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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레우스>, 방울뱀과 신비로운 위험 본문

생태/동물들을 향하는 관점

<레우스>, 방울뱀과 신비로운 위험

OneTiger 2020. 6. 3. 19:50

[지성적인 행성은 자연 환경을 조성하고, 자연 환경 속에서 대추 야자 나무와 방울뱀은 살아갑니다.]



위 그림은 비디오 게임 <레우스> 스크린샷입니다. 이 게임은 이른바 신 게임(god game)에 속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신 게임은 4X 게임과 비슷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인류 문명을 건설합니다. 인류 문명은 자원들을 채집하고, 의식주들을 만들고, 인구를 늘리고, 도시를 발전시키고, 영역을 확장합니다. 많은 4X 게임들은 이 과정을 거치고, <레우스> 같은 신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지형을 조절하고 여러 식물상, 동물상, 광물들을 늘어놓습니다. 사람들은 식물상, 동물상, 광물들을 채집하고, 사냥하고, 캡니다. 이것들은 자원이 되고 의식주들을 만듭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훨씬 풍요로운 식물상, 동물상, 광물들을 배치한다면, 사람들은 훨씬 많은 자원들을 얻을 테고, 경제 발전 속도는 빨라질 겁니다. 빠른 경제 발전은 사람들을 탐욕에 빠뜨립니다. 만약 사람들이 탐욕에 빠진다면, 사람들은 훨씬 많은 재화들을 요구할 테고, 사람들은 전쟁을 일으킬 겁니다. 탐욕을 막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방법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너무 많은 자원들을 배치하지 않는다면, 경제 발전은 늦어질 겁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경이로운 자연 환경을 조성한다면, 사람들은 경이로운 환경에 감탄할 테고, 탐욕은 물러날 겁니다.



아니면 게임 플레이어는 위험한 동물을 배치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레우스>에서 동물상은 식량과 부유함을 제공합니다. 사막에서 캥거루 쥐는 식량을 제공하고, 사막 거북은 부유함을 제공합니다. <레우스>는 비단 사막 환경만 아니라 삼림, 늪지, 산맥, 바다 같은 여러 자연 환경들을 제시하고, 여러 환경들에서 다양한 가축들과 야생 동물들은 식량들과 부유함들을 제공합니다. 삼림에서 토끼는 식량을 제공하고, 족제비는 부유함을 제공합니다. 늪지에서 개구리는 식량을 제공하고, 이구아나는 부유함을 제공합니다. 산맥에서 담비는 식량을 제공하고, 무지개 꿩은 부유함을 제공합니다.


바다에서 고등어는 식량을 제공하고, 흰동가리는 부유함을 제공합니다. 일반적으로 식량들과 자원들을 얻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동물상을 조성합니다. 하지만 몇몇 야생 동물은 위험 수치를 올립니다. 만약 위험 수치 총합이 일정한 수치를 넘긴다면, 마을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두려워할 겁니다. 자연 환경이 두렵기 때문에, 두려움은 탐욕을 억제하고, 사람들은 탐욕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본문 위 스크린샷은 사막 방울뱀 무리를 보여줍니다. 방울뱀 무리는 위험 수치를 제공하고, 방울뱀들이 두렵기 때문에, 사막 마을 사람들은 탐욕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레우스>에서 방울뱀을 비롯해 여러 야생 동물들은 위험 수치를 제공합니다. 삼림과 늪지와 산맥과 바다에서 늑대와 코모도 도마뱀과 눈표범과 백상아리는 위험 수치를 제공합니다. 만약 백상아리 서식 범위에서 청새치들이 서식한다면, 청새치들을 잡아먹기 위해 백상아리가 멀리 돌아다니기 때문에, 위험 수치는 높아질 겁니다. 바다에서 백상아리가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탐욕에 빠지지 않습니다. 위험한 야생 동물은 탐욕을 억누릅니다. 이건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입니다. 위험과 탐욕은 대립합니다. 탐욕이 늘어날 때, 탐욕은 위험에 부딪히고, 위험은 탐욕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탐욕에 빠진다면, 탐욕은 위험에 부딪힐 테고, 탐욕스러운 인간은 위험에 빠질 겁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인간은 탐욕을 억누르고, 탐욕은 물러갑니다. 만약 인간이 탐욕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결국 인간은 목숨을 잃을 겁니다. 인간이 목숨과 탐욕을 바꿨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고 탐욕이 위험하다고 깨닫습니다. 이건 고전적인 주제이고, <레우스>는 고전적인 주제를 응용합니다. 방울뱀과 백상아리 같은 위험한 야생 동물은 탐욕을 억제합니다. <레우스>에서 탐욕(너무 빠른 경제 발전)은 위험(백상아리)에 부딪힙니다. 이 관점에서 <레우스>는 영화 <죠스>와 비슷합니다.



영화 <죠스>에서 탐욕과 위험은 대립합니다. 해수욕장은 지역 경제에 이바지합니다. 하지만 바다에서 백상아리가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수욕장을 외면합니다. 백상아리 때문에, 해수욕장은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지 못합니다. 만약 경제 발전을 위해 해수욕장이 백상아리를 외면한다면, 백상아리는 사람들을 습격할 테고, 사람들은 목숨들을 잃을 겁니다. 탐욕과 위험이 대립하기 때문에, 탐욕이 위험을 외면할 때, 사람들은 위험에 부딪히고 목숨들을 잃습니다. <레우스>와 <죠스>에서 백상아리 같은 야생 동물은 위험이 되고, 빠른 경제 발전은 탐욕이 되고, 위험은 탐욕을 억누릅니다.


비단 영화 <죠스>만 아니라 많은 이야기들은 이 고전적인 주제를 응용합니다.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황금을 탐낸다면, 황금을 얻기 위해 그들은 위험을 무릅쓸 겁니다. 하지만 그리핀이 황금을 지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황금을 쉽게 얻지 못합니다. 그리핀은 위험이고, 황금은 탐욕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위험(그리핀)을 외면하고 황금(탐욕)을 훔친다면, 분노한 그리핀은 사람들을 습격할 테고, 사람들은 목숨들을 잃을 겁니다. 만약 과학자들이 야생 동물들을 개조한다면, 이건 커다란 돈벌이가 될 겁니다. 유전 공학 기업은 공룡들을 복제하고 떼돈을 벌 겁니다.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과학자들을 고용하고 공룡들을 복제합니다. 자본가는 공룡 사파리를 건설하고 막대한 수익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공룡 사파리는 스피노사우루스 같은 위험한 야생 동물들을 포함합니다. 만약 우리에서 스피노사우루스가 탈출한다면, 15m짜리 육식동물은 사람들을 습격할 겁니다. 여기에서 자본은 탐욕이고, 스피노사우루스는 위험입니다. 탐욕스러운 자본은 거대한 육식동물을 만들었으나, 거대한 육식동물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릅니다. SF 독자는 위험(스피노사우루스)을 인식하고 탐욕(유전 공학 상업화)이 사라져야 한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해수욕장과 공룡 사파리는 똑같이 탐욕이 됩니다. 백상아리와 스피노사우루스는 위험이 됩니다.


해수욕장과 백상아리, 공룡 사파리와 스피노사우루스가 대립하는 것처럼, 탐욕과 위험은 대립합니다. 해수욕장과 공룡 사파리 '배후'에서 탐욕스러운 자본은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떼돈을 벌기 원하나, 백상아리와 스피노사우루스는 이것을 억제합니다. <레우스>에서 위험한 방울뱀 무리와 탐욕이 대립하는 것처럼, <죠스>에서 백상아리와 해수욕장 경제 발전은 대립합니다. 백상아리와 해수욕장 경제가 대립하는 것처럼, 복제 스피노사우루스가 위험하기 때문에, SF 독자는 과학 기술 상업화를 경계합니다. 야생 동물은 위험이 되고, 위험은 탐욕을 억제합니다. 이건 모든 이야기에서 야생 동물이 위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위험은 야생 동물보다 다른 뭔가가 될 수 있습니다. 유령은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판타지에서 보물을 얻기 위해 도적들이 유명한 고분을 약탈한다면, 고분에서 유령은 분노할 테고, 보물을 찾기 위해 유령은 사람들을 습격할 겁니다. 사람들은 외칠 겁니다. "누가 보물을 훔쳤지? 만약 보물이 고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유령은 분노를 가라앉히지 않을 거야! 보물은 고분으로 돌아가야 해! 우리는 고분의 보물을 건드려서는 안 돼!" 여기에서 고분의 보물은 탐욕이고, 분노한 유령은 위험입니다. 분노한 유령이 두렵기 때문에, 도적들은 탐욕을 억누를 겁니다. 도적들은 고분의 보물을 훔치지 않을 겁니다. 판타지에서 유령이 위험이 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첨단 병기는 위험이 됩니다.


군수 사업이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과학자들을 고용하고 첨단 병기를 만듭니다. 첨단 병기는 떼돈을 벌 겁니다. 하지만 전투 병기는 위험합니다. 만약 군대가 전투 병기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전투 병기는 사람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을 겁니다. 전투 병기가 위험하기 때문에, SF 독자는 탐욕스러운 군수 사업을 경계할 수 있습니다. 이 사례처럼, 위험과 탐욕은 대립합니다. 첨단 병기가 위험한 것처럼, 야생 동물 이외에 다른 많은 것들은 위험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위험들과 야생 동물들은 똑같은 위험이 아닙니다. 백상아리와 첨단 전투 병기는 다릅니다. 야생 동물은 원초적인 위험입니다.



[상호 작용들 속에서 야생 동물들은 위험 수치(송곳니 상징)를 올립니다. 이건 원초적인 위험입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에서 군수 기업이 첨단 병기를 제조한다면, 이건 막대한 공학 기술을 요구할 겁니다. 공학 기술 없이, 군수 기업은 첨단 병기를 제조하지 못합니다. 구축함 어뢰는 공학 기술을 요구합니다. 공학 기술 없이, 구축함 어뢰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인간은 공학 기술을 연구하고 어뢰를 제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구축함 어뢰보다 첨단 전투 병기는 훨씬 뛰어난 공학 기술을 요구할 겁니다. 군수 기업은 공학 기술을 연구하고 첨단 병기를 만듭니다. 공학 기술 없이, 첨단 전투 병기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류가 나타나기 이전에, 구축함 어뢰와 첨단 병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나타난 이후, 서구 근대화가 나타난 이후, 마침내 구축함 어뢰는 나타났고, 사이언스 픽션에서 군수 기업은 첨단 병기를 제조합니다. 구축함 어뢰는 파괴적이나, 구축함 어뢰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첨단 병기는 엄청나게 파괴적이고, 첨단 병기는 지구를 끝장낼지 모르나, 사이언스 픽션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만약 19세기가 근대화 시발점이라면, 서구 근대화는 그저 200년을 넘겼을 뿐입니다. 아무리 17~18세기가 근대화 시발점이 된다고 해도, 서구 근대화는 300~400년을 넘겼을 뿐입니다. 반면, 야생 동물로서 백상아리는 자연 환경에 속합니다.



신 게임 <레우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자연 환경을 테라포밍하고, 식물상과 동물상을 조성하고, 백상아리를 만드는 것처럼, 백상아리는 자연 환경에 속합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상어들은 존재했습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야생 동물들은 존재했습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연 환경은 존재했습니다. 아니, 자연 환경에서 인류는 비롯했습니다. 만약 자연 환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 역시 나타나지 못했을 겁니다. 여전히 자연 환경 없이, 인류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은 뛰어난 첨단 과학들을 자랑하나, 여전히 자연 속에서 인류는 살아갑니다.


뛰어난 첨단 과학들은 자연 환경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종종 사이언스 픽션들은 인공 생태계를 묘사하나, 아직 현실에서 이건 시기상조입니다. 사이언스 픽션들과 달리, 현실에서 아무도 인공 생태계를 설계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인공 생태계가 자연 환경을 대신한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자연 환경 속에서 인류는 살아가고, 인류보다 자연 환경은 훨씬 웅장합니다. 그래서 자연은 원초적입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상어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야생 동물로서 백상아리가 자연 환경에 속하기 때문에, 백상아리는 원초적입니다. 백상아리보다 구축함 어뢰는 파괴적이나, 어뢰는 원초적이지 않습니다.



과학 기술이 구축함 어뢰를 만들었기 때문에,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구축함 어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축함 어뢰가 스스로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축함 어뢰는 원초적이지 않습니다. 반면, 생물 다양성이 상어를 만들었기 때문에,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상어가 존재했기 때문에, 상어가 스스로 발생했기 때문에, 상어는 원초적입니다. 아무리 구축함 어뢰가 파괴적이라고 해도, 백상아리와 달리, 구축함 어뢰에게는 이런 원초적인 측면이 없습니다. 어뢰에게 원초적인 측면이 없기 때문에, 어뢰는 신비롭지 않습니다. 상어가 원초적이기 때문에, 상어는 신비롭습니다. 어뢰는 인간 하인입니다.


인간이 어뢰를 만들었기 때문에, 어뢰는 인간에게 종속됩니다. 반면, 인간은 상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건 문학적인 표현이나, 어머니 자연은 상어를 키웠습니다. 인간이 상어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어는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습니다. 상어는 훨씬 높은 위상, 어머니 자연에게 속합니다. 인간은 어머니 자연을 뛰어넘지 못하고, 아무리 인류가 모든 백상아리를 멸종시킨다고 해도, 인간은 자연 그 자체, 어머니 자연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런 어머니 자연에게서 백상아리가 비롯했기 때문에, 구축함 어뢰는 신비로운 백상아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이건 오직 자연 환경만 원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 환경 이외에 수많은 것들은 원초적입니다. 태양은 원초적입니다. 해일은 원초적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유령 역시 원초적입니다. 유령이 사후 세계로 이어지고, 인간이 죽음을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령은 원초적입니다. 하지만 태양, 해일, 유령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생명 현상이 아닙니다. 이것들과 달리, 백상아리는 생명 현상입니다. 그래서 백상아리보다 태양과 해일과 유령이 훨씬 웅장하고 원초적이고 무시무시하다고 해도, 백상아리는 이것들과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백상아리보다 벼락이 훨씬 원초적이라고 느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백상아리는 생명 현상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태양과 해일과 유령이 훨씬 원초적이라고 느낀다고 해도, 태양과 해일과 유령은 생명 현상이 아니고, 사람들은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태양과 해일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해일이 웅장하다고 해도, 해일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해일보다 백상아리는 작으나, 백상아리에게는 의지가 있습니다. 신진 대사를 유지하기 위해 백상아리는 의도적으로 사냥합니다. 아무리 유령이 무시무시하다고 해도, 유령은 죽음입니다. 죽음과 생명은 대조적이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죽음보다 생명이 우월하다고 판단합니다. 우리 역시 생명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유령보다 백상아리는 낫습니다.



백상아리는 원초적이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어뢰, 태양, 해일, 유령에게는 이런 측면이 없습니다. 백상아리가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야생 동물이 자연 환경에 속하기 때문에, 어뢰, 태양, 해일, 유령보다 백상아리는 경이롭습니다. 경이로운 백상아리에게는 영성이 있습니다. 영성은 인간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영성을 스스로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이 원초적인 존재에게 감탄할 때, 영성은 나타납니다. 그래서 영성은 신에게 기반합니다. 그래서 <레우스>는 신 게임입니다. 자연 환경이 원초적이고, 원초적인 것에게 영성이 있고, 영성이 신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레우스>는 신 게임입니다.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에서 그리핀과 복제 스피노사우루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핀은 거대 맹금류입니다. 맹금류는 야생 동물입니다. 백상아리가 야생 동물인 것처럼, 검수리는 야생 동물입니다. 스피노사우루스는 야생 동물입니다. 아무리 유전 공학 기술이 스피노사우루스를 복제하고 개조한다고 해도, 백상아리가 야생 동물인 것처럼, 본질적으로 스피노사우루스는 야생 동물입니다. 아무리 유전 공학 기술이 스피노사우루스를 복제하고 개조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스피노사우루스가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야생 동물 스피노사우루스는 유전 공학 기술, 인류 문명에게 종속되지 않습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이것을 간과하고 자연 환경을 망친다면, 자연 환경 속에서 인류 문명이 살아가기 때문에, 인류 문명 역시 커다란 피해를 받을 겁니다. 심지어 인류 문명은 지속 가능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엄청난 세계화 속에서 대대적인 전염병 역시 세계화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합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은 자연 환경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무분별한 산업 개발, 경제 발전을 추구합니다. 엄청난 세계화 속에서 대대적인 전염병 역시 세계화하나, 사람들은 이것을 경제 발전이라고 부릅니다.


왜 무분별한 산업 개발이 경제 발전이 되나요? 여기에서 경제는 자본주의를 가리킵니다. 경제 발전은 이윤 창출을 가리킵니다. 자본주의에게 오직 이윤 창출만 목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연 환경이 망가진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연 환경이 망가진다고 해도, 만약 자본가 계급이 이윤을 창출한다면, 자본주의는 이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겁니다. 그래서 환경 오염은 경제 발전이 됩니다. 자본주의는 이런 사고 방식을 세뇌하고, 사람들은 환경 오염이 경제 발전이라고 착각합니다. 악랄한 자본주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야생 동물 스피노사우루스는 이것을 시사합니다.



[방울뱀, 눈표범, 스피노사우루스가 인류 문명에게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이 사진은 영성을 풍깁니다.]



셔먼 파이어플라이 전차와 스피노사우루스 중에서 무엇이 훨씬 파괴적인가요? 대답은 셔먼 파이어플라이입니다. 만약 셔먼 파이어플라이와 스피노사우루스가 싸운다면, 셔먼 파이어플라이는 17파운드 대전차포를 발사하고 스피노사우루스를 날려버릴 겁니다. 아무리 육식 공룡이 사납다고 해도, 육식 공룡은 기갑 병기를 당하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우연히 스피노사우루스는 셔먼 전차에게 달려들고 금속 장갑판을 커다란 발톱들로 할퀼지 모르나, 분명히 스피노사우루스보다 셔먼 전차는 훨씬 파괴적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셔먼 전차보다 육식 공룡은 훨씬 원초적이고, 그래서 육식 공룡은 신비롭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셔먼 전차보다 스피노사우루스가 훨씬 무섭다고 느낀다면, 그들이 원초적인 감성을 느꼈기 때문에, 셔먼 전차보다 스피노사우루스는 훨씬 무서울 겁니다. 셔먼 전차보다 스피노사우루스가 무서울 수 있는 것처럼, 야생 육식동물에게 원초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 같은 창작물들은 야생 동물이 인간을 습격한다고 묘사합니다. 아무리 백상아리보다 핵 잠수함이 훨씬 파괴적이라고 해도, 핵 잠수함보다 백상아리가 훨씬 원초적이기 때문에, 많은 창작물들은 백상아리가 인간을 습격한다고 묘사하고, 사람들은 이런 창작물들을 좋아합니다. 카야 스코델라리오가 주연한 악어 영화 <크롤>처럼, 야생 포식자는 인기 스타입니다.



하지만 야생 포식자는 비단 무서울 뿐만 아니라 원초적입니다. 영화 <크롤> 홍보 문구(링크)가 "They were here first."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류보다 야생 포식자는 원초적입니다. (비단 야생 포식자 영화만 아니라 환경 운동가들에게도 "They were here first."는 중요한 선전 선동 문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야생 포식자가 자연 생태계에 속하고, 원초적인 것에게 영성이 있기 때문에, <레우스>가 신 게임인 것처럼, 야생 포식자에게는 '생태 영성'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야생 포식자에게는 생태 영성이 있습니다. 방울뱀에게는 생태 영성이 있습니다. 눈표범에게는 생태 영성이 있습니다. 백상아리에게는 생태 영성이 있습니다. 스피노사우루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판타지들과 사이언스 픽션들은 온갖 야생 포식자들을 상상하고, SF/판타지 야생 포식자들에게도 생태 영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창작물들은 이것을 간과합니다. 많은 창작물들은 백상아리 같은 야생 포식자가 그저 살육 기계에 불과하다고 묘사합니다. 이런 창작물들은 원초적이고 살아있는 측면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이런 창작물들은 오직 파괴와 싸움에만 몰두합니다. 아무리 취향 차이가 중요하다고 해도, 백상아리가 그저 살육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창작물들은 얄팍해집니다. <레우스>에서 방울뱀과 눈표범과 백상아리는 오직 파괴와 싸움만 자극하지 않습니다. <레우스>는 神 게임이고, 생태 영성 속에서 방울뱀과 눈표범과 백상아리는 존재합니다.



<레우스>는 백상아리가 그저 살육 기계에 불과하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생태 영성 속에서 백상아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레우스>는 흥미롭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야생 포식자를 좋아한다면, 캐롤린 머천트 같은 환경 전문가는 좋은 참고가 될 겁니다. 캐롤린 머천트는 왜 자연 생태계가 웅장하고 거대한 상호 작용인지 감동적으로 설명합니다. 웅장하고 거대하고 감동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백상아리는 존재합니다. 피에 젖은 날카로운 이빨은 백상아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생태계 순환 속에서 백상아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캐롤린 머천트는 파괴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 백상아리 사진 출처: Elias Levy,

https://www.flickr.com/photos/elevy/1473074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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