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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우주선 바이오 돔과 '야생'이라는 개념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우주선 바이오 돔과 '야생'이라는 개념

OneTiger 2020. 6. 5. 19:40

[위 장면은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을 보여줍니다. 다른 세 개념들과 달리, 야생은 이질적입니다.]



위 그림은 비디오 게임 <벤처 아프리카> 스크린샷입니다. 이건 생태계 시뮬레이션이고, 그래서 위 스크린샷은 '생태 Eco'를 묘사합니다. 위 스크린샷에서 여러 동물들과 식물들은 어울리고, 태양은 빛과 열을 제공하고, 웅덩이는 수분을 제공합니다. 상단 인터페이스가 보여주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일정한 생물 다양성과 생물량에 도달해야 하고, 생물 다양성과 생물량은 생태계를 이룩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위 스크린샷을 보고 생태를 느낀다면,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동시에 위 비디오 게임 스크린샷은 '자연 Nature'이라는 개념을 포함합니다.


자연은 싱그러움, 풍요로움, 치유, 복원, 넉넉함, 원대함, 웅장함을 가리킵니다. 위 스크린샷은 싱그러운 녹색을 포함합니다. 생물량이 번성하기 때문에, 이건 풍요롭습니다. 빈 땅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비를 뿌리고, 웅덩이를 만들고, 여러 식물들과 동물들을 키우기 때문에, 이건 치유와 복원입니다. 생태계 속에서 식물들과 동물들이 배부르게 먹고 살기 때문에, 이건 넉넉함입니다. 드넓은 사바나 생태계는 원대하고 웅장합니다. '자연 생태계'라는 용어처럼, 생태는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생태와 자연은 비슷한 위상이고, 위 게임 스크린샷은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위 스크린샷을 보고 생태보다 자연을 느낀다고 해도,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생태를 느끼거나 자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시에 게임 플레이어는 '환경 Environment'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처럼, 환경 오염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여러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심지어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생태학자들은 여섯째 대멸종을 걱정합니다. 심지어 국립 멕시코 자치 대학의 생태학 연구소는 이미 여섯째 대멸종이 진행 중이라고 경고합니다. 환경 오염에서 생태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환경 오염이 자연 생태계에 피해를 직접 미치기 때문에, 환경 오염이 생물 다양성을 멸종시키기 때문에, 환경, 생태, 자연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합니다. 위 스크린샷은 환경 보호를 직접 주장하지 않으나, 아무리 위 스크린샷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환경 보호를 도출한다고 해도,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닐 겁니다. 동시에 위 스크린샷은 '야생 Wildlife'을 보여줍니다. 아프리카 코끼리는 야생 동물입니다. 더 이상 여기에 길다란 설명이 필요한가요? 어쩌면 가장 먼저 게임 플레이어는 위 스크린샷을 보고 다른 무엇보다 야생이라는 개념을 느낄지 모릅니다. 위 스크린샷은 비단 생태, 자연, 환경만 아니라 야생을 포함합니다.



<벤처 아프리카> 스크린샷이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을 포함하는 것처럼, 위 스크린샷에서 네 가지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처럼,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은 비슷한 위상들입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야생 동물 사진을 들어올리고 자연 생태계를 걱정하는 것처럼,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은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네 가지 개념들 중에서 야생은 다소 이질적입니다. 분명히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은 비슷한 위상들이고, 이것들은 함께 어울리나, 생태, 자연, 환경보다 야생은 다소 이질적입니다. 야생이 커다란 동물들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동물들은 야생을 상징합니다.


비디오 게임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동물원 건설/경영 게임입니다. 표지 그림과 공식 스크린샷들에서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호랑이를 비롯해 여러 야생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와일드라이프 파크>에서 야생 동물들은 핵심입니다. 만약 이 게임이 야생 동물들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만약 이 게임이 오직 야생 식물들만 늘어놓았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와일드라이프 파크>를 외면했을 겁니다. <와일드라이프 파크>를 비롯해 여러 동물원 게임들에서 핵심은 식물들보다 동물들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야생 식물들보다 야생 동물들을 배치하고 구경하고 관찰하기 원합니다.



1996년 <심파크>부터 2019년 <플래닛 주>까지, 표지 그림과 공식 스크린샷들에서 여러 동물원 게임들은 야생 동물들을 홍보합니다. <심파크>는 동물원 게임보다 국립 공원 게임이나, <와일드라이프 파크>가 야생 동물들을 홍보하는 것처럼, <심파크> 역시 야생 동물들을 홍보합니다. 만약 <심파크>가 오직 야생 식물들만 제시했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심파크>가 시시하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식물원 건설 게임보다 동물원 건설 게임은 훨씬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는 일반적인 동물원 게임보다 (복제) 공룡 사파리 게임입니다.


하지만 <심파크>와 <와일드라이프 파크>와 <플래닛 주>가 그러는 것처럼,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는 야생 식물들보다 야생 동물들(공룡들)을 늘어놓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와 트리케라톱스와 안킬로사우루스와 브라키오사우루스와 스피노사우루스와 케라토사우루스는 야생 동물들입니다. 이런 야생 동물들을 구경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들은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를 선택합니다. 만약 <오퍼레이션 제네시스>가 야생 동물들(공룡들)을 제외하고 오직 중생대 식물상만 제시했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를 외면했을 겁니다. 핵심은 야생 '동물'들입니다.



이건 식물 게임이 인기를 끌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 <플라워>가 많은 찬사들을 받는 것처럼, 식물 게임 역시 커다란 인기를 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식물들보다 동물들은 훨씬 커다란 인기, 거의 압도적인 인기를 끕니다. 비디오 게임 <압주>는 동물원/사파리 건설 게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압주>는 오픈 월드 생태계 게임에 가깝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잠수부를 조종하고 다양한 해양 생태계들을 방문합니다. 상어 조각상 위에서 주인공 잠수부가 명상하는 동안, 작은 표범 상어부터 심해의 대왕 오징어까지, 게임 시점은 수많은 야생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게임 시점은 야생 해초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주인공 잠수부는 수많은 야생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으나, 주인공 잠수부는 야생 해초들과 교감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잠수부는 야생 동물들을 부활(?)시키나, 야생 해초들은 부차적입니다. 신비로운 성역은 거대한 암모나이트, 대왕 오징어, 범고래, 쥐가리오를 보여주나, 신비로운 성역은 거대한 해초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신전 벽화는 백상아리가 숭배 대상이라고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압주>에서 거대한 해초보다 백상아리는 핵심 역할, 자연의 수호자 역할을 맡습니다. <와일드라이프 파크>와 <압주>는 야생 동물을 강조합니다.



[동물원 게임이 '와일드라이프'를 강조하는 것처럼, 야생은 거칠고 커다란 동물들을 가리킵니다.]



<심파크>와 <와일드라이프 파크>와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와 <압주>는 야생 동물들을 똑같이 강조합니다. '야생'이라는 개념에서 식물들보다 동물들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드루이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테이블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에게는 야생 형상(Wild Shape) 능력이 있습니다. 야생 형상은 동물 변신 능력을 가리킵니다. 드루이드는 야생 형상 능력을 이용하고 호랑이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야생 형상은 식물이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레벨이 올라간 이후, 야생 형상은 나무가 될 수 있으나, 야생 형상은 동물에 초점을 맞춥니다.


소설 <야생종>에서 주인공 안얀우는 변신술사입니다. 하지만 <야생종> 주인공 안얀우는 식물 변신술사가 아닙니다. 안얀우는 식물로 변신하기보다 동물로 변신합니다. 소설 표지 그림 역시 식물들보다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야생종>은 강렬한 야생 분위기를 풍기고, 안얀우는 식물 변신술사보다 동물 변신술사입니다. <심파크>와 <와일드라이프 파크>와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와 <압주>가 야생 동물들을 강조하는 것처럼,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야생종>에서 드루이드와 안얀우는 야생이 동물이라고 가리킵니다. 야생이라는 개념은 식물들보다 동물들입니다.



특히, 야생 동물은 거칠고 커다랗습니다.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호랑이를 보여주고, 호랑이는 거칠고 커다랗습니다. 만약 <와일드라이프 파크>가 오직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만 늘어놓았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와일드라이프 파크>를 외면했을 겁니다. 다른 동물원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오퍼레이션 제네시스>가 오직 작은 공룡들만 묘사했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를 외면했을 겁니다. <압주>에서 백상아리는 거칠고 커다란 야생 동물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드루이드는 호랑이로 변신하고, 호랑이는 거칠고 커다랗습니다.


<야생종>에서 안얀우는 토끼보다 표범으로 변신합니다. 토끼보다 표범은 '야생'이라는 분위기에 가깝습니다. 토끼보다 표범은 '야생'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토끼보다 표범은 '야생'이라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와일드라이프 파크>와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와 <압주>와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야생종>이 보여주는 것처럼, '야생'은 거칠고 커다란 동물입니다. 이건 언제나 '야생'이 거칠고 커다란 동물을 가리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생'은 아주 폭넓은 개념이고, 이것을 완벽하게 정의하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생'이 호랑이보다 다른 개념이라고 반박할 겁니다.



'야생'이 아주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아무리 '야생'이 호랑이보다 다른 뭔가를 가리킨다고 해도, 이건 오류가 아닙니다. 문학 평론가들이 문학을 완벽하게 정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SF 평론가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완벽하게 정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야생'은 고정적인 정의가 되지 못하고, '야생'은 호랑이보다 다른 뭔가를 가리킬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와일드라이프 파크>를 비롯해 여러 생태 문화들은 '야생'이 호랑이라고 가리킵니다. 야생이 커다란 동물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생태, 자연, 환경보다 야생은 다소 이질적입니다. 생태, 자연, 환경은 호랑이를 포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주선 내부 농장에서 바이오 돔 연구팀은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농장은 토러스-C와 토러스-D, 그리고 토러스-F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중략) 커다란 농장에서 보리와 유채의 새로운 꽃망울들은 눈부신 노란빛을 뽐냈고, 숲 구역과 일곱 공원들에는 봄에 걸맞는 나무들과 관목들이 들어찼다. 마야는 봄꽃들의 이런 다채로운 색깔들을 사랑했다. 숲 구역에서 나무들이 아주 무성히 자랐기 때문에, 한쪽 끝에서 다른 쪽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중략) 봄 기운 속에서 사람들은 돌아다녔다. 만물은 비옥했고, 꽃들은 만발했고, 주변에서 온통 초록빛은 흘러넘쳤다. 대기는 꽃향기 바람으로 가득찼다."



위 문구들처럼, 소설 <붉은 화성>은 우주선 바이오 돔을 묘사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화성을 개척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우주선 아레스에 탑승합니다. 우주선 아레스에는 바이오 돔, 농장, 공원이 있습니다. 숲 구역에서 울창한 나무들이 자라기 때문에, 숲 구역은 우주선보다 자연 환경에 가깝습니다. 우주선 숲 구역은 생태가 될 수 있습니다. 우주선 아레스에서 바이오 돔 전문가 히로코 아이는 생태학자입니다. 영양분들, 에너지들이 순환하기 때문에, 숲 구역에서 울창한 나무들은 자랍니다. 이건 생태입니다. 동시에 비옥하고 만발하고 싱그러운 초록빛은 자연입니다.


"숲 구역과 일곱 공원들에는 봄에 걸맞는 나무들과 관목들이 들어찼다. 만물은 비옥했고, 꽃들은 만발했고, 주변에서 온통 초록빛은 흘러넘쳤다." 이 문구들은 자연을 가리킵니다. 이 문구들은 싱그러움, 풍요로움, 넉넉함, 치유, 복원을 풍길 수 있습니다. 우주선이 제한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비록 우주선 숲 구역이 아주 웅장하지 않다고 해도, 비디오 게임 <스테이시스>에서 테아가 우주선 식물 구역을 예찬하는 것처럼, 숲 구역은 자연입니다. 동시에 이건 환경입니다. 만약 개척 과학자들이 기후 조절 장치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숲 구역에서 나무들은 초록빛을 뽐내지 못할 겁니다.



SF 장르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생물권(生物圈) 우주선은 환경 보호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바이오 돔을 포함하고, 바이오 돔은 식량들과 산소를 공급합니다. 바이오 돔은 폐쇄 생태계입니다. 우주선 사람들은 지속 가능한 순환에 치중해야 합니다. 만약 우주선 사람들이 토양을 너무 고갈시키거나, 부산물을 토양에 돌려주지 않거나, 온도를 너무 낮추거나 올린다면, 이건 바이오 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테고, 바이오 돔 생태계는 망가질 겁니다. 바이오 돔이 식량들과 산소를 공급하기 때문에, 오랜 동안, 우주선에서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바이오 돔 생태계가 망가진다면, 우주선 사람들 역시 살아가지 못할 겁니다. 우주선 환경들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이건 바이오 돔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다시 이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피해를 미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생물권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건 어떻게 생물권과 인류 사회가 관계를 맺는지 강조하고 과장합니다. 환경 사회학에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 흥미로운 모식도입니다. 비록 공식적인 환경 사회학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주된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우주선 바이오 돔은 흥미롭습니다.



[바이오 돔은 생태, 자연, 환경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야생 호랑이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환경 사회학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지구 생물권과 인류 문명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바이오 돔과 우주선 사람들이 긴밀하게 얽히는 것처럼, 지구에서도 자연 생물권과 인류 문명은 긴밀하게 얽힙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에서 가장 지배적인 경제 영역은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 창출만 추구하고, 자본주의는 자연 생물권을 상품, 교환 가치 생산 자원이라고 간주합니다. 자연 생물권이 상품이기 때문에, 오직 교환 가치만 창출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일방적으로 수탈하고 생물권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생물권은 황폐해집니다.


19세기 후반에 카를 마르크스는 토양 고갈 사례들을 검토했고 자본주의가 생물권-인류 사회 관계를 악화시킨다고 판단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생물권-인류 사회 관계를 악화시키기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공산주의 사회는 생물권-인류 사회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연 생태계 순환은 핵심이 됩니다. 에코 페미니즘 서적 <자연의 죽음>에서 캐롤린 머천트는 오직 초기 마르크스만 자연 생태계 순환을 걱정했다고 설명하나, 비단 초기 마르크스만 아니라 '후기' 마르크스 역시 자연 생태계 순환을 계속 걱정했습니다.



후기 마르크스가 공식적인 생태학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캐롤린 머천트가 오해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카를 마르크스가 생태학을 무시했다고 비판합니다. 심지어 테드 벤튼과 제이슨 무어 같은 생태 사회주의자들조차 카를 마르크스가 생태학을 무시했다고 비판합니다. 심지어 존 몰리뉴 같은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조차 과학 기술이 무한하게 발달하기 때문에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을 무한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과학 만능주의입니다. 존 몰리뉴가 과학 만능주의에 빠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과학 만능주의라고 비판합니다.


분명히 한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과학 만능주의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바꿨다고 강조하기 위해 마르크스/엥겔스는 과학 만능주의를 드러냈습니다. 비록 카를 마르크스가 공식적인 생태학 저술들을 출판하지 못했다고 해도, 여러 기록들과 서신들은 카를 마르크스가 생태학(토양 고갈, 생태계 순환, 생물권-인류 사회 관계)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다고 증명합니다. 20세기 동안, 사람들이 오직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출판 저술들만 연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르크스/엥겔스가 과학 만능주의라고 비판하나, 여러 기록들은 이게 오해라고 증명합니다.



환경 전문가들은 인류 사회가 생물 다양성을 파괴했기 때문에 코로나 19 같은 전염병 사태가 판데믹 등급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인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킵니다. 자본주의가 오직 이윤 창출만 추구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연 생물권을 상품이라고 간주하고, 자연 생물권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자본주의 환경 오염입니다.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을 일으켰기 때문에, 코로나 19 사태는 대대적인 환경 재난이 되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생물권-인류 사회를 악화시킨다고 비판했고, 마르크스주의는 코로나 19 사태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생태 사회주의자들조차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이른바 MEGA)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코로나 19 사태를 비판하지 못하는 것 같으나, 만약 캐롤린 머천트가 후기 마르크스 기록들을 읽는다면, 캐롤린 머천트는 후기 마르크스가 코로나 19 사태를 비판할 수 있다고 인정할 겁니다. 이렇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지구 생물권과 인류 문명을 강조하고 과장할 수 있습니다. 환경 사회학에게 이건 흥미로운 연구일 겁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우주선 아레스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아니나, 우주선 아레스 역시 바이오 돔 전문가와 농장과 공원들을 포함합니다.



만약 우주선 아레스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기후 조절 장치를 함부로 조작한다면, 바이오 돔 전문가 히로코 아이는 악화된 우주선 환경이 농장과 공원들, 숲 구역을 망친다고 비판할 겁니다. 히로코 아이가 폐쇄 생태계에서 모든 것이 바뀐다고 읊조리는 것처럼, 생태와 환경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주선 아레스에서 바이오 돔, 농장, 공원, 숲 구역은 생태, 자연, 환경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은 비슷한 위상들입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이 생태, 자연, 환경을 가리킬 수 있고,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이 비슷한 위상들이기 때문에, 우주선 바이오 돔이 야생을 가리킬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우주선 숲 구역은 생태, 자연, 환경을 가리키나, 이건 야생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동물원 게임 <와일드라이프 파크>부터 SF 소설 <야생종>까지, 여러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야생은 사납고 커다란 동물을 가리킵니다. '야생종' 주인공 안얀우는 표범으로 변신합니다. 우주선 숲 구역에서 표범이 서식할 수 있나요? 만약 우주선 숲 구역에서 표범이 서식한다면, 표범은 개척 과학자들을 습격할지 모르고, 숲 구역은 붉은 피를 볼 겁니다. 제노모프 에일리언의 별명은 Star Beast이나, 제노모프보다 우주선 숲 구역에서 표범은 문자 그대로 Star Beast가 될 겁니다. 표범은 우주선 바이오 돔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주선이 넓다고 해도, 우주선이 제한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우주선 바이오 돔에서 표범은 서식하지 못할 겁니다. 동물원이 감옥인 것처럼, 우주선 바이오 돔은 감옥일 겁니다. 표범은 포식자이고, 포식자는 넓은 영역을 요구합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이 넓은 영역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포식자 표범에게 우주선 바이오 돔은 감옥이 됩니다. 여러 관점들에서 우주선 바이오 돔은 표범을 키우지 못하고, 표범이 '야생'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주선 바이오 돔은 야생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우주선 아레스는 생태, 자연, 환경을 가리킬 수 있으나, 이건 야생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 초반부는 생태, 자연, 환경을 묘사할 수 있으나, 이건 야생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 초반부와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어울리지 않고, 소설 <붉은 화성> 초반부와 <야생종>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이 비슷한 위상들이라고 해도, 생태, 자연, 환경보다 야생은 훨씬 까다롭고 이질적인 개념입니다. 하지만 야생이 까다롭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야생은 매력적입니다. SF 장르에서 상급 인공 지능 같은 비인간 존재는 커다란 재미를 선사합니다. 비인간 존재가 이질적이기 때문에, 비인간 존재는 커다란 재미를 선사합니다.



[호랑이는 매력적인 '야생'입니다. 호랑이와 함께, 우리는 생태, 자연, 환경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만약 비인간 존재가 인간과 비슷하다면, 만약 비인간 존재가 이질적이지 않다면, SF 장르는 재미를 잃을 겁니다. 만약 비인간 존재가 이질적이지 않다면, 왜 독자들이 주류 문학보다 SF 소설을 읽을까요? 이질적인 것은 매력적입니다. 야생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태, 자연, 환경보다 야생이 훨씬 까다롭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야생은 매력적입니다. 울창한 삼림과 솔라펑크 도시(생태, 자연, 환경)는 매력적이나, 만약 울창한 삼림 속에서 호랑이가 돌아다닌다면, 만약 솔라펑크 도시에서 사람들과 야생 동물들이 함께 살아간다면, 이건 훨씬 매력적일 겁니다.


소설 모음집 <곰과 함께>에서 곰은 야생 동물입니다. <곰과 함께>는 자연 문학들을 선보이나, 곰은 생태, 자연, 환경보다 야생입니다. '곰과 함께'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야생은 매력적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해석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인류보다 자연 환경은 원초적입니다.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은 인위적인 구분입니다. 이것들은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물들 역시 야생을 상징할 수 있다고 주장할 테고, 이 주장은 틀리지 않습니다.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이 인위적인 구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다양하게 조합할 수 있습니다.



밸 플럼우드 같은 에코 페미니즘은 사회/자연 이원론을 경계합니다. 제이슨 무어는 사회/자연 이원론이 자본/노동, 백인/원주민, 문명/야만, 남자/여자 같은 이원론에 기반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원론들은 심각한 차별, 착취, 수탈을 정당화합니다. 서구 백인 남자 자본가는 우월합니다. 제3세계 원주민 여자 노동자는 열등합니다. 우월한 것은 열등한 것을 수탈합니다. 이건 근대화, 경제 발전입니다. 심지어 얄팍한 진보들과 자칭 페미들조차 이게 경제 발전이라고 떠받듭니다. 노동, 자연, 원주민, 여자는 동일한 범주이고, 자본, 백인, 문명, 남자는 이것을 착취합니다.


아무리 자본, 백인, 문명, 남자가 노동, 자연, 원주민, 여자를 착취한다고 해도, 이건 정당합니다. 이게 근대화, 경제 발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원론들은 코로나 19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생태, 자연, 환경, 야생이 인위적인 구분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개념들 역시 심각한 차별, 착취, 수탈을 정당화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개념들을 사용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이원론을 경계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에코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는 대립하나, 이 지점에서 <자연의 죽음>과 <마르크스의 생태 사회주의>는 손을 잡을지 모릅니다.



※ 수마트라 호랑이 사진 출처: Bernard Spragg. NZ,

https://www.flickr.com/photos/volvob12b/91228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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