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왜 <공룡과 춤을>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나 본문
야생을 연구하기 위해 종종 생물학자나 생태학자는 인적이 드문 장소로 떠납니다. 광할한 숲, 깊은 동굴, 검푸른 심해, 높은 산맥, 혹독한 극지 등등. 생물학자나 생태학자는 이런 장소에서 연구하고, 그래서 어떤 학자들이나 연구원들은 연구실보다 야생 현장을 좋아하죠. 물론 이런 장소에서 연구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열대 밀림에서 기생충이나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될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조직 폭력배나 소규모 군벌과 만날지 모릅니다. 야생 동물을 조사하는 동안 연구원들은 그 동물에게 공격을 받을지 모릅니다.
야생은 인적이 드문 장소이고, 생물학자나 생태학자는 그런 장소들을 꾸준히 방문해야 하고, 그 과정은 위험하거나 기이한 체험이 될 수 있어요. SF 소설 속의 생물학자나 생태학자 역시 그런 기이한 체험을 간과하지 못합니다. 소설 <공룡과 춤을>에서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백악기로 거슬러 갑니다. 시간 여행이 가능한 덕분에 공룡을 직접 연구하기 위해 백악기로 거슬러 갈 수 있었죠.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공룡 시대에서 어떤 침착하고 차분한 느낌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저지르는 과오 역시 없습니다.
야생 역시 폭력적인 세계이나, 적어도 백악기에서 주인공은 인간들이 전쟁을 벌이거나 학살하는 광경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쩐지 마음이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사실 비단 <공룡과 춤을>만이 아니라 여타 SF 소설 속에서도 생물학자나 생태학자는 적막한 야생 속에서 뭔가 감명을 받곤 하죠.) 광활한 자연 환경 속에서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인류가 저지르는 여러 비극들을 연이어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아프리카 지방의 끊임없는 기근, 기아로 내장이 팽창하고 배가 튀어나온 아이, 부족들의 전쟁과 차별과 내전, 뉴욕 같은 대도시의 양극화, 피로 물드는 성지.
그리고 환각 상태에서 굶어죽는 마약 중독자, 핵 미사일처럼 무시무시한 전략 병기, 잔인하고 끔찍한 성 폭행 등등.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인류가 저지르는 비극들을 백악기에서 볼 수 없었고,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다고 느껴요.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을 보고, 잠시 딴지를 걸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이 온갖 학살과 차별과 폭력과 오염을 인류 전체의 잘못으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지적한 것처럼 (그리고 아마 앞으로 계속 지적할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은 인류 전체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말 인류 전체가 잘못했나요? 인류 전체가 잘못을 저지를 능력이 있을까요? 과연 전세계의 모든 사람이 정말 잘못을 저지를 방법이 존재하나요? 다국적 기업을 좌우하는 자본가와 풀뿌리를 캐먹고 살아가는 가난뱅이 엄마가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나요? 아니죠, 자본가와 가난뱅이 엄마는 전혀 다릅니다. 자본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죄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땅부자들은 자신들의 땅에 산업 폐기물 창고를 지을 수 있습니다. 토건족들은 강이나 호수에 댐이나 다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거대 기업들은 공장에서 어마어마한 매연을 뿜을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이나 총리나 주석이나 대통령 같은 정치인들은 그런 땅부자들과 토건족들과 거대 기업들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풀뿌리를 캐먹고 살아가는 가난뱅이 엄마는 그러지 못합니다. 가난뱅이 엄마는 산업 폐기물 창고를 짓고 싶어도 그럴 땅이 없습니다. 댐이나 다리를 짓고 싶어도 자재와 인력과 비용을 갖지 못했습니다. 매연을 뿜고 싶어도 공장을 짓지 못합니다. 토건족들을 지원하고 싶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싶다면, 그만한 자본과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뱅이 엄마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따라서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잘못 생각했어요. 온갖 학살들과 오염들은 인류 전체의 책임이 아닙니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책임이죠. 더 정확히 말한다면, 진정한 잘못은 소수 사람들이 자본과 권력을 움켜쥘 수 있는 사회 구조입니다. 따라서 저런 비극들을 없애고 싶다면, 모든 사람이 최대한 권력을 자잘하게 나누고, 모든 사람이 권력 행사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권력이고, 그래서 기본 소득은 권력을 나누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추첨 민주주의 역시 대의 제도에서 권력을 나누는 방법이 될 수 있고요. 여기에서 더 나가고, 마침내 인류가 사회적으로 생산 수단을 공유하는 방법 역시 고려할 수 있겠죠.
하지만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이런 것들을 전혀 고민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탓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탓하지 않고, 사회 구조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지구 온난화를 잠시 언급하나, 자본주의가 지구 온난화를 일으켰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류 전체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너무 편한 방법이죠. 기득권에게 저항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모두 잘못했습니다. 아기에게 썩은 물을 먹여야 하는 가난뱅이 엄마들까지 모두 잘못했습니다. 아마 이 고생물학자는 전세계 사람들이 똑같이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계급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비단 이 고생물학자만 아니라 현실 속의 수많은 지식인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열심히 떠듭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의가 가득하다고 해도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논리로 바뀌지 않을 겁니다. 인류 역사에서 계급 수탈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분명한 사실이고, 따라서 우리는 계급 수탈에 주목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