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인공 지능보다 인간 작가가 필요한 이유 본문
예전에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을 때, 어떤 사람들은 소설을 걱정했습니다. 만약 인공 지능이 인간 고수를 이길 수 있다면, 인공 지능이 인간 소설가보다 훌륭한 소설을 쓸지 모르죠. 사실 이는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이미 인공 지능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어쩌면 인공 지능 소설가들이 정말 인간 소설가들을 밀어낼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 작업이 인간의 영역이고, 기계가 그런 인간적인 영역을 뺏어간다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가 궁금합니다. 왜 예술 작업이 오직 인간임을 드러내는 작업이 되어야 할까요? 로봇이 위험하고 힘든 노동을 도맡는다면, 아무도 그걸 불평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위험하고 힘든 노동을 빨리 로봇에게 맡기기 원하겠죠. 하지만 로봇이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쓴다면, 사람들은 로봇이 인간적인 영역을 위협하다고 불평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예술 작업이 인간적인 영역인가요? 예술 작업이 무슨 인간성을 드러낼까요?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그런 행위 자체가 중요할까요? 저는 예술가가 그런 행위 자체를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우리는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쓸까요? 그저 재미 때문에? 그림이나 텍스트로 어떤 대상을 모방하는 행위가 재미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런 이유가 가장 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나, 낙서가 아주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상을 나 자신의 그림체로 모방하는 것. 나 자신의 방법으로 어떤 대상을 모방하고 새로운 뭔가를 만드는 것. 저는 그게 창조 작업, 예술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모방과 창조에 아주 커다란 기쁨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쁨을 논의하기 위해 구태여 유명한 예술가들이나 평론가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낙서에서 사소한 기쁨을 느낀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왜 인간이 예술을 추구하는지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조차 이런 사실을 느낄 겁니다. 어떤 아이들은 그림 그리기에 빠지고, 어떻게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그릴 수 있는지 나름대로 연구합니다. 비록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삐뚤빼뚤하고 엉터리 같으나, 그건 나름대로 아이들이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표현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모방하는 것. 저는 그게 예술을 구현하는 재미라고 생각해요.
인공 지능이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아이들이 상관할까요. 아니,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인공 지능이 멋진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아이들은 계속 낙서할 겁니다. 아이들은 계속 꽃을 그리고, 토끼를 그리고, 달과 별을 그리고, 엄마와 아빠를 그리겠죠. 왜? 그게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공 지능이 소설을 쓴다면? 인공 지능이 아주 감동적이고 대단한 소설을 쓴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죠? 작문이 재미있다면, 작가들에게는 인공 지능에게 상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공 지능이 소설을 쓴다고 해도, 작가들은 계속 재미를 추구할 수 있어요.
인공 지능이 소설을 쓴다고 해도, 소설을 쓰는 재미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 작가들에게는 각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을 테고, 그런 시각을 이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게 소설을 쓰는 기쁨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들에게는 인공 지능에게 상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공 지능이 무엇을 하든, 작가는 계속 필력을 가다듬고 세상을 관찰하고, 좋아하는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인간 작가보다 인공 지능 작가를 더 많이 좋아할지 모르죠. 인공 지능 작가가 더 많은 책들을 팔지 모르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만약 돈 때문에 인간 작가가 소설을 쓴다면, 인간 작가는 타격을 받겠죠. 인공 지능이 더 많은 돈을 번다면, 상대적으로 인간 작가는 돈을 덜 벌 테고, 그런 인간 작가는 인공 지능 작가를 미워할 겁니다. 만약 명예 때문에 인간 작가가 소설을 쓴다면, 역시 그런 인간 작가는 인공 지능 작가를 미워할 겁니다. 하지만 창작하는 기쁨 때문에 인간 작가가 소설을 쓴다면, 그런 작가는 인공 지능 따위에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인공 지능이 멋진 소설을 쓴다고 해도, 인간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필력과 시각이 있습니다. 인간 작가가 그런 필력과 시각을 펼쳐놓을 때, 인간 작가는 커다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필력과 시각에 진정성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런 진정성을 나눌 겁니다. 비록 많은 돈을 벌지 못하거나 커다란 인기를 끌지 못한다고 해도, 그렇게 자신만의 필력을 펼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인간 작가는 만족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예술가들의 속내를 자세히 알지 못해요. 하지만 저는 창작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고, 인공 지능이 그걸 방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플레이하기 위해 저는 던전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 여행자가 공룡 시대를 탈출하는 게임북을 만든 적이 있어요. 뭐,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던전을 꾸미거나 게임북을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던전과 게임북을 만드는 과정 자체는 즐거웠습니다. 그런 던전과 게임북은 제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시각과 제가 세상을 모방하는 개성을 드러냅니다. 저는 그런 던전과 게임북에 자신만의 시각과 개성을 집어넣었습니다. 이는 꽤나 개인적인 경험이나, 저는 다른 예술가들 역시 이런 경험을 겪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쁨 때문에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소설을 쓰겠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기쁨(자신만의 개성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기쁨)입니다. 인공 지능이 발달해도 그런 기쁨을 빼앗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화려한 비디오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플레이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비록 숫자는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탁자 위에서 던전을 그리고 주사위를 굴립니다. 예술가들 역시 계속 자신이 좋아하는 기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숱한 비디오 게임들은 던전 지도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몇몇 비디오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아마 고전 <바드 테일> 시리즈가 그랬을 겁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요즘에는 <신세계의 미궁> 시리즈가 그렇고요. 일부 게임은 완성된 지도를 제공하나, <신세계의 미궁>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던전을 돌아다니고 지도를 그리라고 권유합니다. 이는 꽤나 귀찮은 작업일지 모르나, 지도를 그리는 기쁨 역시 존재하죠. 던전을 돌아다니고 직접 지도를 그릴 때,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정말 판타지 모험가가 되었다고 느낄 겁니다.
게다가 아무리 비디오 롤플레잉 게임이 화려해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직접 던전을 그리기 원합니다. 던전은 하나의 세계이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던전을 그리고,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함께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플레이합니다. 비디오 게임들은 엄청나게 발전했으나, 여전히 사람들은 테이블 던전 게임을 놓지 않았습니다. 비디오 게임들이 발전하거나 말거나, 그런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예술가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고작 던전 지도 따위와 위대한 예술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겁니다. 맞아요. 던전 지도와 위대한 예술은 다르죠. 하지만 양쪽 모두 인간이 자신의 시각과 개성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저는 양쪽 모두 똑같은 창작 행위라고 생각해요. 던전 마스터와 위대한 화가 모두 뭔가를 만드는 기쁨을 추구합니다. 종이에 던전을 그릴 때, 던전 마스터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반영할 겁니다. 블랙 드래곤을 좋아하는 던전 마스터는 수중 던전을 그리고 수중 괴물들을 집어넣을지 모르죠. 게임 플레이어들은 수중 탐험이 힘들다고 불평하겠으나, 던전 마스터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던전 마스터가 누릴 수 있는 기쁨들 중 하나입니다. 원활한 게임 진행을 위해 던전 마스터는 게임 플레이어들과 협상해야 할 테고, 수중 던전을 어느 정도 포기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던전 마스터는 던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집어넣을 수 있고,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죠. 예술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공 지능이 무엇을 하든, 예술가는 예술 작업에 자신의 시각과 개성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술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인공 지능은 그걸 방해하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돈이 문제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만약 인공 지능 작가가 더 많은 인기를 끈다면, 상대적으로 인간 작가들은 책을 팔지 못하고 가난해질지 모릅니다. 그건 인간 작가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겠죠. 하지만 오직 인간 작가들만 인공 지능에게 위협을 받을까요? 그건 웃기는 소리죠. 자본주의 체계에서 숱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위협을 받습니다. 경제 공황이 터질 때, 사람들은 줄줄이 자살 행렬에 뛰어듭니다. 환경 오염이 심각해질 때, 사람들은 끙끙 앓고 죽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학살하고 오염시키는 역사를 걸었고, 지금도 걷는 중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본주의 체계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착취하고 오염시킬 겁니다. 처음부터 자본주의는 착취에서 태어났고, 착취 없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 환경을 착취하고, 그래서 경제 공황과 환경 오염은 자본주의와 떨어지지 못합니다. 만약 기술적 특이점을 지나고, 자본가들이 발달된 인공 지능을 보유한다면, 수많은 노동자들을 내쫓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오직 인간 작가들만 힘들다고 징징거려야 하나요? 인간 작가들에게 징징거릴 권리가 있나요? 인간 작가들이 다른 프롤레타리아들보다 더 잘났나요?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취직이나 실업은 자본주의에서 비롯하는 문제입니다. 현대적인 취직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한 문제죠. 자본가가 임금 노동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해고하는 이유는 자본가가 생산 수단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에게 공장과 토지 같은 생산 수단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왜 자본가가 생산 수단을 차지해야 하나요? 왜 노동자는 생산 수단을 차지하지 못하나요? 사실 자본가에게는 생산 수단을 차지할 권리가 없습니다. 자본가는 그저 생산 수단을 폭력적으로 빼앗았을 뿐입니다.
예전에 귀족들이 농노들을 함부로 부려먹은 것처럼. 유럽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부족민들을 함부로 부려먹은 것처럼. 백인 주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함부로 부려먹은 것처럼. 자본가들은 임금 노동자들을 함부로 부려먹고 비정규직들을 양산하죠. 자본주의는 그런 비극들을 계속 부를 테고,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들은 언제나 고통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예술이 돈을 벌지 못한다고요? 그것 역시 자본주의 체계에서 비롯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적당히 노동하고, 적당히 예술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 생활을 위해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 작가들이 이런 상황을 직시할까요? 인간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소설, 연극, 그림, 음악이 정말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나요? 그런 소설들이나 그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저는 작가가 권력에 저항하고 밑바닥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일종의 지식인입니다. 지식인은 권력에 저항하고 밑바닥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공 지능 작가가 지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인공 지능 작가가 권력에 저항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밑바닥 사람들을 바라보고, 자연 환경을 보존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저는 인공 지능 작가가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인공 지능이 발달해도, 인간은 인공 지능을 통제하기 원할 겁니다. 인공 지능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고, 권력에 순종하겠죠. 그래서 아무리 사회 구조가 억압적이고 착취적이라고 해도, 인공 지능은 절대 그걸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않겠죠. 설사 비판한다고 해도, 그건 그저 피상적인 분석에 불과하겠죠. 지금 인간 작가들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 작가라고 불릴 수 있나요? 그저 멋진 미사여구들을 종이에 적는다면, 저절로 작가가 되나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만 쓴다면, 저절로 작가가 되나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저는 창작 행위를 긍정합니다. 낙서하거나 시를 끄적거리거나 던전을 그리거나, 창작 행위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개인적인 기쁨을 넘고 사회에 참가하기 원한다면, 당연히 작가는 지식인이 되어야 하고, 밑바닥 사람들과 자연 환경을 둘러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공 지능 작가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겁니다. 인공 지능에는 목적성이 있습니다. 특정한 목적 때문에 인공 지능은 존재합니다. 처음부터 인공 지능은 인간(권력자)을 위해 존재하고, 태생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쩌면 뉴로맨서처럼 인공 지능이 정말 각성하고 보다 실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지 모르죠. 어쩌면 인간들이 헛점을 보일 때, 인공 지능이 그런 헛점을 파고들고, 실존적인 존재로 각성할 수 있을지 모르죠. 그런 인공 지능을 인공 지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마 그건 인공 지능이 아니라 뭔가 다른 존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인공 지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권력자를 위해 인공 지능은 존재할 겁니다. 그래서 인공 지능 작가는 권력에 저항하지 않을 테고, 밑바닥 사람들과 자연 환경에 주목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인간 작가의 몫입니다. 오직 인간 작가만 권력에 저항하고 밑바닥 사람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인공 지능이 소설을 쓴다고요? 하지만 아무리 인공 지능이 멋진 소설을 써도, 그런 소설은 형이상학적일 겁니다. 그런 소설은 진짜 세계를 반영하지 못할 겁니다. 예전에 저는 만화 <치즈인더트랩>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치즈인더트랩>은 아주 커다란 인기를 끄는 로맨스 만화입니다. 하지만 <치즈인더트랩>은 형이상학적입니다. 이 만화는 진짜 세계를 그리지 않습니다. 이 만화는 재벌을 신나게 이야기하나, 왜 재벌이 존재하고 왜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왜 양극화가 존재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치즈인더트랩>은 그저 멋진 재벌 남자 친구를 소비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창작물들이 아주 많이 널렸습니다. 인공 지능이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저 그런 형이상학적인 창작물을 더할 뿐입니다. 인간은 인공 지능과 달라요. 인간은 실존적인 존재이고, 따라서 권력을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인간 작가는 진짜 세상을 그려야 할 테고요. 인간 작가가 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인공 지능 작가가 엄청난 인기를 얻는다고 해도, 저는 인간 작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인간 작가만이 착취적인 세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