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저녁의 구애>와 행성 생태계 멸종 본문
"아, 나는 아주 행복해. 나는 이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원해. 만약 지금 당장 시간이 멈춘다면…. 만약 이 세계가 멈춘다면…." 아니,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세계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자가 시간과 세계를 멈추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시간과 세계는 멈추지 않으나, 화자는 불가능한 것을 원합니다. 왜 화자가 불가능한 것을 원하나요? 행복을 부각하기 위해 화자는 불가능을 동원합니다. 화자는 자신이 아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건 너무 평범하고 밋밋하고 시시한 표현입니다. 평범하고 밋밋하고 시시한 표현은 아주 커다란 행복을 담지 못합니다.
아주 커다란 행복을 담기 위해 화자에게는 훨씬 커다란 표현, 커다란 그릇이 필요합니다. 불가능은 훨씬 커다란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아주 커다란 행복을 표현하기 위해 화자는 불가능(고정된 시간과 세계)을 동원합니다. 시간과 세계가 멈추지 않기 때문에, 이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건 화자가 아주 행복하다고 뜻합니다. 특히, 여기에서 불가능은 세계를 향해 승화합니다. 화자는 개인적인 행복과 고정된 세계를 연결합니다. 개인과 세계는 대립합니다. 개인은 개별적이고 작은 것입니다. 세계는 총체적이고 거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행복은 고정된 세계가 됩니다.
개인이 개별적이기 때문에, 이건 작습니다. 작은 것은 아주 커다란 행복을 담지 못합니다. 아주 커다란 행복에게 개인은 너무 작은 그릇입니다. 화자에게는 훨씬 커다란 그릇이 필요합니다. 세계는 훨씬 커다란 그릇입니다. 세계가 총체적이기 때문에, 세계는 거대합니다. 거대한 세계는 아주 커다란 행복을 담기 위한 커다란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오직 개인적인 행복만 언급하지 않습니다. 화자는 비단 개인적인 행복만 아니라 고정된 세계를 함께 표현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부각할 때, 커다란 규모는 가장 효율적입니다. 비단 행복만 아니라 절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아, 나는 너무 불행해. 나는 너무 절망적이야. 젠장, 이 빌어먹을 세상. 나는 모든 사람이 망하고 이 세계가 망하기 원해." 이 대사에서 화자는 자신이 너무 불행하고 절망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화자는 오직 개인적인 절망만 말하지 않습니다. 화자는 모든 사람이 망하고 세계가 망하기 원합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화자가 원한다고 해도, 이 세계는 망하지 않을 겁니다. 화자 역시 자신이 불가능을 원한다고 인식할 겁니다. 화자는 불가능을 인식하나, 화자는 이것을 원합니다. 절망을 부각하기 위해 화자는 불가능을 원합니다. 여기에서 불가능은 망한 세계를 향해 확장합니다.
화자는 너무 커다란 절망을 느낍니다. 개인은 너무 커다란 절망을 담지 못합니다. 개인이 작은 그릇이기 때문에, 작은 그릇은 너무 커다란 절망을 담지 못합니다. 너무 커다란 절망을 담기 위해 화자에게는 훨씬 커다란 그릇이 필요합니다. 세계는 훨씬 커다란 그릇입니다. 화자는 세계가 망하기 원합니다. 세계가 총체적이기 때문에, 세계는 거대하고, 거대한 세계는 너무 커다란 절망을 담을 수 있습니다. 개인이 작은 그릇이기 때문에, 만약 개인이 커다란 절망을 담는다면, 커다란 절망은 흘러넘칠 겁니다. 반면, 세계가 커다란 그릇이기 때문에, 커다란 그릇(세계)은 커다란 절망을 담습니다.
커다란 그릇(세계) 밖으로 커다란 절망은 흘러넘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커다란 절망을 담기 위해 화자는 세계를 운운합니다. 화자가 행복을 부각하든, 절망을 부각하든, 화자는 작은 그릇(개인)보다 커다란 그릇(세계)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입니다. 고정된 세계와 망한 세계는 불가능입니다. 아무리 화자가 원한다고 해도, 세계는 멈추지 않고 세계는 망하지 않습니다. 만약 세계가 정말 멈추거나 세계가 정말 망한다면, 이 상황은 행복과 절망을 훠어어얼씬 부각할 겁니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문학이 불가능한 세계를 표현한다면, 문학은 주제를 훨씬 부각할 겁니다.
화자가 고정된 세계와 망한 세계를 표현하는 것처럼, 만약 문학이 불가능한 세계를 표현한다면, 문학은 훨씬 커다란 그릇을 얻을 겁니다. 그래서 <저녁의 구애>는 지진을 언급하는지 모릅니다. 편혜영 작가는 <저녁의 구애>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주된 소재는 종말입니다. 주인공은 어떤 노인의 부고를 듣습니다. 노인은 죽음을 바라봅니다. 주인공은 노인의 장례식에 참가합니다. 주인공이 장례식에 참가하는 동안, 주인공은 죽음을 계속 생각합니다. 심지어 주인공은 유사 죽음을 겪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죽음은 개인적입니다. 개인적인 작은 죽음은 주제를 부각하지 못합니다.
주제(종말)를 부각하기 위해 문학에게는 훨씬 커다란 그릇이 필요합니다. 지진은 훨씬 커다란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지진은 대규모 재앙입니다. 대규모 재앙은 많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에 빠뜨립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고통에 빠지기 때문에, 지진은 훨씬 커다란 그릇입니다. 훨씬 커다란 그릇이 주제를 부각하기 때문에, <저녁의 구애>는 지진을 언급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해석이 옳다고 해도, <저녁의 구애>는 많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빠진다고 직접 묘사하지 않습니다. 이게 너무 거창하기 때문입니다. 지진은 불가능하지 않으나, 이건 너무 거창합니다.
지진이 너무 거창하기 때문에, 이건 불가능에 수렴합니다. 망한 세계가 불가능인 것처럼, 대규모 재앙은 불가능에 수렴합니다. 불가능과 주류 문학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류 문학은 불가능보다 현실적인 것, 리얼리티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꼰대 평론가들은 환상 문학보다 주류 문학이 우월하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주류 문학이 불가능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주류 문학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저녁의 구애>가 지진을 언급한다고 해도, 이 단편 소설은 진짜 지진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주류 문학은 과감하지 않고 거창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그저 통조림을 운운할 뿐입니다.
<저녁의 구애>는 진짜 지진을 묘사하기보다 그저 비상 식량을 운운할 뿐입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커다란 차량은 뒤집히고 불탑니다. 어쩌면 불타는 차량 속에서 운전자는 최후를 맞이했는지 모릅니다. 주인공은 불타는 차량을 바라봅니다. 장례식이 종말이고, 대규모 재앙이 종말인 것처럼, 불타는 차량은 종말입니다. 주인공이 종말을 계속 생각하고 종말을 계속 마주치기 때문에, 주인공은 다소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주인공은 다소 무례하거나 뜬금없습니다. 종말 앞에서 인간은 무례하거나 뜬금없습니다. 하지만 이 종말은 세계를 향해 확장하기보다 통조림이 됩니다.
<저녁의 구애>에서 종말은 대규모 재앙이 되기보다 그저 비상 식량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주류 문학은 주제를 부각하지 못합니다.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주류 문학은 불가능을 동원하기 원하나, 이건 불가능합니다. 주류 문학에게 불가능은 불가능입니다. 주류 문학이 현실적인 것, 리얼리티를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은 제약이 되고, 주류 문학은 이 제약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반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세계가 망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주류 문학은 대규모 재앙을 어설프게 가져오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대규모 재앙, 망한 세계를 표현합니다. 해수면 상승은 대규모 재앙입니다.
만약 기후 변화가 심각해지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바다가 해안 도시를 덮친다면, 이건 대규모 재앙일 겁니다. 주류 문학은 이것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아직 현실에서 바다가 해안 도시를 덮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저지르기 때문에, 언젠가 기후 변화는 엄청난 기후 재앙들을 유발할지 모릅니다. 비록 엄청난 기후 재앙들이 인류 문명을 덮친다고 해도, 세계화 자본주의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연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윤입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돈벌이에게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자본주의에게 이윤은 전부입니다.
이윤이 전부이기 때문에, 아무리 환경 운동가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 범죄자가 됩니다. 비단 온실 가스만 아니라 다른 환경 오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인류 문명이 기후 변화를 간신히 막는다고 해도, 기후 변화는 유일한 환경 오염이 아닙니다. 환경 오염은 오직 기후 변화만 포함하지 않습니다. 밀렵부터 온갖 산업 폐기물들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경 오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온갖 환경 오염들을 저지르고, 지구 생물권은 망할지 모릅니다. <저녁의 구애>와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지구 생물권이 정말 망한다고 묘사합니다.
게다가 인류 문명이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나요? 어떤 과학자들은 이미 기후 변화가 변곡점을 지났을지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만약 기후 변화가 변곡점을 지났다면,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 겁니다. 다음 세기가 오기 전에, 만년설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몇 세기 이후, 사람들은 만년설을 구경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만년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만년설은 녹는 중이고, 언젠가 사람들은 만년설을 구경하지 못할지 모르나, 아직 현실에서 기후 재앙은 본격적으로 심각해지지 않았습니다. 기후 변화가 심각해진 이후, 강력한 이상 태풍은 도시를 파괴할지 모릅니다.
만약 강력한 태풍이 도시를 파괴한다면, 많고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빠질 겁니다. 이건 진짜 종말입니다. 적어도 이건 무시무시한 종말에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저녁의 구애>는 강력한 이상 태풍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비단 <저녁의 구애>만 아니라 다른 주류 문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문학이 강력한 이상 태풍을 묘사하는 순간, 주류 문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주류 문학은 다릅니다. 주류 문학은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나, 사이언스 픽션은 비(非)현실 설정을 추구합니다. 장거리 우주선은 SF 소재입니다.
현실에서 장거리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유인 우주선은 외행성으로 항해하거나 태양계 밖으로 항해한 적이 없습니다. 상급 인공 지능은 SF 소재입니다. 현실에서 상급 인공 지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상급 인공 지능과 농담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우주인들이 술을 마실까? 스페이스 바.") 현실에서 생체 비행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유전 공학자들은 거대한 부유 생명체를 키우지 않고, 거대한 부유 생명체는 선체를 매달지 않습니다. 평행 세계는 SF 설정입니다. 어쩌면 다른 차원들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를 믿는지 모릅니다.
현실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지배적이나, 이 차원 이외에 다른 차원들에서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는지 모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 현실은 기후 재앙을 피하지 못하나, 다른 차원들에서 기후 변화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행 우주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장거리 우주선과 상급 인공 지능과 생체 비행선과 평행 우주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비현실 설정을 추구합니다. 주류 문학은 이것들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상급 인공 지능이 농담한다고 묘사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다른 차원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상급 인공 지능과 평행 우주처럼, 강력한 이상 태풍은 비현실 설정입니다. 주류 문학은 이것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주류 문학이 종말을 부각하기 원한다고 해도, 주류 문학은 일정한 한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세계를 떠들기보다 개인을 언급합니다. 개인은 작은 그릇이고, 세계는 커다란 그릇이나, 주류 문학은 커다란 그릇보다 작은 그릇을 떠듭니다. 만약 작은 그릇이 커다란 주제를 담는다면, 커다란 주제는 흘러넘칠 겁니다. 작은 그릇을 키우기 위해 주류 문학은 작은 그릇에게 미사여구들을 덧붙입니다. 주류 문학은 개인에게 온갖 환상들을 열~심히 덧붙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주류 문학이 온갖 환상들을 열심히 덧붙인다고 해도, 개인은 세계가 아닙니다. 결국 개인은 그저 개인에 불과합니다. 개인보다 세계는 훨씬 총체적이고 거대하나, 주류 문학은 총체적이고 거대한 것보다 작은 것에게 치중합니다. 이건 주류 문학이 세계를 묘사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류 문학은 세계를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행성급 환경 오염과 지구 생물권 멸종을 묘사하는 것처럼, 거대한 그릇(세계)은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과 잘 어울립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세계 변화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많고 많은 것들을 바꿨습니다. 가스등이 전기등으로 바뀌는 것처럼, 19세기 서구 근대화는 엄청난 변화를 거쳤습니다. 19세기 이전에, 인류는 전기를 본격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으나, 19세기 이후, 인류는 전기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기가 세계를 바꾼 것처럼, 앞으로 세계는 계속 바뀔 겁니다. 19세기 서구 사회에서 진화 이론은 대표적인 과학이었습니다. 진화 이론은 이제까지 세계가 계속 바뀌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제까지 세계가 바뀌었기 때문에, 앞으로 세계는 계속 바뀔 겁니다. 19세기 서구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계가 바뀐다고 깨달았습니다.
세계가 바뀌기 때문에, 자연은 바뀔 테고, 문명은 바뀔 겁니다. 자연과 문명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자연과 문명이 바뀔까요? 아직 미래 자연, 미래 문명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류 문학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대답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서구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계가 바뀐다고 깨달았고 미래 세계를 묘사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세계와 사이언스 픽션은 잘 어울립니다. 주류 문학과 세계는 어울릴 수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과 세계는 훨씬 잘 어울립니다. 세계가 커다랗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커다란 그릇입니다.
세계가 커다란 그릇이기 때문에,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커다란 그릇입니다. 꼰대 평론가들은 주류 문학이 대단하다고 자부하나, 주류 문학은 작은 그릇이고, 사이언스 픽션은 커다란 그릇입니다. 주류 문학이 개인에게 매달리는 동안, 사이언스 픽션은 세계를 바라봅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커다란 그릇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커다란 그릇은 가능성에 가깝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커다란 그릇을 외면하고 작은 그릇(개인)에게 매달릴지 모릅니다.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세계보다 개인에게 매달립니다. 하지만 세계 변화는 SF 미덕입니다.
비록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개인에게 매달린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세계 변화는 SF 미덕입니다. 만약 문학이 주제를 부각하기 원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좋은 선택일 겁니다. 이미 기후 변화가 변곡점을 지났을지 모르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은 인류 문명이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대규모 재앙에 대처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인류 문명이 피해를 완전히 막지 못한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사라진 이후, 인류 문명은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인류 문명에서 자본주의가 사라진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이것을 묘사할 수 있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희망을 직접 제시할 수 있습니다. 반면, 주류 문학은 미래 희망을 직접 제시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유토피아 세계를 묘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희망을 부각하기 위해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탁월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 게임 <이매진 어스> 스크린샷 출처: 孫悟空, Vi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