과학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전형적인 서구 과학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인 방법론이 옳은가요? 이 사회 생물학은 아주 작은 요소, 난자와 정자에 주목합니다. 사회 생물학은 난자와 정자를 이용하고 여자와 남자를 설명합니다. 사회 생물학은 전체를 파악하기보다 아주 작은 요소에 치중합니다. 반면, 생체 개척 우주선을 보세요. SF 작가가 생체 개척 우주선을 설정할 때, SF 작가는 작은 요소에 치중하지 못합니다. 생체 개척 우주선은 일종의 세계, 사회, 자연입니다. 일반적으로 장거리 개척 우주선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살아가고, 그들은 사회 구조를 이룹니다.

 

 

바이오 돔, 생태 구역에서 수많은 생태계 구성 요소들은 먹이 그물망을 형성합니다. 생태계, 에코시스템, 먹이 그물망은 문자 그대로 체계, 시스템, 그물망입니다. 체계는 작은 요소에 치중하기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합니다. 그물망은 작고 고립된 요소들보다 총체적인 연결 형태입니다. 생체 개척 우주선에서 사람들은 생태 구역을 이용하고 농사를 짓습니다. 생태 구역에서 생산자들과 분해자들은 영양분 순환 체계를 구성합니다. 생태 구역과 외부 개조 식물들은 상호 작용하고, 이건 또 다른 영양분 순환 체계가 됩니다. 생체 개척 우주선에서 세계, 사회, 자연은 거대하고 총체적인 먹이 그물망을 형성합니다.

 

우리가 어머니 자연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어머니 자연은 작고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테 피티 문양은 소용돌이입니다. 소용돌이처럼, 사방으로 생명 현상, 생명력이 퍼지기 때문입니다. 테 피티는 싱그러운 생명력을 사방으로 퍼뜨립니다. 애니메이션 도입부에서 탈라 할머니가 테 피티를 이야기했을 때, 테 피티는 생명력을 사방으로 퍼뜨리고, 이것들은 그물망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도입부에서 테 피티는 녹색 식물 줄기 그물망을 형성합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어머니 자연과 총체적인 시각을 의도했을까요? 어쩌면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어머니 자연이 작고 개별적인 부분에 매달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연은 웅장합니다. 자연이 웅장하기 때문에, 어머니 자연은 개별적이기보다 총체적입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는 그저 자본주의 상업 애니메이션에 불과하고,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테 피티를 대충 설정했는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모아나>에서 테 피티는 왜 어머니 자연이 총체적인지 보여줍니다. 테 피티가 총체적인 것처럼, 하드 SF 소설에서 생체 개척 우주선 역시 총체적입니다. SF 작가는 우주선 사회, 생태 구역, 외부 개조 식물들이 하나의 세계, 그물망을 형성한다고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총체적인 시각은 전체론입니다. 총체적인 시간이 전체를 파악하기 때문에, 이건 전체론입니다. 반면, 사회 생물학이 오직 난자와 정자에만 치중할 때, 이건 원자론이 됩니다. 더 이상 뭔가가 쪼개지지 않을 때, 이건 원자가 됩니다. 더 이상 원자는 쪼개지지 않습니다. 뭔가가 쪼개지고, 쪼개지고, 쪼개지고, 다시 쪼개지는 동안, 이것은 불변에 도달하고, 더 이상 이것은 쪼개지지 않습니다. 서구 철학, 서구 과학은 이것을 원자라고 부릅니다. 뭔가가 지속적으로 쪼개지고, 마침내 오직 불변하는 원자만 남기 때문에, 원자는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작습니다. 원자가 아주 작기 때문에, 원자는 개별적입니다.

 

 

사회 생물학은 작고 개별적입니다. 사회 생물학은 오직 난자와 정자만 중시합니다. 난자와 정자는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작습니다. 이건 원자론입니다. 반면, 생체 개척 우주선은 총체적입니다. 우주선 사회, 생태 구역, 외부 식물들이 하나의 세계, 그물망을 형성하기 때문에, SF 작가는 폭넓게 파악합니다. 이건 전체론입니다. 이렇게 원자론과 전체론은 다릅니다. 솔직히 원자론과 전체론은 대립하는지 모릅니다. 원자론이 작고 개별적인 것에 치중하고, 전체론이 폭넓게 파악하기 때문에, 원자론과 전체론은 대립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원자론과 전체론이 대립한다면, 생태학 SF 덕후가 누구를 편들어야 하나요?

 

당연히 생태학 SF 덕후는 전체론을 편들어야 할 겁니다. 생체 개척 우주선이 어머니 자연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번성, 재생산, 생명 현상은 자연 생태계를 뒷받침합니다. 문자 그대로 생체 우주선은 살아있는 우주선입니다. 기계 우주선과 달리, 생체 우주선은 생명 현상이고, 생명 현상에서 번성과 재생산은 핵심입니다. 생체 우주선이 생명 현상인 것처럼, 그래서 바이오 돔에서 우주선 승무원들이 먹고 사는 것처럼, 인간 역시 생명 현상입니다. 생명 현상으로서 인간에게도 번성, 재생산은 핵심입니다. '어머니' 자연이 보여주는 것처럼, 번성, 재생산은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이것, '육아'입니다.

 

 

육아는 아주 원초적인 노동입니다. 만약 아무도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후손들은 자라지 못할 테고, 200년 안에 인류 문명은 망할 겁니다. 육아는 아주 원초적인 노동이고, 육아는 댓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육아 노동이 댓가를 받는다면, 자본가 계급은 이걸 환영하지 않을 겁니다. 육아 노동이 댓가를 받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임금 노동보다 육아에 치중할지 모릅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육아에 치중한다면, 영리 기업들은 많은 이윤을 창출하지 못할 겁니다. 육아 노동자들이 댓가를 받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사회적인 재화들을 독차지하지 못하고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이런 상황을 막고 육아 노동을 착취해야 합니다. 여기에 좋은 방법이 있나요? 아하, 자본가 계급에게는 아주 좋은 핑계가 있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먹이기 때문에, 집에서 여자는 육아를 맡아야 한다. 여자에게 이건 의무이다. 이게 의무이기 때문에, 육아 노동은 댓가를 받지 못한다." 이건 아주 고전적인 가부장 편견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고전적인 가부장 편견은 잘 통합니다. 가부장 편견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육아 노동을 착취하고,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극대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자는 육아를 맡아야 합니다. 여자는 집, 가정에 속합니다. 여자는 가정적입니다.

 

 

여자, 육아, 가정은 이어지고, 이건 육아 노동 착취를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부장 편견(여자가 아기를 낳기 때문에 여자는 가정적이다)은 지배 관념이 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착해진다고 해도, 자본주의 작동 원리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성 차별 사회입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그래서 학교 경제학 교과서들이 이것을 설명하나요? 아니, 오히려 학교 교과서들은 성 차별을 은폐하고 지배 계급을 정당화합니다.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학교 교과서들은 학생들을 세뇌하고,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독재 사회입니다. 자랑스러운 반공 국가 헬조선 역시 포악한 독재 국가입니다.

 

하지만 편협한 사회 생물학은 자랑스러운 독재 국가 헬조선이 학생들을 세뇌한다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사회 생물학은 사회 구조를 파악하지 않습니다. 사회 생물학은 어떻게 자연 생태계 속에서 사람들이 먹고 사는지 관찰하지 않습니다. 이게 전체론이기 때문입니다. 원자론으로서 사회 생물학은 작고 개별적인 부분에 매달립니다. 반면, 생체 개척 우주선이 우주선 사회, 생태 구역, 외부 식물들을 폭넓게 파악하는 것처럼, 전체론은 자연 생태계와 인류 사회를 폭넓게 고찰합니다. 결국 생태학은 전체론입니다. 생태학 SF 덕후는 사회 생물학이 멍청한 헛소리라고 까야 합니다. 진정한 생태학 SF 덕후는 전체론을 편들어야 합니다.

 

 

[비록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여기에서 어머니 자연은 원자론보다 전체론입니다.]

 

 

하지만 서구 철학, 서구 과학은 전체론보다 원자론에 치중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오직 이윤 창출, 개별적인 부분, 원자에만 치중하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서구 근대화 역시 원자론으로 기울어집니다. 최근에 코로나 19 사태를 보세요. 이미 환경 전문가들은 세계화 자유 시장이 생태 재앙을 일으킨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지배 계급이 들어처먹었나요, 안 들어처먹었나요? 자본가 지배 계급은 귓등으로도 들어처먹지 않았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귓등으로도 들어처먹지 않았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위기라고 지랄지랄거리나, 코로나 19 사태가 정말 위기인가요?

 

만약 코로나 19 사태가 위기라면, 기후 변화 역시 위기일 겁니다. 하지만 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기후 변화가 위기라고 지랄지랄거리지 않나요? 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사업장을 폐쇄하고, 무역들을 줄이고, 석유 채굴을 멈추자고 말하지 않나요? 분명히 인류 사회는 코로나 19 확산을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들은? 만약 기후 변화와 전염병 사태가 합친다면? 만약 코로나 19 사태가 안정세에 접어든다면, 자본가 계급이 기후 변화 변곡점, 티핑 포인트에 관심을 기울일까요? 아니, 코로나 19 사태가 눈 앞의 위기이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그저 코로나 19 사태가 문제라고 지랄할 뿐입니다.

 

 

"세계화 때문에, 온갖 생태계, 미생물들, 바이러스들은 서로 뒤섞이고, 이런 것들은 생태계 교란을 유발합니다. 이곳저곳에서 다국적 기업들은 원자재들을 수입하고, 상품들을 가공하고, 다시 이것들을 수출합니다. 선박들, 열차들, 항공기들은 원자재들과 상품들을 싣고 세계 곳곳을 누빕니다. 문제는 선박들과 열차들과 항공기들이 돌아다니는 동안, 온갖 생물들과 바이러스들이 함께 무임승차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북아메리카 해안과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은 뒤섞이고, 중앙 아프리카 식물은 동남 아시아에 가고, 아라비아 해안에서 남아메리카 미생물들은 떠돌지 모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은 해외 동물들을 구입합니다."

 

"낯선 자연 환경에서 사람들은 해외 동물들을 풀어놓습니다. 이런 동물들은 토착 생명체들을 몰아내고 자연 생태계를 교란합니다. 이런 교란된 생태계는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주변 환경을 계속 교란합니다. 이건 대대적인 생물 다양성 감소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생물 다양성이 감소할 때, 치명적인 질병은 신나게 활개칠지 모릅니다. 문제는 오직 생태계 교란만이 아닙니다. 광우병 같은 질병이 퍼졌을 때, 대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는 비윤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살처분을 강행합니다. 기후 변화는 산호초들을 파괴하고 죽음의 바다를 만듭니다. 대기업들이 온실 가스들을 열심히 뿜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강대국들은 질병이 좋은 무기라고 생각하고 온갖 생물 병기들을 개발합니다. 이런 생물 병기들은 비단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엄청난 재앙이 될지 모릅니다. 대기업들은 닭들과 돼지들을 좁은 축사에서 키우고, 이런 축사에서 전염병은 깡패가 됩니다." 이 적갈색 문구들은 코로나 19 사태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이미 환경 전문가들은 이것들을 경고했습니다. 아무리 코로나 19 사태가 무사히 끝난다고 해도,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또 다른 생태 재앙은 터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계화 자본주의가 여기에 대비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외면하고 오직 이윤 창출에만 치중하는 것처럼, 아무리 코로나 19 사태가 무사히 끝난다고 해도, 세계화 자본주의는 또 다른 생태 재앙에 대비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너무 편협한 시각, 원자론입니다. 만약 환경 운동, 생태학이 자본주의 친화적이라면, 환경 운동과 생태학은 원자론에 빠질 테고, 이런 편협하고 피상적인 환경 운동과 원자론은 기후 변화와 생태 재앙에 절대 대처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환경 운동가들은 환경 오염이 세계화 자본주의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올바른 소비 윤리, 탐욕스러운 인류를 부르짖습니다. 이건 원자론입니다.

 

 

중국 대기 오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기 오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중국은 이른바 세계의 공장입니다. 메이드 인 차이나가 수많은 저가 상품들을 양산하고, 이것들이 세계화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중국은 세계의 공장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경제 현상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고, 세계화 자본주의가 가장 지배적이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중국 경제는 존재합니다. 총체적인 시점에서 대기 오염 문제는 중국 문제보다 세계화 자본주의 문제에 속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세계화 자본주의보다 중국을 욕합니다.

 

왜 사람들이 환경 오염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관념은 지배 계급 관념입니다. 자본가 지배 계급은 오직 눈 앞의 문제, 이윤 창출에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이건 원자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원자론은 지배적인 관념이 되고, 사람들 역시 원자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전체론을 고려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기 오염을 피상적으로 바라봅니다. 비단 기후 변화와 대기 오염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람들은 환경 오염을 피상적으로 바라봅니다. 서구 철학, 서구 과학처럼,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환경 운동은 편협한 원자론으로 기울어집니다.

 

 

하지만 원자론은 행성 자연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환경 오염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생태학 SF 덕후는 전체론을 편들어야 합니다. 전체론 시각에서 생태학 SF 덕후는 비단 코로나 19 사태만 아니라 자연 환경과 인류 사회를 폭넓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원 헬스는 고리를 형성할 겁니다. 생태학이 고리, 체계, 전체, 총체적인 것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태학 SF 덕후는 눈 앞의 문제, 이윤 창출보다 전반적인 그물망을 바라봐야 합니다. 무, 없음, 비현실로서 생체 개척 우주선은 전반적인 그물망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생체 개척 우주선은 매력적입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