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왜 아라크니드는 개미가 아니라 거미인가 본문
소설 <스타쉽 트루퍼스>는 인류 군대와 아라크니드 군대가 벌이는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뭐, 사실 인류와 아라크니드 사이의 전쟁은 둘째이고, 로버트 하인라인은 소설 주인공이 위대한 군인으로 성장하는 모습만 열심히 묘사하죠. 하인라인은 전쟁보다 위대한 군인을 보여주기 원했고, 그래서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온갖 훈련소들과 병영들과 사관 학교들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숱한 연설들을 쏟아붓고, 왜 시민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보호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군국주의라고 오해하나, 이는 군국주의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하인라인은 그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물론 아무리 공동체를 지키자고 말해도 계급 구조를 고려하지 않는 사고 방식은 군국주의로 이어지기 쉽고, 그래서 저는 하인라인이 잘못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자유주의는 별로 문제가 없는 것 같으나,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어쨌든 <스타십 트루퍼스>가 자발적인 군인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아라크니드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적어도 후대 작가들은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죠.
아라크니드는 거미강이라는 뜻이고, 소설 주인공 역시 아라크니드가 거미와 비슷하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아라크니드는 거미보다 개미와 비슷합니다. 겉모습은 거미와 비슷할지 몰라도 사회 습성은 개미 같습니다. 아라크니드는 사회성 동물입니다. 어마어마한 무리를 짓고, 그래서 인류 군대와 전쟁을 벌입니다. 진짜 거미는 그렇게 사회를 이루지 않습니다. 아라크니드가 진짜 거미처럼 단독으로 생활했다면, 애초에 인류 군대와 치고 박지 못했을 겁니다. 아라크니드들은 인류 군대에게 각개 격파를 당했겠죠.
게다가 아라크니드 무리에는 여왕이 있습니다. 여왕은 생산을 담당합니다. 마치 여왕 개미가 수많은 알들을 낳는 것처럼 여왕 계급은 수많은 아라크니드들을 낳습니다. 게다가 병정 개미와 일개미처럼 병정 아라크니드와 일꾼 아라크니드가 존재합니다. 철저한 계급 사회죠. 병정 아라크니드는 아주 무시무시한 적군이나, 일꾼 아라크니드는 싸울 줄 모릅니다. 인간 병사가 보여도 일꾼 아라크니드는 무식하게 노동에만 집중합니다. 아라크니드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무리만 열심히 보호합니다.
이처럼 아라크니드는 거미보다 개미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스타십 트루퍼스>보다 게임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보다 고증을 잘 살렸을지 모르겠어요.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 등장하는 클락콘 종족은 개미처럼 생겼습니다. 아니, 그냥 커다란 개미를 외계인이라고 우기죠.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인류 군대가 정말 아라크니드의 사회 구조를 고려했다면, 인류 군대는 절지류 외계인을 아라크니드가 아니라 포르미키드라고 불러야 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결국 개미가 아니라 거미가 되었고, 다들 거미들이라고 부르죠.
그렇다면 왜 로버트 하인라인은 절지류 종족을 아라크니드라고 불렀을까요. 왜 개미 같은 절지류 종족을 거미라고 불렀을까요. 음, 이는 근거가 없는 추측이나, 저는 이유는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거미가 개미보다 혐오스럽기 때문이죠. 아마… 하인라인은 자랑스러운 인류 군대와 싸우는 적군을 혐오스럽게 포장하기 원했을 겁니다. <영원한 전쟁>을 비롯한 반전 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에서 적군(외계 종족)은 무조건 혐오스러워야 합니다. 적군이 혐오스럽지 않다면, 병사들은 적군을 동정할지 모르고, 하인라인이 대견하게 떠드는 이상적인 군인은 사라지겠죠.
<영원한 전쟁>에서 소설 주인공은 적군 외계 종족 토오란에게 동정을 느낍니다. 자신이 토오란을 무차별적으로 죽여야 하는지 회의하죠. 이런 감성은 전쟁을 반대하고, 군대 역시 반대합니다. 하지만 <스타십 트루퍼스>는 이런 감성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철두철미한 군인이 되도록 전쟁에 동정심이나 연민은 절대 끼어들면 안 됩니다. 만약 군인이 적군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 그 사람은 철두철미한 군인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후안 리코가 아라크니드에게 동정을 느낀다면, 당연히 군대에 회의적일 테고, 하인라인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입대해야 한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지 못하겠죠.
병사들이 적군에게 연민을 느끼는 순간, 군대는 무너집니다. (그래서 수많은 지휘관들은 명령만을 강조하죠. 병사들이 적군들을 죽여도 지휘관은 그게 명령일 뿐이라고 둘러대죠.) 하인라인은 그런 상황을 반드시 피해야 했고, 그래서 징그러운 아라크니드를 집어넣었을 겁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이는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고, 하인라인이 이런 설정을 의도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대충 아라크니드를 집어넣었을지 몰라요. 저는 작가가 무슨 의도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아라크니드가 징그럽고, 덕분에 아무도 적군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벌레 종족은 편리합니다. 마음껏 죽이고 살육을 옹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 속에서 수많은 우주 해병들은 수많은 절지류 외계인들을 신나게 학살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