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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머나먼 생태계

자급자족한 외계 물고기는 얼마짜리인가

OneTiger 2018. 4. 17. 20:28

[이렇게 시장 경제 없는 외계 행성에서 자급자족 물고기가 얼마짜리가 될까요?]



SF 세상에는 생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특히,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우주 탐사는 쉽게 생존 이야기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나는 전설이다>나 <로드> 같은 소설들에서 소설 주인공은 혼자 먹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세상 사람들은 흡혈귀가 되었고, 소설 주인공은 혼자 안전 가옥을 세우고, 식량들과 무기들을 끌어모으고, 외로움을 견디고, 흡혈귀들을 막아야 합니다. <나는 전설이다>는 숱한 좀비 아포칼립스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런 생존 이야기는 전형적인 공식이 되었습니다.


<로드>는 핵 전쟁 아포칼립스처럼 보입니다. 인류 문명이 폭싹 멸망했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어디에도 기대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계속 길을 따라 떠돌고, 소년과 함께 먹거리들을 찾아야 합니다. 운이 좋다면, 소설 주인공은 변변하지 않은 먹거리들로 허기를 달랠 수 있으나, 행운은 언제나 미소를 짓지 않아요. 우주 탐사 역시 이런 생존 분투를 다룰 수 있어요. <태양 아래 걷다> 같은 소설은 왜 우주 탐사가 생존 이야기로 흘러가는지 보여줍니다. 앤디 위어가 쓴 <마션>은 전형적인 우주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비디오 게임들 역시 이런 소설들을 반영합니다. <쉘터드> 같은 게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이야기입니다. <서브노티카> 같은 게임은 우주 탐사 생존 이야기죠. 게임 플레이어가 암울하고 급박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나는 전설이다>나 <쉘터드> 같은 사례를 좋아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우주적이고 경이적인 풍경을 보기 원한다면, <마션>이나 <서브노티카>가 나쁘지 않겠죠. 생존 이야기가 반드시 SF 설정으로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류 문학 역시 얼마든지 생존 이야기를 펼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우주 탐사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할 수 있고, 따라서 생존 이야기 역시 훨씬 극단적으로 뻗을 수 있어요. 멸망한 세상과 외계 행성은 훨씬 이질적인 생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겠죠.


이런 생존 이야기의 특징들 중 하나는 자급자족입니다. 이미 고전적인 다니엘 디포가 널리 인기를 끈 것처럼 생존 이야기에서 자급자족은 빠지지 못하는 요소입니다. (이른바) 현대 문명인에게 이런 자급자족 생존은 꽤나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현대 문명을 장악했기 때문에 현대 문명인은 자급자족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해요. 현대 문명인은 가격이 수요-공급 곡선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곤 하죠. 하지만 <서브노티카>는 어떻게 가격을 계산할까요.



수요-공급 곡선은 시장을 상정합니다. 시장이 존재할 때, 구매자와 판매자가 서로 만날 수 있고, 양쪽은 균형 가격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브노티카>에는 시장이 없고 판매자가 없습니다. 다니엘 디포와 리처드 매드슨과 앤디 위어가 묘사하는 것처럼 생존자는 자급자족해야 합니다. 하지만 생존자가 재화를 생산했을 때, 그 재화는 분명히 가치를 지녔을 겁니다. 어떻게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있을까요? <서브노티카>에서 주인공 우주 승무원이 외계 물고기를 혼자 잡았다고 가정하죠. 이 외계 물고기는 얼마짜리일까요?


자본주의 경제학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학이 무조건 시장을 상정하기 때문입니다. 시장 경제 없는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장 경제가 존재하지 않아도, <서브노티카>처럼 인간은 얼마든지 노동하고 재화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재화의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 경제학은 대답하지 못해요. 자본주의 경제학은 그저 자본주의 만세를 외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죠. 자본주의 경제학은 인간 활동이라는 총체적인 측면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래서 현실을 왜곡합니다.



우리가 해답을 얻고 싶다면, 우리는 노동 가치 이론에 주목해야 합니다. 노동은 시간을 요구합니다. <서브노티카>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잠수정을 만들기 위해 생존자는 몇 시간이나 몇 달을 노동해야 할 겁니다. 외계 물고기나 잠수정은 그런 시간이 경과한 결과물입니다. 가격은 노동 시간이고, 가격은 노동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외계 물고기는 몇 시간짜리 재화가 될 테고, 잠수정은 몇 달짜리 재화가 되겠죠. 자본주의 경제학은 오직 자본주의만 떠받들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설명하지 못해요. 사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도 노동 가치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자급자족 경제와 시장 경제에서 노동 가치는 똑같이 중요합니다. 가격이 결정되는 이유는 수요-공급 곡선 때문이 아닙니다. 노동이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궤도 정거장에서 노동자들이 우주선을 만들 때, 1주일이 걸린다면, 그 우주선은 1주일짜리 재화가 될 겁니다. 수요-공급 곡선은 그저 그런 노동 가치를 보조할 뿐이죠.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학은 이런 노동 가치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학은 노동자 계급을 무시하곤 하죠. 그것과 연관이 있을지 모르죠.



안타깝게도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을 무조건 상정했고, 노동 가치보다 교환 가치를 중시했어요. 하지만 저는 아담 스미스를 너무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거대해지기 전에 아담 스미스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할 상황이 아니었죠. 하지만 아담 스미스는 인간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는 사실을 분석했고,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자본론>으로 이어집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 노동과 자연 환경을 훨씬 근본적으로 분석했고요. 아담 스미스는 숱한 자본주의 경제학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자본주의 만세를 외치는 경제학 교과서들은 노동 가치를 외면하고, 그래서 그런 교과서들은 사기입니다. 그걸 가르치는 학교 기관은 그저 세뇌 기관에 불과하고요. 그래서 헤게모니는 단단한 장벽이 되고, 인민들에게 사상 투쟁은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



※ 이런 생존 이야기를 읽을 때, 저는 생존자가 풍성하고 신비로운 자연 생태계를 탐험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우주 탐사가 더 풍성한 자연 생태계를 자랑하죠. <로드> 같은 소설에서 자연 환경은 처참하고 고독하고 흉흉합니다. 모든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쓸쓸한 자연 환경을 보여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그런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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