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펠루시다>와 <워해머>의 파충류 종족과 공룡 본문
[게임 <워해머: 토탈 워>의 공룡…. 이런 공룡들은 아득하고 원시적인 측면을 상징할 수 있어요.}
쥘 베른은 소설 <지구 속 여행>에서 아련한 원시 세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지하 탐사대 세 사람들은 지구 속을 여행하고, 가물거리는 환상 속에서 거대한 매머드를 목격하죠. 그 뿐만 아니라 호수에서 거대한 두 수중 파충류가 싸우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쥘 베른은 저 깊고 깊은 지하 속에 공룡 시대가 살아있다고 이야기했고, 이런 설정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왜 쥘 베른은 하필 지하 세계에 선사 동물들이 살았다고 설정했을까요. 다른 이유들도 있겠으나, 저는 공룡을 비롯한 선사 동물들이 풍기는 이미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룡(으로 대표되는 고대 동물들)은 (이름 그대로) 아주 오래 전에 멸종한 동물들입니다. 고생물학자들은 현생 조류가 공룡이라고 말하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까치에게서 공룡을 연상하지 못하겠죠. 공룡은 머나먼 옛날에 살았던 존재이고, 과거를 상장하는 존재입니다. 원시인들과 공룡들이 어울리는 사이언스 판타지는 엉터리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유행하는 이유는 원시인과 공룡 모두 과거를 상징하기 때문일 겁니다. 현대인이 상상하지 못하고 친숙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아득한 과거. 어쩌면 쥘 베른은 이런 이미지에 주목했을지 모르고, 원시 수중 파충류들이 지하 세계를 더욱 신비하게 꾸밀 거라고 여겼을지 모르죠.
쥘 베른이 뭐라고 생각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베른이 저런 이미지를 아예 외면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딱히 근거는 없으나, 공룡은 지하 세계와 꽤나 잘 어울리는 소재입니다. 지하 세계는 이질적으로 아련한 느낌을 풍겨야 했고, 그래서 원시 파충류는 더없이 적절한 소재였을 겁니다. 그래서 에드가 버로우즈도 펠루시다를 고대 파충류들이 득실거리는 장소로 묘사했을 겁니다. 에드가 버로우즈 같은 사이언스 판타지 작가가 펠루시다와 고대 파충류들을 묘사했듯 검마 판타지들 역시 공룡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특히, 검마 판타지는 고대 문명이라는 설정을 좋아하고, 공룡은 이런 고대 문명을 부각할 수 있는 소재입니다. 공룡 자체가 풍기는 그 아득하고 원시적인 이미지는 고대 문명과 훌륭하게 결합할 수 있어요. 가령, 게임 <네버윈터 나이츠>에는 고대 파충류 종족이 등장합니다. 이 파충류 종족은 다른 종족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고, 그래서 어마어마한 비밀을 감추었습니다. 이 게임이 파충류 종족을 아주 오래된 고대 종족으로 설정한 이유는 공룡을 비롯한 파충류들이 풍기는 이미지 때문일 겁니다. <물에 잠긴 세계>에서 바다 이구아나와 바다 악어가 고대로 통하는 창문이 되는 것처럼 <네버윈터 나이츠>는 고대 파충류 종족을 바라봅니다.
미니어처 게임 <워해머> 역시 비슷하죠. 도마뱀인 종족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다른 엘프나 드워프 종족은 도마뱀인들에게 비할 바가 못 됩니다. 고대 종족답게 도마뱀인들은 오래된 비밀을 수호해요. 게다가 이 도마뱀인들은 공룡들을 공성 병기로 이용하죠. 거대한 수각류들이 엘프들에게 달려들거나 뿔용들이 드워프들에게 돌진하거나 익룡들이 언데드들을 습격하거나…. 즉, 게임 제작진은 공룡이 풍기는 이미지를 도마뱀인들에게 접합시켰고, 공룡을 부리는 도마뱀인들이 고대 종족답게 오래된 비밀을 수호한다는 뜻입니다. <네버윈터 나이츠>에 나온 파충류 종족과 <워해머>에 나온 도마뱀인들은 별로 다른 맥락이 아닐 겁니다.
비록 양쪽은 설정이 다르나, 공룡(을 포함하는 파충류들)이 오래 묵었다는 이미지를 차용했어요. 그리고 이런 설정의 흔적을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 같은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찾아볼 수 있고, 쥘 베른은 초기 사이언티픽 로망스 시절에 그런 설정을 이용한 작가들 중 하나죠. 쥘 베른이 <네버윈터 나이츠>나 <워해머>에 영향을 끼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쥘 베른과 도마뱀인들은 아무 관련이 없어요. 하지만 쥘 베른은 공룡이라는 고대의 이미지를 활용한 초기 장르 작가들 중 하나이고, 그런 관점에서 <워해머>에 등장한 도마뱀인들을 살펴볼 수 있겠죠. (제임스 발라드 역시 이런 시각을 이용했고요. 바다 이구아나와 열대 바다와 공룡 시대를 연결하는 솜씨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에드가 버로우즈 역시 고대 도마뱀 종족을 이야기했습니다. 펠루시다에 도마뱀처럼 생긴 종족들이 있고, 그들과 인간들이 충돌한 적이 있죠. 원시적인 지저 세계를 이야기하는 만큼, 버로우즈는 도마뱀 종족을 빼놓지 못했나 봅니다. 흠, 펠루시다가 <네버윈터 나이츠>나 <워해머>에 영향을 미쳤는지 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에드가 버로우즈가 워낙 유명한 만큼, 뭔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요. 뭐,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나 로버트 하워드 역시 비슷한 설정을 써먹었어요. 러브크래프트나 하워드가 공룡(을 포함한 파충류들)이라는 고대적인 이미지에 이끌렸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런 면모가 없지 않겠으나, 뭐라고 확신하지 못하겠군요.
어쨌든 공룡은 아득한 고대를 상징하는 존재이고, 쥘 베른이나 에드가 버로우즈의 소설부터 검마 판타지 게임까지, 그런 상징성은 곳곳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SF 장르나 판타지 장르에서 공룡은 그저 독특하고 거대한 생명체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공룡을 자신들이 닿지 못하는 시대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그런 시각은 여러 소설들과 게임들 속에서 고대의 지성적인 파충류 종족 같은 설정들을 형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