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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인젠 대 랩터>와 여성적인 자연(야생) 본문

생태/동물들을 향하는 관점

<인젠 대 랩터>와 여성적인 자연(야생)

OneTiger 2020. 11. 24. 20:00

독자는 소설을 읽고 해석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는 동안, 작가 의도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허먼 멜빌은 <백경>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심해 무인 잠수정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의 세계에서 심해 무인 잠수정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허먼 멜빌이 심해 무인 잠수정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허먼 멜빌이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 속의 세계에서 무인 잠수정이 존재한다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무인 잠수정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처럼, 작가 의도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하지만 작가 의도는 전부가 아닙니다.

 

<백경>은 향유 고래를 이야기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허먼 멜빌이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허먼 멜빌이 향유 고래를 의도했기 때문에, <백경>은 향유 고래를 이야기합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작가 의도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건 쉬운 사례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작가 의도가 소설을 장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후무스(حُمُّص)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최은영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은영 작가가 <쇼코의 미소>를 쓰는 동안, 최은영 작가는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최은영 작가가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쇼코의 미소>는 후무스를 언급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독자가 이것을 묻는다면, 최은영 작가는 자신이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대답할 겁니다. 허먼 멜빌이 심해 무인 잠수정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경>이 무인 잠수정을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최은영 작가가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쇼코의 미소>는 후무스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허먼 멜빌이 심해 무인 잠수정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경> 속의 세계에서 심해 무인 잠수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은영 작가는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최은영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후무스가 존재하지 않나요? 최은영 작가가 <쇼코의 미소>를 쓰는 동안, 최은영 작가가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단편 소설 속의 세계에서 후무스가 존재하지 않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단편 소설 속의 세계에서 후무스는 존재할 겁니다. 이 단편 소설 속의 세계에서 아라비아 사람들은 살아갈 테고, 그들은 빵과 후무스를 먹을 겁니다.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를 썼으나, 비록 최은영 작가가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작가 의도와 상관없이, 아라비아 사람들과 후무스는 존재합니다.



심지어 최은영 작가는 후무스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최은영 작가가 후무스를 절대 알지 못한다고 해도,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아라비아 사람들은 후무스를 먹을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최은영 작가가 <쇼코의 미소>를 썼기 때문에, 독자가 <쇼코의 미소>를 해석하는 동안, 작가 의도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최은영 작가는 후무스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후무스가 존재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에서 아라비아 사람들이 빵에 후무스를 발라먹기 때문입니다.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를 썼습니다. 그래서 최은영 작가 의도는 중요합니다. 심지어 문학 평론가들은 최은영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쇼코의 미소>에 전략적으로 반영했다고 분석할 겁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를 쓰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를 썼습니다. 최은영 작가가 쓰기 전에, 이미 현실은 존재했습니다. 최은영 작가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하고 훨씬 근본적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쇼코의 미소>에서 일본인 쇼코는 일본어를 씁니다. 그래서 최은영 작가가 일본어를 만들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최은영 작가는 일본어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최은영 작가가 <쇼코의 미소>를 쓰기 전에, 이미 일본어는 존재했습니다. 비록 최은영 작가가 <쇼코의 미소>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쇼코의 미소>와 상관없이, 일본어는 존재합니다. 심지어 최은영 작가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일본어가 존재했기 때문에, 최은영 작가는 일본어를 <쇼코의 미소>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습니다. 현실 없이, 최은영 작가는 일본어를 <쇼코의 미소> 속에 집어넣지 못합니다. 한글은 <쇼코의 미소>를 구성합니다. 그래서 최은영 작가가 한글을 스스로 만들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최은영 작가가 <쇼코의 미소>를 쓰기 전에, 이미 한글은 존재했습니다. 비록 최은영 작가가 <쇼코의 미소>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쇼코의 미소>와 상관없이, 한글은 존재합니다. 심지어 최은영 작가가 태어나기 전에, 한글은 존재했습니다. 최은영 작가보다 한글은 훨씬 거대하고 훨씬 근본적입니다. 한글은 <쇼코의 미소>에 속하지 않습니다. 한글은 현실에 속합니다. 현실에서 한글이 존재하기 때문에, 최은영 작가는 한글을 사용했고 <쇼코의 미소>를 썼습니다. (내용과 형식 측면에서) 최은영 작가보다 현실은 우선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현실에게 기반합니다.



현실에서 아라비아 사람들은 후무스를 먹습니다. 최은영 작가보다 현실이 우선하고, 독자가 <쇼코의 미소>를 해석하는 동안, 독자가 현실에게 기반하고, 현실에서 아라비아 사람들이 후무스를 먹기 때문에, 독자는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후무스가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록 최은영 작가가 후무스를 절대 알지 못한다고 해도, 최은영 작가보다 현실이 훨씬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는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후무스가 존재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약 최은영 작가가 이 해석을 거부한다면, 독자는 왜 후무스가 존재하지 않는지 반박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후무스를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비록 소설 작가가 뭔가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작가 의도보다 현실은 훨씬 우선합니다. 비단 후무스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쇼코의 미소>는 아르켈론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최은영 작가가 아르켈론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최은영 작가는 아르켈론이 무엇인지 알지조차 못하는지 모릅니다. 최은영 작가가 아르켈론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아르켈론이 진화하지 않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록 작가가 아르켈론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르켈론은 진화했을 겁니다.



최은영 작가보다 현실은 근본적입니다. 현실에서 아르켈론을 비롯해 생물 다양성은 진화했습니다. 생물 다양성이 진화했기 때문에, 인류는 나타났습니다. 인류가 나타났기 때문에, 소유와 소쿄는 태어났습니다. 소유와 쇼코가 태어났기 때문에, 소유는 쇼코를 만나고 여러 사건들을 거칩니다. 만약 아르켈론을 비롯해 생물 다양성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나타나지 않았을 테고, 만약 인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소유와 쇼코는 태어나지 않았을 테고, 만약 소유와 쇼코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를 쓰지 못했을 겁니다. 생물 다양성 진화는 근본적입니다.

 

최은영 작가보다 생물 다양성 진화가 훨씬 근본적이기 때문에, 최은영 작가 의도는 생물 다양성 진화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최은영 작가 의도가 생물 다양성 진화를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최은영 작가가 아르켈론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는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아르켈론이 진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최은영 작가가 이 해석을 거부한다면, 독자는 왜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아르켈론이 진화하지 않았는지 반박할 수 있습니다. 왜 아르켈론이 진화하지 않았는지 해명하기 위해 최은영 작가는 새로운 생물 다양성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만약 최은영 작가가 새로운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를 창조한다면, <쇼코의 미소>는 SF 단편 소설에 가까워질 겁니다. 현실에서 아르켈론이 진화했기 때문에, 만약 소설 작가가 아르켈론을 배제하기 원한다면, 소설 작가는 새로운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를 창조해야 하고, 새로운 생물권 진화 역사는 SF 설정에 가까워집니다. <쇼코의 미소>는 SF 단편 소설이 아닙니다. 최은영 작가는 사이언스 픽션을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비록 <쇼코의 미소>가 아르켈론 화석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아르켈론은 진화했고 (애석하게도) 멸종했을 겁니다.

 

비록 <쇼코의 미소>가 아르켈론 화석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아르켈론이 진화했고 멸종했기 때문에, 만약 단편 소설 화자 소유가 자연사 박물관을 견학한다면, 소유는 아르켈론을 구경할 겁니다. 이렇게 독자는 작가 의도보다 현실에게 기반할 수 있습니다. <백경>은 심해 무인 잠수정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허먼 멜빌이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허먼 멜빌이 무인 잠수정을 의도하지 않았나요? 19세기 인류 문명이 심해 무인 잠수정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뭔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독자가 <백경>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비단 허먼 멜빌 의도만 아니라 19세기 현실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다른 매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그림,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역시 현실에게 기반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보다 현실에서 이것들은 나타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보드 게임을 해석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제작자 의도보다 현실에게 기반할 수 있습니다. 보드 게임 <인젠 대 랩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게임은 공원 경비대 로버트 멀둔과 세 벨로시랩터들이 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로버트 멀둔은 (산탄)총을 쏘고 함정을 설치합니다. 로버트 멀둔이 사격하기 때문에, 로버트 멀둔은 원거리 공격 등장인물입니다. 반면, 벨로시랩터들은 근접 공격 등장동물들입니다. 랩터들은 사격하지 못하고 함정을 설치하지 못합니다. 로버트 멀둔이 인간이기 때문에, 로버트 멀둔은 산탄총을 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벨로시랩터가 똑똑하다고 해도, 벨로시랩터가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벨로시랩터는 산탄총을 쏘지 못합니다. 벨로시랩터는 오직 태생적인 무기(이빨과 발톱)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계 문명에서 산탄총은 비롯했습니다. 기계 문명 이전에, 산탄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젠 대 랩터>가 영화 <쥬라기 공원>에 속하고, 영화 속에서 로버트 멀둔이 SPAS-12를 휴대하기 때문에, <인젠 대 랩터>에서 로버트 멀둔은 SPAS-12를 사용합니다. 기계 문명에서 SPAS-12는 비롯했습니다. 기계 문명 이전에, SPAS-12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SPAS-12는 기계 문명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에서 육식동물은 비롯했습니다. 기계 문명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랩터 같은 육식동물은 이빨과 발톱을 사용했습니다. 기계 문명보다 생물 다양성 진화 역사는 훨씬 원대합니다. 이빨과 발톱은 원대한 진화 역사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기계 문명보다 생물 다양성 역사가 원대한 것처럼, 남자(의 육체)보다 여자(의 육체)는 원초적입니다. 남자는 생명체를 낳지 못하고 키우지 못합니다. 여자는 생명체를 낳고 키울 수 있습니다. 여자는 생명체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스스로 창조하지 못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정자를 제공할 수 있으나, 결국 남자보다 여자는 생명체를 창조하고 먹일 수 있습니다. 여자가 스스로 창조할 수 있고, 남자가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는 자연(생물 다양성)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인류 문화는 자연이 여자라고 말하고 어머니 자연을 묘사합니다.





자연은 생명체를 낳고 먹입니다. 여자 역시 생명체를 낳고 먹입니다. 자연과 여자는 비슷한 위상이 됩니다. 반면, 남자는 스스로 창조하지 못합니다. 만약 남자가 뭔가를 창조하기 원한다면, 남자는 도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뭔가를 창조하기 위해 여자는 자신의 육체(자궁과 젖가슴)를 이용할 수 있으나, 남자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뭔가를 창조하기 위해 남자는 외부 도구를 만듭니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이건 가장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게 가장 결정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자연과 여자는 비슷하고, 기계와 남자는 비슷합니다. 기계는 육체보다 외부 도구입니다.

여자가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는 것처럼, 랩터는 자신의 육체(이빨과 발톱)를 이용합니다. 랩터는 자연(야생)에 속합니다. 남자는 외부 도구를 만듭니다. 기계는 외부 도구입니다. 기계 문명에서 SPAS-12는 비롯했습니다. 로버트 멀둔은 산탄총을 쏘고 함정을 설치합니다. 자연-여자-육체-랩터는 이어질 수 있고, 도구-기계-남자-산탄총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자연-여자-육체-랩터와 도구-기계-남자-산탄총은 대립합니다. 보드 게임 <인젠 대 랩터>는 이것을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 대립 구도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랩터는 여자, 암컷입니다. 로버트 멀둔은 남자입니다.)



게임 제목 '인젠 대 랩터'는 '도구-기계-남자-산탄총 대 자연-여자-육체-랩터'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뚜렷한 유사성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제작자들이 이것을 의도했나요? 자연과 육체를 부각하기 위해 게임 제작자들이 랩터를 암컷이라고 설정했나요? 화가가 게임 표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화가가 '도구-기계-남자-산탄총 대 자연-여자-육체-랩터'를 의도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게임 제작자들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가 이것을 해석하지 못하나요?

하지만 비록 최은영 작가가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는 <쇼코의 미소> 속의 세계에서 아라비아 사람들이 빵에 후무스를 발라먹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록 최은영 작가가 아르켈론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는 만약 소유가 자연사 박물관을 견학한다면 소유가 아르켈론을 구경할 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최은영 작가보다 현실이 근본적이기 때문에, 최은영 작가는 이 해석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비록 소설 작가가 뭔가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소설 작가보다 현실이 근본적이기 때문에, 독자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젠 대 랩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은영 작가가 후무스를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게임 제작자들은 자연-여자-육체-랩터를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최은영 작가보다 현실이 근본적인 것처럼, 보드 게임 제작자들보다 현실은 근본적입니다. 현실에서 아라비아 사람들이 빵에 후무스를 발라먹는 것처럼, 현실에서 어머니 자연은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독자가 후무스를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여자-육체-랩터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게임 플레이어가 이것을 필연적으로 해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 게임 플레이어들은 자연과 여자와 랩터를 연결하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게임 플레이어들은 기계와 남자와 산탄총을 연결하지 않을 겁니다. <인젠 대 랩터>는 '비대칭' 보드 게임이고, 중요한 것은 게임 규칙입니다. 아무리 게임 규칙 이외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저 미니어처나 삽화가 멋지다고 언급할 뿐입니다. <인젠 대 랩터>에서 자연, 육체, 여자는 핵심 개념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록 이것들이 핵심 개념이 아니라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여자와 남자가 비대칭이고 자연과 기계가 비대칭이고 육체와 도구가 비대칭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젠 대 랩터>보다 현실 속의 유물론이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인젠 대 랩터>는 영화 <쥬라기 공원>에 속합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영리 기업은 복제 공룡 사파리를 건설합니다. 복제 공룡 사파리는 재앙이 됩니다. 영리 기업이 생물 다양성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상품화는 재앙이 됩니다. 상품화는 재앙입니다. 자연 속에서 인류가 살아가고, 자연이 원대하기 때문에, 자연은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가 오직 이윤만 추구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연을 상품화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쥬라기 공원>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건 '의도'가 아닙니다.

 

영화 제작자들이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의도했나요? 글쎄요, 어떤 사람들은 의도했는지 모르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본주의에 찬성했을 겁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쥬라기 공원>을 감독했으나,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화 관객이 자본주의가 악랄하다고 해석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보다 현실 속의 환경 사회학이 훨씬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 사진 <Humus Nohut Yapıştır …> 출처: RitaE,

pixabay.com/tr/photos/humus-nohut-yap%C4%B1%C5%9Ft%C4%B1r-tohumlar-3142051/

 

※ 게임 <인젠 대 랩터> 사진 출처: The Dice Tower,

www.youtube.com/watch?v=6BB4RReVd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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