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유전자 조작 식물을 둘러싼 자본 문제 본문
소어 핸슨이 지은 <씨앗의 승리>는 교양 식물학 서적입니다. 저자는 식물이 어떻게 씨앗을 활용하고 널리 지구상에 퍼질 수 있었는지 이야기해요. 씨앗은 화두에 별로 오르는 요소가 아니나, 식물이 지구상에 퍼지는 과정에서 엄청난 공로를 세웠고, 아울러 인류에게 훌륭한 먹거리들을 제공했습니다. 가령, 두꺼운 코코넛 열매가 바다를 둥실둥실 항해하지 못했다면, 야자 나무들은 해안 지대에 퍼지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해안 사람들은 코코넛 열매를 먹지 못했을 테고, 해안 공동체들은 번성하지 못했겠죠.
후손을 퍼뜨리기 위해 식물들은 다양한 씨앗들을 개발했습니다. 도시락처럼 어떤 씨앗은 영양분을 듬뿍 갖추고 싹이 틀 때까지 오래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어떤 씨앗은 달콤하고 영양이 풍부한 과육으로 동물들을 유혹하고, 과육을 먹는 동물들은 씨앗을 멀리 옮깁니다. 어떤 씨앗은 동물에게 의지하는 대신 날개를 달고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과육은 씨앗을 퍼뜨리기 위한 요소이고,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동물들이 과육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씨앗 덕분입니다. 커피처럼 씨앗은 그 자체로 훌륭한 기호품이 되거나 사과처럼 씨앗을 담은 과일은 수많은 동물들을 매료시킵니다.
이렇게 <씨앗의 승리>는 평소 과일을 먹을 때 걸리적거리는 씨앗이 사실 얼마나 멋진 생존 전략인지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과일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과일은 맛있는 먹거리일 수 있으나, 식물에게 과일은 씨앗을 퍼뜨리는 매개체이자 운송 수단이죠. 과일을 씨앗의 연장선이라고 부른다면 비약이라고 해도 과일은 분명히 그런 역할을 맡았어요. 풍성하게 열린 과일들을 볼 때, 인간은 수확을 생각하겠으나, 나무에게 그건 번식과 운송이죠. <씨앗의 승리>는 씨앗(과 과일)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멋진 책입니다. 이런 책을 볼 때마다 저는 생명체들이 무궁무진하게 퍼지는 놀라운 활기를 되새기곤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볼 때, 몇몇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유전자 조작 식물을 언급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농부들은 씨앗 저장, 자연 수분, 그 밖의 오래된 전통들을 둘러싼 특허 문제에 직면했으며, 비판적 세력들은 각기 다른 종의 유전자를 혼합하는 데 따른 환경 문제, 건강 문제, 나아가 도덕적 문제에 대해 타당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씨앗은 현재 드론에서부터 유전자 복제, 그리고 핵무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떻게든 조정해보려고 애쓰는 테크놀로지와 혁신의 늘어가는 목록에 이름을 올린 상태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은 없지만…." (중략)
언뜻 본다면, 위의 문장은 평범한 주장들을 담은 것 같습니다. 사태를 객관적으로 명시하는 듯하죠. 하지만 저자는 환경 문제, 건강 문제, 도덕적 문제를 거론함에도 자본주의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유전자 조작 식물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원인이 거대 자본임에도 저자는 그걸 언급하지 않아요. 게다가 이는 별로 어렵거나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 유명한 몬산토 사례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누가 유전자 조작 식물들을 대량 생산할까요? 누가 유전자 조작 식물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을까요?
누가 유전자 조작 식물들을 가열하게 연구할까요? 일반적인 농민들인가요? 소규모 농민들이나 가난한 농민들이 유전자 조작 식물들을 대량 생산하거나 연구하거나 거기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나요? 아니죠. 거대 자본들이 그런 장본인들입니다. 과거 녹색 혁명이 그랬듯 거창한 식량 사업은 많은 생산량을 담보하는 만큼 많은 농민들을 파탄으로 몰아갑니다. 화학 비료에 의존하는 가난한 농민들은 대기업에게 매달려야 했고 그래서 자립하지 못했죠. 이는 거대 자본을 둘러싼 문제이고, 따라서 유전자 조작을 비롯한 식량 문제는 자본주의를 외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본주의에 관해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해결책'을 생각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무엇을 뜻하나요. 거대한 다국적 회사 사장과 가난뱅이 농부가 똑같은 사람인가요? 수탈을 반복하는 강대국 회사들과 수탈을 당하는 가난뱅이 시골 애엄마가 똑같은 입장인가요? 아니죠.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에 물든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입니다. 올림픽만 열리면 광고들은 모든 국민을 떠들기 바쁘나, 누군가는 환경 오염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고 누군가는 건물 꼭대기에서 농성합니다. 국민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은 똑같지 않아요.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안을 논의해야 한다면, 당연히 생존 위기에 몰린 밑바닥 계급을 우선 살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탈하는 계급과 수탈을 당하는 계급이 존재해요. 유럽인들이 북미 원주민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소어 핸슨이라는 인물과 <씨앗의 승리>라는 책은 존재하지 못했겠죠. 소어 핸슨은 이런 당연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씨앗의 승리>에서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를 몇 번 언급함에도 식민지 침략이나 지배 계급을 무심하게 넘어갑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이 책의 주제가 아닙니다. 저자는 그저 말미에서 잠시 유전자 조작 식물들을 언급했을 뿐이죠. 유전자 조작 식물은 <씨앗의 승리>에서 사소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사소하다고 해도 저는 저자가 자본주의에 너무 무심하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비단 이 책만 아니라 생물학이나 생태학 서적에 이런 생각들이 너무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자연계를 보존해야 하는 생물학자나 생태학자가 자본주의에 무심하다는 상황은…. 글쎄요, 사소하든 아니든, 저는 그런 사고 방식을 비판 없이 지나가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