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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지상주의로서 전신 성형 수술 본문

SF & 판타지/개조 생명체들

외모 지상주의로서 전신 성형 수술

OneTiger 2019. 5. 6. 19:24

스콧 웨스터펠드가 쓴 <어글리>, <프리티>, <스페셜>은 예쁜이 수술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수술을 받고 문자 그대로 예쁜이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정한 연령에 도달할 때, 사람들은 전신 성형 수술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예쁜이들이 되고 못생긴 외모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예쁜이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왜 사람들이 예쁜이 수술을 받아야 하나요? 못생긴 외모가 죄악인가요?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워지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추구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사회 구조가 이런 욕구에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사실 사회 구조는 이런 욕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 자체로서 외모 지상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 자체로서 외모 지상주의가 존재한다고 해도, 분명히 사회 구조는 외모 지상주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우리가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비단 심리적인 문제만 아니라 사회 구조를 함께 들여다봐야 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어글리>, <프리티>, <스페셜>은 사회 전체가 예쁜이를 추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글리>, <프리티>, <스페셜>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아예 새로운 사회, 가상의 사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가상의 사회를 이미 존재하는 사회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독자가 두 사회를 비교하는 동안, 독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회를 떠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회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일상이 문제라고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미 우리가 일상에 동화했기 때문에, 일상이 문제라고 해도, 우리는 그걸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가상의 사회를 제시하고 우리를 일상에서 밀어냅니다.


SF 독자는 일상을 떠나고, 새로운 사회 속에서 SF 독자는 일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SF 독자는 일상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이건 SF 독자가 반드시 일상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좋은 도구이나, 이건 절대적인 각성제가 아닙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빨간약을 먹고, 각성하고, 세뇌와 편견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뇌를 깨뜨리고 싶다면, 우리는 빨간색을 추구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SF 독자가 일상에 너무 심각하게 동화되었다면, 아무리 SF 소설이 독자를 일상에서 밀어낸다고 해도, 독자는 쉽게 새로운 사회로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SF 소설을 읽기는 까다롭습니다. 독자가 일상을 떨쳐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SF 작가 역시 일상에 너무 심각하게 동화되었을지 모릅니다. SF 작가가 너무 일상에 동화되었다면, SF 작가가 소설을 쓰고 가상의 사회를 제시한다고 해도, 가상의 사회 역시 일상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독자가 이런 사회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독자는 일상을 새롭게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무엇보다 현실은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현실은 아주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현실은 오른쪽으로 크게 쏠렸습니다. 심지어 중립조차 오른쪽으로 곤두박질칩니다. 숱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립을 지킨다고 외치나,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립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중립은 오른쪽으로 굴러떨어집니다.


SF 작가가 정말 중립을 지키고 싶다면, SF 작가는 왼쪽을 향해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나도록 뛰어야 합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이 정말 왼쪽을 향해 달릴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에코 페미니스트들조차 오른쪽으로 기울어집니다. 토니 클리프를 보세요. 토니 클리프는 아주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하지만 토니 클리프는 레프 트로츠키를 들먹이고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합니다. 분명히 레프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 연방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이 사회주의 노선에서 탈선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자들은 탈선한 소비에트 연방을 다시 사회주의 노선에 복귀시켜야 합니다.



분명히 레프 트로츠키는 전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런 것을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토니 클리프는 트로츠키 이름에 먹칠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합니다. 토니 클리프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심지어 아주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조차 보수 우파를 편듭니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보수 우파를 편드는 상황에서 SF 작가들이 정말 새로운 사회를 제대로 제시할 수 있습니까? SF 작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배적인 관념을 떠받들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숱한 SF 작가들은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이 가상의 사회들을 제시한다고 해도, 가상의 사회들을 자본주의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합니다.


SF 비평가는 이런 상황을 지적해야 합니다. SF 비평가는 무슨 상황이 SF 소설을 만드는지 지적해야 합니다. SF 비평가는 SF 작가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배적인 관념에게 헬렐레 웃는다고 따져야 합니다. SF 작가, SF 소설, SF 독자, SF 비평가는 이런 관계들을 맺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절대적인 각성제가 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절대적인 빨간약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빨간약이 없습니다. 작가와 독자와 비평가가 지배적인 체계를 향해 꾸준히 항거할 때, 사이언스 픽션은 빨간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위대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반드시 빨간약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위대한 잠재력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해요. <어글리>, <프리티>, <스페셜>은 가상의 사회를 제시하고, 독자는 가상의 사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독자는 등장인물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이건 독자가 등장인물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화(同化)와 사회적인 관계는 다릅니다. 독자가 등장인물에게 동화한다면, 독자는 자신을 잃을 겁니다. SF 소설 속에 디스토피아가 있고, 독자가 디스토피아 등장인물에게 동화한다면, 독자는 도구로서 디스토피아 사회를 이용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동화, 감정 이입은 절대적인 미덕이 아닙니다. 독자가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때, 독자가 도구로서 디스토피아 사회를 이용할 때, 사이언스 픽션은 좋은 수단이 될 겁니다. 독자는 가상의 사회를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어글리>, <프리티>, <스페셜>이 가상의 사회를 제시할 수 있나요? 왜 다른 장르 소설들보다 SF 소설이 독자를 일상에서 멀리 밀어낼 수 있나요? 왜 다른 장르 소설들보다 SF 소설이 가상의 사회를 훨씬 파격적으로 제시할 수 있나요? SF 소설이 근대적인 진보를 과장하기 때문입니다.



18세기 이후, 근대적인 진보는 세계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 일상이 근대적인 진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근대적인 진보를 새삼스럽게 깨닫지 못합니다. 이미 우리는 근대적인 진보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근대적인 진보가 바뀐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적인 진보를 과장합니다. 19세기 유럽에서 근대적인 진보가 유럽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때,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하늘에서 근대적인 진보가 뚝 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적인 진보가 바뀔 거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글리>, <프리티>, <스페셜>은 전신 성형 수술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전신 성형 수술은 근대적인 진보에 속합니다. 20세기 사람들과 달리, 중세 유럽 사람들이 전신 성형을 꿈꾸고 싶다면, 그들은 마법이나 신의 기적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똑똑한 개조 동물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제 SF 소설은 전신 성형 수술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 이외에 다른 매체들과 장르들 역시 전신 성형 수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스즈키 유미코가 그린 <미녀는 괴로워>는 전신 성형 수술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만화 <미녀는 괴로워>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분명히 <미녀는 괴로워>는 전신 성형 수술을 보여줍니다. 이건 거의 인체 마개조 수준입니다. 이런 수술이 일상적인가요, 아니면 비일상적인가요? 우위썬(오우삼)이 감독한 영화 <페이스 오프>는 전신 성형 수술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페이스 오프>는 등장인물이 성형 수술로 얼굴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만약 이게 가능하지 않다면, <페이스 오프>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만화 <미녀는 괴로워>와 영화 <페이스 오프>가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나요?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SF 팬들은 <미녀는 괴로워>에서 비일상적인 상상력(전신 성형 수술)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개그 분위기가 너무 강하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녀는 괴로워>는 SF 울타리에 쉽게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미녀는 괴로워>에서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하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전신 성형 수술을 빙자한 인체 마개조)은 중요합니다. 만약 요정 대모가 마법으로 만화 주인공 칸나즈키 칸나를 아름답게 바꿨다면, 만화 분위기는 꽤나 바뀌었을 겁니다. 요정 대모나 램프의 지니나 금지된 마도서가 아니라 전신 성형 수술이 칸나를 바꿨기 때문에, <미녀는 괴로워>는 외모 지상주의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램프의 지니가 칸나를 바꿨다면, 만화 독자들은 외모 지상주의보다 어떻게 램프의 지니가 나타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여겼을 겁니다.



만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중요한 것은 전신 성형 수술보다 외모 지상주의입니다. <미녀는 괴로워>보다 <어글리>, <프리티>, <스페셜>은 사이언스 픽션에 훨씬 가깝습니다. <미녀는 괴로워>는 SF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하겠으나, 문제 없이 세 소설들은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미녀는 괴로워>처럼, 세 소설들에서 외모 지상주의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왜 외모 지상주의가 화두가 되나요? 왜 외모 지상주의가 문제가 되나요? 사이언스 픽션이 근대적인 진보를 과장하기 때문에, 외모 지상주의를 파악하기 위해 SF 독자는 근대적인 진보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대적인 진보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떨어지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근대적인 진보의 어둡고 폭력적인 측면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수많은 것들은 상품이 됩니다. 외모 역시 상품이 됩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은 연예인이 되고 엄청난 인기와 부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인기보다 부유함은 훨씬 근본적일지 모릅니다. 연예인들은 비싼 옷을 입고,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비싼 무대에서 공연합니다. 이 막대한 부유함이 어디에서 비롯합니까? 어떻게 연예인들이 비싼 옷, 비싼 화장품, 비싼 무대 설비를 누릴 수 있습니까? 지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도, 자연 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됨에도, 왜 사회적인 부가 가난한 사람들과 오염된 자연 환경보다 연예인들에게 몰립니까?



연예 사업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혁명과 성 해방과 환경 운동이 자본주의와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혁명, 성 해방, 환경 운동을 억압하고 짓밟습니다. 만약 사회적인 부가 사회주의 혁명, 성 해방, 환경 운동으로 흐른다면, 연예 사업은 막대한 부를 함부로 낭비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연예인들이 예쁘고 멋지게 꾸미고 싶다고 해도, 막대한 부유함 없이, 연예인들은 꾸미지 못합니다. 연예인들이 제대로 꾸미지 못한다면, 외모 지상주의 역시 약해질 겁니다. 이건 외모 지상주의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연예 사업이 흥청망청 사회적인 부를 착취하지 못한다면, 연예인들 역시 제대로 꾸미지 못할 테고, 외모 지상주의는 아주 약해질 겁니다. 우리가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연예 사업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외모 지상주의를 부채질한다고 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걸 간과한다면, 우리는 외모 지상주의를 제대로 지적하지 못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그렇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자본주의 경제를 맹금의 눈빛으로 노려봐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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