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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인간과 우주>와 평등한 유전 공학 기술 본문

SF & 판타지/개조 생명체들

<인간과 우주>와 평등한 유전 공학 기술

OneTiger 2019. 4. 28. 19:28

낸시 파머가 쓴 <전갈의 아이>는 바이오펑크 소설입니다. '전갈의 아이'라는 제목은 뭔가 섬뜩하고, 소설 표지에는 전갈 그림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흑백 거대 괴수 영화 <블랙 스콜피온>이나 고전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 <웨이스트랜드>처럼 이 소설이 사막과 거대 전갈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갈의 아이>에 거대 전갈은 나오지 않습니다. <커맨드 앤 컨커>에 나오는 노드 형제단이 전갈 문양을 사용하는 것처럼, 전갈은 그저 문양에 불과합니다. 그 대신 이 소설에는 복제인간들이 있어요. 소설 주인공 역시 복제 인간입니다. 소설 주인공 소년은 마약 대부를 위한 복제 인간입니다.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늙은 마약 조직 대부는 장기들을 교체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조직 대부는 복제 인간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소설 주인공 소년은 살아있는 장기 보관소입니다. 어떤 시점에서 마약 조직 대부는 장기들을 교체하기 원할 테고, 주인공 소년은 수술대로 끌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복제 인간은 그저 또 다른 신체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복제 인간에게는 독립적인 영혼이 있고, 한 인간으로서 소년은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소년은 거대하고 위험한 마약 조직에게서 도망치고 싶어합니다. 소설 <전갈의 아이>는 복제 인간 소년의 모험과 성장을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에서 문제는 비단 주인공 소년만이 아닙니다. 유전 공학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유전 공학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에게 복제 인간들은 좀비 노예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복제 인간들은 정말 좀비 노예들과 비슷합니다. 머릿속에 칩이 있기 때문에 좀비처럼 복제 인간 노동자들은 맹목적으로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들이 로봇과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이 비참하고 맹목적으로 명령을 따르기 때문에 그들은 로봇보다 좀비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권력자들이 유전 공학을 휘두를 수 있다면, 자연 생태계 역시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전갈의 아이>는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이 아니고 자연 생태계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전갈의 아이>는 <태양이 없는 땅>이나 <달 위를 걷는 느낌>이나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다릅니다. 하지만 <전갈의 아이>처럼 권력자들이 유전 공학을 마음대로 이용한다면, 생태계 교란은 너무 뻔한 비극일 겁니다. 이미 현실에서 유전 공학과 품종 개량은 여러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개조 작물과 개조 가축이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것들은 가난한 농민들을 압박하고 옥죌 겁니다. 다국적 식량 기업들에게 작물과 가축 특허권이 있다면, 가난한 농민들은 다국적 식량 기업들에게 끌려다닐 겁니다.



미래 세계에서 유전 공학이 상업적으로 퍼진다면, 정말 살아있는 장기 보관소들이 나타날까요? 인간 노동자들이 좀비 노예들이 될까요? 개조 작물들이 자연 생태계를 교란하거나 농민들이 농약을 들이마셔야 할까요? 아무도 대답을 알지 못할 겁니다. 분명히 유전 공학은 빠르게 발달하는 중입니다. 심지어 과학자들은 외계 행성에 개조 미생물들을 풀어놓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주선이나 외계 개척지에서 개조 식물들은 원활하게 식량을 공급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유전 공학이 개조 미생물들을 만들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유전 공학이 빠르게 발달한다고 해도, 생명 과학자들은 한계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장기 보관소들이나 좀비 노예들은 나타나지 않을지 모르죠. SF 소설들은 똑똑한 개조 동물들을 이야기하곤 하나, 미래에서 똑똑한 개조 동물들 역시 나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해요. 문제는 이겁니다. 만약 미래에서 유전 공학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불거진다면? 철학자들은 이미 사람들이 유전 공학 기술을 평등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말은 쉽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평등하게 유전 공학 기술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농민들이 이걸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식량 기업들이 가난한 농민들을 압박하나요?



아무리 철학자들이 평등한 과학 기술들을 떠든다고 해도, 현실에는 아주 수직적인 계급들이 있습니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착취할 수 있습니다. 사실 착취와 수탈 때문에 지배 계급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 수탈 없이 서구 문명이 부유해지지 못하는 것처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 계급은 계속 피지배 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해야 합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게 황금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헛소리입니다. 식민지 수탈 없이, 자본주의는 절대 존재하지 못합니다. 한때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누렸다고 해도, 이른바 황금기 동안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식민지들을 수탈해야 했습니다.


식민지 수탈이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는 황금기고 나발이고 없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자들이 그저 평등한 과학 기술들만 떠든다고 해도, 이런 주장에는 별로 가치가 없을 겁니다. 이런 주장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외면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 철학자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오직 명분과 당위성만을 떠듭니다. 철학자들은 그저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외칠 뿐입니다. 착하게 살아라. 네, 이건 좋은 말이에요. 누가 이걸 모릅니까? 하지만 억압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이게 가능한가요? 노예 주인이 착하게 노예를 부려먹는다면, 노예 해방이 이루어질까요?



과학 서적 <인간과 우주에 대해 아주 조금 밖에 모르는 것들>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좌담 모음집입니다. (어따, 제목은 정말 깁니다.) <인간과 우주>에서 여러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어떻게 사람들이 과학 기술을 바라봐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과학이 자본에게 저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과학이 자본에게 저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착하게 사는 방법, 윤리적으로 사는 방법을 말합니다. <인간과 우주>에서 여러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단체 행동을 금기시합니다. 단체 행동은 위험합니다.


이건 혁명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단체를 조직하고, 직접 자본과 싸우고, 봉기할 때, 이건 혁명이 됩니다. 하지만 <인간과 우주>에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혁명을 부정합니다. 혁명은 위험합니다. 혁명은 피를 흘릴지 모르고 그릇된 결과를 부를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혁명은 안 됩니다. 혁명은 나쁜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회 구조를 혁명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인간과 우주>는 이런 이야기를 떠듭니다. 하지만 정말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양심이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요? 노예 주인들과 노예들이 윤리적으로 살아간다면, 노예 제도 사회가 저절로 사라집니까?



문제는 개인적인 행동에게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개인이 착하게 살고 싶다고 해도, 개인은 사회 구조를 따라가야 합니다. 사회 구조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일 때, 개인은 이윤 축적을 따라가야 합니다. 거대 슈퍼마켓들과 식당들은 식자재들과 음식들을 버립니다. 발주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발주가 줄어든다면, 거대 슈퍼마켓들은 식자재들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유통 업체들은 매출을 올려야 하고 반드시 많이 발주해야 합니다. 영업 사원들이 발주를 줄이고 싶다고 해도, MD들(바이어들)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물량들을 밀어넣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업 사원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영업 사원은 개인적으로 발주를 줄이지 못합니다.


유통 회사는 매출 목표를 정할 테고, 영업 사원이 매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인사처와 점장은 영업 사원을 엄청나게 갈굴 겁니다. 영업 사원은 좌천되거나 갈굼을 겪거나 심지어 인사 보복을 당할지 모릅니다. 아이들 학자금 대출이 목숨을 옥죄는 상황에서 영업 사원 개인이 이런 갈굼을 버틸 수 있을까요? 누가 학자금 대출을 갚습니까? 누가 월세를 냅니까? 누가 고지서들을 처리합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터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일터는 봉건 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윗대가리가 까라고 시킬 때, 아랫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까야 합니다. 직원들이 여기에 맞서고 싶다면, 직원들은 모여야 합니다. 직원들은 모이고 함께 저항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지배 계급들이 막대한 생산 수단을 차지한 상황에서 무산자 민중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사실 고전적인 디거스, 19세기 파리 코뮌, 21세기 노동자 통제 운동들처럼, 무산자 민중들이 함께 모일 때, 그들은 억압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산 수단을 통제하기 바랍니다. 이런 운동은 아주 거대한 비극과 재앙을 막을 수 있습니다. 혁명이 피를 흘린다? 하지만 혁명이 없다면,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훨씬 많은 피를 흘릴 겁니다. 혁명 결과가 잘못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해방적인 실험들을 되풀이했습니다.


문제는 파쇼주의와 파쇼주의에 동조하는 자본가 계급이었습니다. <인간과 우주>는 정말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개무시하고 누가 2차 세계 대전을 터뜨렸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우주>는 약자들이 치열하게 저항하는 역사를 개무시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지배 계급의 앞잡이가 됩니다. 강신주 박사는 지배 계급의 앞잡이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강신주 박사는 정말 인간 해방을 바랄 겁니다. 애석하게도 <인간과 우주>는 과학이 자본에게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나, 지배 계급의 나팔수가 됩니다. 이 책이 치열한 저항 운동들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노예 주인들과 노예들이 윤리적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노예 제도 사회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노예 주인들은 윤리적으로 노예를 죽이고, 윤리적으로 노예를 강간하고, 윤리적으로 노예를 착취하고, 윤리적으로 노예를 구속할 겁니다. 노예들은 모이고, 집단을 조직하고, 격렬하게 저항해야 합니다. 그때 노예 제도 사회는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인간과 우주>는 이런 집단 행동을 개무시하고 오직 윤리만을 떠듭니다. 윤리? 네, 윤리는 좋아요. 윤리와 도덕이 사회 구조로 이어진다면, 윤리와 도덕은 나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숱한 지식인들이 윤리와 도덕을 빙자하고 사회 구조를 은폐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과 우주>가 그러는 것처럼, 지식인들은 사회 구조를 외면하고 오직 개인적인 윤리만 부르짖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회 구조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함에도, 숱한 지식인들은 사회 구조와 경제 현상보다 개인적인 윤리를 외칩니다. 개인? 비정규직 개인에게 무슨 힘이 있나요? 대형 할인점의 청소부 아줌마에게 무슨 힘이 있나요? 편의점의 여자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무슨 힘이 있나요? 대형 할인점 점장이 너그러운 아량을 보여줄 때까지, 청소부 아줌마가 아가리 닥치고 착취와 수탈을 참아야 하나요?



편의점 점장이 여자 아르바이트 학생을 성 추행한다고 해도, 아르바이트 학생이 너그러운 윤리를 바라고 참아야 하나요? 가부장 문화는 계속 편견들과 세뇌들을 만들고, 학교 교육을 비롯해 사회화 과정은 이걸 사람들에게 주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인 윤리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제도권 교육, 사회 구조가 개인들을 압박한다면, 어떻게 개인적인 윤리가 거대한 사회 제도에 저항할 수 있나요? 사회 구조고 나발이고 개인적인 윤리가 최선입니까? 개인적인 윤리만 있다면, 인간이 굶지 않고 얼어죽지 않고 총알을 튕겨냅니까? 인간이 직장에서 해고되고 거리에 나앉는다고 해도, 인간이 오직 개인적인 윤리만으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나요? 개인적인 윤리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듭니까? 남자들이 여자들을 강간할 때, 여자들이 그저 윤리만 기다려야 합니까?


가부장 문화가 제도권 교육과 착취적인 경제 현상을 이용해 사람들을 억압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오직 개인적인 윤리만 바라봐야 합니까? 이건 개X랄 같은 헛소리입니다. 피지배 계급은 뭉치고 저항하고 사회 구조를 뒤엎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폭력적이고 피를 흘린다고 해도, 피지배 계급은 사회 구조에 도전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에서 얼마나 많은 지배 계급들이 스스로 권력을 포기했나요? 파리 코뮌 시민들이 무식한 야만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폭력적으로 싸웠나요? 자본가 계급이 정말 스스로 권력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인간과 윤리>는 집단 행동을 부정하고 오직 개인적인 선행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독자가 소설 <전갈의 아이>와 <인간과 우주>를 함께 읽는다면, 독자는 해답이 아니라 지배 계급에게 향하는 충성을 찾을 겁니다.



이건 모든 사람이 무조건 시위와 거리 행진에 참가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적극적인 운동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건 현실적으로 꽤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동 조합들을 지지할 수 있고 좌파 정당들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환경 운동가들을 비롯해 수많은 운동가들은 열악한 재정 상황을 겪습니다. 심지어 이건 개인 파산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시민 배당, 기본 소득을 지지한다면, 수많은 운동가들은 훨씬 부담 없이 운동에 매진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당장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실천들은 <전갈의 아이> 같은 비극을 막을 겁니다. 이런 실천들은 <태양이 없는 땅>과 <달 위를 걷는 느낌>과 <카본 다이어리 2015>를 막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과 우주>는 이걸 부정합니다. <인간과 우주>는 사회 구조보다 인간에게 죄를 묻습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를 용서하고 개인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부르주아 경제학 교과서들이 헛소리들을 늘어놓음에도, 왜 <인간과 우주>가 자본가 지배 계급보다 개인들에게 책임을 묻나요? 이게 권력의 나팔수와 무엇이 다른가요? 우리는 개인들보다 사회 구조와 지배 계급을 비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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