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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인 구달은 사회 체계를 비판하지 않는가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왜 제인 구달은 사회 체계를 비판하지 않는가

OneTiger 2017. 8. 25. 20:24

8월 10일, 유명한 동물학자 제인 구달과 우리나라의 최재천 교수가 만났다고 합니다. 두 학자는 에코 토크 콘서트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는군요. 저는 그 대화를 직접 듣지 못했으나, 그 대화를 다루는 과학 기사를 몇 편 읽었습니다. 제인 구달은 현재의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위기를 크게 우려하고, 인류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포기하지만, 구달은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노력합니다. 구달도 나이가 상당히 많죠.


어쩌면 언젠가 구달의 부고를 들을지 모르겠어요. 이런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학자이자 환경 보호론자가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런 인물이 좀 더 많아야 사람들도 좀 더 자연 환경에 시선을 돌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기사를 읽지 못했군요. 한편으로 안타까운 점이 또 하나가 있습니다. 구달이 각 개인들의 실천만 강조하고, 체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달은 끊임없이 개인들의 실천만 강조합니다. 각 개인들이 삶을 바꿔야 하고, 좀 더 검소해야 하고, 윤리적인 생활을 하고, 기타 등등….



전부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인 구달의 가르침은 소중하고 따스합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애쓰는 그 모습은 환경 보호론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겁니다. 문제는 구달이 전체를 직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반쪽만 바라보는 중이죠. 개인들이 윤리적인 생활을 한다면, 당연히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그저 개인들만의 문제일까요. 개인이 인류 문명의 주체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개인만큼 사회는 인류 문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함께 고려할 때, 인류 문명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은 피라미드나 스핑크스를 볼 때, 파라오의 위대함을 상기합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혼자 그걸 짓지 않았습니다. 파라오가 수많은 노예들을 부리지 못했다면, 그런 건축물을 짓지 못했겠죠. 인류 문명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비롯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사회적 관계들을 외면한다면, 인류 문명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겁니다. 흑인은 노예라는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되었습니다. 그건 흑인이 태생적인 노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오랜 동안 흑인을 노예로 부렸기 때문입니다. 흑인은 태생적인 노예가 아닙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노예가 됩니다.



작금의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달은 개인적인 윤리만 강조했으나, 우리는 사회적 관계 또한 살펴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들이 뭘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와 대의 제도입니다. 이 두 가지는 현대 문명, 그 중에서 강대국들(유럽과 북미, 동아시아 등)의 문명을 지배합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살기 원한다면, 대기업들과 정치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환경 오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개인들은 환경을 보존하기 바랄지 모르나, 대기업들의 목표는 자연 환경이 아닙니다. 단기적이고 막대한 이윤입니다. 기업이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이유는 이윤입니다. 이윤을 쌓지 못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 기업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유 시장은 그런 기업을 제거하겠죠. 그리고 정치인들은 자본주의에 의존합니다. 정치인들은 자본가 개개인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나, 자본주의 자체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정치인들이 자본주의 체계를 통제한 적은 한 번도 없죠. 따라서 개인들이 윤리적으로 생활하고 싶어도 현재 상황에서 그게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와 대의 제도. 이 두 가지 요소가 너무 막강하기 때문에. 저는 특히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광고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현대 문명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절대 광고와 떨어지지 못합니다. 사방 천지에 광고들이 깔렸습니다. 각종 신문들,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방송, 인터넷 포탈 사이트, 길거리의 각종 현수막들, 전단지들…. 이런 광고들은 소비만이 미덕이라고 칭송하고, 소비가 선의이자 정의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사람들은 광고 속에서 자라고 광고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개인들이 윤리적인 생활을 실천할 수 있겠어요. 사람들은 눈을 뜨는 순간, 수많은 광고들과 마주칩니다. 잠이 들기 전까지 우리는 광고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광고들의 홍수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광고와 자유 시장과 대기업의 논리가 가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윤리적인 생활 속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보가 쉬울까요. 게다가 자유 시장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온실 가스를 뿜고 숲을 밀어냅니다. 제인 구달이 개인들의 행동을 강조하는 그 순간마저 자유 시장은 계속 숲을 밀어냈을 겁니다. 따라서 이건 개인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다시 조명해야 합니다. 완전히 보편적인 기본 소득이나 직접 민주주의 같은 방법들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저는 제인 구달의 이야기를 모두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과학 기사만 읽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구달은 자유 시장을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깨야 한다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과학 기사가 그걸 편집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개인들의 윤리만 강조하는 그 기사의 요지를 비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다시 조명하지 않는다면, 개인들의 윤리는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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