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인피니티 워>라는 허구와 계급 차별이라는 현실 본문

사회주의/우익 이데올로기 비판

<인피니티 워>라는 허구와 계급 차별이라는 현실

OneTiger 2018. 11. 27. 18:47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게임 플레이할 때, 흔히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다면, 소설, 영화, 게임은 꽤나 지루한 매체가 될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느끼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와 게임이 제시하는 위기와 갈등은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어요. 이게 정도를 지나친다면,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이 정말 살아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등장인물들이 정말 살아있다고 사람들이 간주한다면, 더 이상 소설과 영화와 게임은 허구가 되지 못하고 등장인물들은 실존 인물들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소설과 영화와 게임이 허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실존 인물처럼 등장인물들을 대합니다. 가령,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했을 때, 숱한 관객들은 스타 로드를 욕했습니다. 관객들은 영화에 너무 감정을 이입했고 스타 로드가 실존 인물이라고 간주했죠. 심지어 어떤 관객들은 크리스 프랫에게 욕설들을 퍼부었죠. 스타 로드는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크리스 프랫은 그저 허구적인 등장인물을 연기했을 뿐입니다. 분노한 관객들은 이런 사실을 잊었고, 스타 로드가 (허구가 아니라) 실존 인물이라고 간주했고, 크리스 프랫에게 욕설을 퍼부었어요.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을 겁니다. 주말 드라마가 악역 등장인물을 보여줄 때, 가끔 시청자들은 악역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를 욕합니다. 심지어 배우는 협박 전화를 받을지 모릅니다. 협박 전화를 건 시청자에게는 애석하게도, 악역 등장인물은 실존하지 않고, 배우는 그저 허구를 연기했을 뿐입니다. 어떤 독자들은 스티븐 킹이 미치광이 살인마일 거라고 두려워합니다. 스티븐 킹이 워낙 공포 소설들을 잘 쓰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스티븐 킹과 소설 속의 공포를 동일시합니다. 스티븐 킹은 그걸 칭찬이라고 느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이런 사고 방식은 옳지 않겠죠. 스티븐 킹은 그저 허구를 썼을 뿐입니다.


소설 속에서 아무리 흡혈귀가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킨다고 해도, 스티븐 킹은 악마가 아니고 흡혈귀가 아닙니다. 어떤 독자들은 탐정 소설 작가들이 아주 뛰어난 탐정이라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로렌스 블록을 멋진 경찰이라고 여길지 모르죠. 하지만 탐정 소설 작가는 탐정이 아닙니다. 탐정 소설 작가는 그저 멋진 탐정 이야기를 쓸 뿐입니다. 물론 소설과 영화와 게임이 실존 인물을 묘사한다면, 허구와 실재의 경계는 흐려질지 모릅니다. 영화 <벨벳 골드마인>이 개봉했을 때, 데이빗 보위는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벨벳 골드마인>이 글램 록을 다루고 데이빗 보위를 모함할지 몰랐기 때문이죠.



<벨벳 골드마인>을 관람할 때, (글램 록을 어느 정도 안다면) 관객들은 당연히 데이빗 보위를 연상할 겁니다. 관객들은 진짜 데이빗 보위와 영화 속의 등장인물을 서로 연결하겠죠. 그래서 데이빗 보위는 이 영화를 까칠하게 대했을 겁니다. 창작물이 실존 인물을 다룰 때, 허구와 실재는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스티븐 킹은 흡혈귀가 아니고, 로렌스 블록은 하드보일드 경찰이 아니고, 크리스 프랫은 스타 로드가 아닙니다. 시청자가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협박 전화를 건다고 해도, 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 협박 전화들이 늘어난다면, 드라마 작가는 시나리오를 고칠지 모릅니다. 협박 전화를 거는 시청자는 그런 변화에 만족할지 모르죠.


하지만 드라마 작가가 시나리오를 고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허구입니다. 결국 시청자는 허구에 분노하고 허구에 만족하겠죠. 사람들이 허구적인 등장인물들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부정적인 반응과 비슷할 겁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소설과 영화와 게임 속의 등장인물들을 일상으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허구적인 등장인물들을 이상(롤 모델)으로 삼고 그들이 되기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허구적인 등장인물을 이상으로 삼기 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허구와 실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죠.



어린 남자 아이들이 빨간 보자기를 두르고 옥상으로 올라갈 때,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웃기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어른들은 그런 행위가 유치하다고 간주할지 몰라요. 하지만 소설 <미저리>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른들 역시 얼마든지 그런 행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소설 <미저리>는 얼마나 사람들이 허구와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는지 보여줍니다. 남자 아이들이 빨간 보자기를 두르는 것처럼, 어떤 어른들은 허구적인 등장인물들을 사랑하거나 혐오할지 모릅니다. 소설 <미저리>가 극단적인 사례라고 해도, 협박 전화를 거는 시청자나 크리스 프랫을 욕하는 관객은 드문 사례가 아니겠죠.


게다가 이런 행동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들이 어떤 등장인물을 너무 욕한다면, 작가는 위축될지 모르고 마음대로 소설을 쓰지 못할지 모르죠. 독자가 문학적인 장치로서 등장인물을 비판한다면, 그건 정당한 비평이 될 겁니다. 그런 비평은 창작가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고 재생산을 도울 수 있겠죠. 하지만 독자가 등장인물이 실존 인물이라고 간주한다면, 오히려 그건 창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플레이할 때, 사람들은 거리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허구와 실재 사이에는 거리가 있어요.



물론 냉철하게 거리를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거리를 유지한다면, 강 건너편에서 불구경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창작물 속의 모든 사건을 덤덤하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창작물 속의 모든 사건이 무덤덤하다면, 구태여 사람들은 창작물을 찾지 않겠죠. 하지만 창작물을 만나는 순간, 사람들이 창작물 속에 빠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창작물들 속에서 사람들은 접속을 끊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종종 사이버펑크 소설들에서 어떤 등장인물들은 현실을 잊고 가상 세계에서 영원히 머무릅니다. 그들은 접속을 끊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죠.


그런 등장인물들처럼, 사람들은 창작물을 끊지 못할지 모릅니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재미있다고 해도, 관객들은 접속을 끊고 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관객들은 접속을 끊지 못했고 배우를 욕했죠. 그건 비평이 아닐 겁니다. 관객들이 허구적인 등장인물을 연기한 배우를 욕한다면, 그건 비평이 아니겠죠. 사람들은 창작물 속으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등장인물이 너무 사랑스럽거나 너무 얄미울 때, 사람들은 창작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현실과 허구를 뒤섞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열심히 허구를 공격하죠. 하지만 허구는 존재하지 않아요.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는 맬서스 트랩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맬서스 트랩을 없애기 위해 타노스는 우주 전쟁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맬서스 트랩은 허무맹랑한 망상입니다. 맬서스 트랩이 나왔을 때, 그건 계급 차별과 인종 차별을 위한 구실이었습니다. 이른바 인구 폭발 이론은 이런 맬서스 트랩을 계승하고 아직 인종 차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인구 폭발 이론은 백인들이 인구 폭발을 일으킬 거라고 말하지 않아요. 이건 인종 차별이죠. 따라서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는 허무맹랑한 망상을 떠들었습니다.


만약 <인피니티 워>를 관람한 이후, 관객들이 타노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맬서스 트랩과 인구 폭발을 걱정한다면, 그건 인종 차별로 이어지겠죠. 하지만 아무리 망상을 떠들었다고 해도, 문제는 <인피니티 워>가 아닙니다. <인피니티 워>는 창작물(픽션)이고 허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창작물이 반영하는 현실이겠죠. 현실이 인종 차별을 저지르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인종 차별이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그런 인종 차별을 부추기기 때문에, <인피니티 워>는 그저 그걸 반영했을 뿐입니다. 치타우리 군단의 배후에 타노스가 있는 것처럼, <인피니티 워>의 배후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있습니다.



올바른 비평은 배후를 비판해야 합니다. <인피니티 워>의 타노스는 허구이고 표면이죠. 허구와 표면을 비판한다고 해도, 그건 올바른 비평이 되지 못할 겁니다. 허구를 비판하는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런 비판은 근본적인 시각이 되지 못할 겁니다. 창작물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될 수 있고 현실을 들여다보는 창문이 될 수 있습니다. 창작물은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올바른 비평은 거울과 창문에 집착해서는 안 될 겁니다. 올바른 비평은 거울이 반영하는 현실, 창문 너머 현실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타노스가 허무맹랑한 맬서스 트랩을 떠든다고 해도, 누군가가 조시 브롤린에게 악의적으로 전화를 건다면, 그건 허구를 공격하는 행위겠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