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오만과 편견>과 열린 담론의 SF&F 본문
이 그림(링크)은 중세 유럽 판타지 성직자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에서 성직자는 판금 갑옷을 입었고 철퇴로 무장했습니다. "칼보다 펜은 강하다."라는 문구처럼, 무력과 지성은 대조적이나, 중세 판타지 성직자는 두꺼운 서적을 들었습니다. 현실 역사 속의 수도사들이 성서들을 비롯해 문학 서적들과 교양 서적들을 필사했고, 관리했고, 전파했던 것처럼, 중세 판타지에서 성직자에게 서적은 필수적입니다. 성직자들이 많은 서적들을 읽기 때문에, 그들은 지혜롭습니다. 성직자는 언데드에게 철퇴를 휘두르고, 동시에 지혜로운 성직자는 주문을 외우고 신성한 불꽃을 내리칠 수 있습니다.
이 사진(링크)은 스페이스 오페라 초능력 해병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강화복 해병은 장검을 들었습니다. "칼보다 펜은 강하다."라는 문구처럼, 무력과 지성은 대조적이나, 초능력 해병은 두꺼운 서적을 들었습니다. 이 해병은 일반적인 전사보다 사서(라이브러리안)입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사서들은 여러 문서들을 기록하고 관리합니다. 그들이 여러 문서들을 관리하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지식들과 깊은 지혜들을 자랑합니다. 해병대 지휘관들에게 사서들은 훌륭한 조언자입니다. 사서들은 강화복을 입고 카오스 악마에게 장검을 휘두르고, 동시에 그들은 싸이킥 번개를 날립니다.
이렇게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워해머 40K>에서 성직자와 해병 사서는 비슷합니다. 성직자와 사서는 SF/판타지 장르에 속합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여러 차이들을 드러내나, 한편으로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친숙한 이웃입니다.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는 훨씬 친숙한 이웃입니다. 성직자와 사서는 갑옷/강화복을 입었고 철퇴/장검을 들었습니다. 종종 사서들은 비단 장검만 아니라 철퇴나 도끼로 무장합니다. "칼보다 펜은 강하다."라는 문구와 달리, 성직자와 사서는 비단 철퇴/장검으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두꺼운 서적을 휴대합니다. 성직자는 신성 주문을 외웁니다.
성직자는 주문을 외우고, 신성한 불꽃을 내리치고, 언데드를 불태웁니다. 사서 역시 싸이킥 에너지를 모으고, 번개를 날리고, 카오스 악마를 지집니다. 성직자와 사서에게는 여러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양쪽이 비슷하기 때문에, SF/판타지 팬들은 성직자와 사서를 비교/대조할 수 있습니다. SF/판타지 장르에서 마법 주문과 초능력이 서로 비슷한 것처럼, 성직자와 사서는 비슷한 위상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게임 제작자들이 이것을 의도했나요? 게임 제작자들이 중세 판타지 성직자와 스페이스 오페라 초능력 해병을 창작하는 동안, 게임 제작자들이 두 가지가 비슷하다고 의도했나요?
만약 게임 제작자들이 성직자와 사서가 비슷하다고 의도했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두 가지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게임 제작자들이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이 두 가지를 비교하지 못하나요? 게임 제작자들이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들이 비교해서는 안 되나요?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제작자 의도를 따라야 하나요? 만약 게임 제작자가 뭔가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게임 플레이어가 이것을 해석하지 못하나요? 이렇게 게임 제작자, 게임 설정, 게임 플레이어 관계는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비단 게임만 아니라 다른 매체들 역시 비슷합니다.
작가는 소설을 씁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작가 의도를 중시합니다. 모범적인 독자는 뭐라고 작가가 설명하는지 파악합니다. 소설 해석에서 작가 의도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작가 의도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만약 작가가 뭔가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독자가 이것을 해석하지 못하나요? 독자가 오직 작가 의도만 따라가야 하나요? 게임 제작자, 게임 설정, 게임 플레이어 관계처럼, 작가와 소설과 독자 관계는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문학 평론에서 이건 아주 어려운 문제, 어쩌면 가장 어려운 문제인지 모릅니다. 해석은 커다란 논란이 됩니다.
여러 평론 서적들은 해석이 (가장) 커다란 논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평론가들이 기발한 해석들을 내놓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이 해석들이 엉터리거나 말장난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평론가들 역시 해석들에 서로 동의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작가들, 철학자들, 평론가들은 어떻게 독자가 소설을 해석할 수 있는지 논의하나, 이 논의는 정답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작가 의도를 무시하고 소설을 무한하게 해석할 수 있나요? 이게 과잉 해석이 아닌가요? 비록 작가가 뭔가를 잘못 쓰거나 뭔가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가 작가 의도를 뛰어넘고 이것을 해석할 수 있나요?
비록 작가가 뭔가를 잘못 쓰거나 뭔가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가 작가 의도를 필연적으로 따르나요? 오직 작가 의도 범위 안에서만 독자가 소설을 읽어야 하나요? 작가는 소설 속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소설은 또 다른 세계를 품습니다. 엘리자베스 베넷이 허구적인 등장인물이고, 현실에서 엘리자베스 베넷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오직 소설 <오만과 편견> 속의 세계에서만 엘리자베스 베넷이 존재하는 것처럼, 소설 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만약 작가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면, 오직 작가 의도 범위 안에서만 또 다른 세계는 존재할 테고, 세계는 작가 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만약 세계가 작가 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세계는 너무 제한적일 겁니다. 한때 현실에서 스피노사우루스는 활보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스피노사우루스가 멸종했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있는 스피노사우루스를 만나지 못하나, 한때 지구 생물권은 스피노사우루스를 포함했습니다. <오만과 편견> 속의 세계에서 지구 자연 생태계가 스피노사우루스를 포함하나요? 지구 자연 생태계가 진화했기 때문에, 생명 진화 역사가 고생대와 중생대를 거쳤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는 나타났습니다. 엘리자베스 베넷을 비롯해 소설 등장인물들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생명 진화 역사가 고생대와 중생대를 거쳤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베넷을 비롯해 다른 소설 등장인물들(호모 사피엔스들)은 나타났습니다. 엘리자베스 베넷은 <오만과 편견> 속의 세계가 고생대와 중생대를 거쳤다고 증명합니다. <오만과 편견> 속의 세계가 중생대를 거쳤기 때문에, 현실에서 스피노사우루스가 활보했던 것처럼, 한때 <오만과 편견> 속의 세계에서 스피노사우루스는 활보했을 겁니다. 독자는 <오만과 편견>을 읽고 이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작가 의도입니다.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을 쓰는 동안, 제인 오스틴이 백악기 야수 스피노사우루스를 의도했나요?
제인 오스틴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제인 오스틴이 스피노사우루스를 인식했나요? 20세기 초반 고생물학은 스피노사우루스를 발견했습니다. 20세기 초반 이전에, 고생물학은 스피노사우루스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은 19세기 초반 소설입니다. 제인 오스틴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제인 오스틴은 스피노사우루스를 알지 못했습니다. 제인 오스틴이 스피노사우루스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만과 편견> 속의 세계에서 스피노사우루스가 활보하지 않았나요? 작가 의도 때문에, 독자가 <오만과 편견>을 읽고 소설 속의 세계에서 이 공룡이 진화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나요?
독자가 오직 작가 의도만 따르고 소설 속의 세계에서 스피노사우루스가 진화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나요? 아니면 독자가 작가 의도를 뛰어넘고 스피노사우루스가 진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나요? 제인 오스틴 의도 안에서 <오만과 편견> 속의 세계가 존재하나요? 아니면 <오만과 편견> 속의 세계가 제인 오스틴 의도 밖으로 벗어날 수 있나요? 이 물음들은 헛갈립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물음들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고생물학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핵심 주제는 상류층과 중산층, 연애와 결혼입니다. 백악기 야생 동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스피노사우루스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은 소설입니다. 소설은 또 다른 세계를 품습니다. 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과 평론가들은 소설에게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소설에게 세계가 있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읽고 세계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세계를 해석하는 동안,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과정은 문제가 됩니다. 비록 <오만과 편견>에서 스피노사우루스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이 소설에게 또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에, 작가 의도는 문제가 됩니다. 비단 스피노사우루스만 아니라 다른 설정들 역시 작가 의도와 마찰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비록 <오만과 편견>에서 백악기 야생 동물이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소설이 또 다른 세계를 품기 때문에, 독자가 20세기 초반 고생물학을 <오만과 편견>에게 적용할 수 있나요? 비록 제인 오스틴이 스피노사우루스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독자가 작가 의도를 뛰어넘고 백악기 야수를 해석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아니면 오직 제인 오스틴 의도 안에서만 독자가 소설 속의 또 다른 세계를 이해해야 하나요? 이 물음들은 헛갈립니다. 하지만 비록 이것들이 헛갈린다고 해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제인 오스틴보다 <오만과 편견>은 우선하지 않고, 현실보다 제인 오스틴은 우선하지 않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중생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을 쓰기 전에, 이미 중생대는 나타났습니다. 이미 중생대가 지나갔고 신생대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 현실 속에서 제인 오스틴은 소설을 썼습니다. 제인 오스틴보다 이 현실은 훨씬 유구하고 거대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보다 이 유구하고 거대한 현실 속에서 <오만과 편견>은 나타났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이 현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현실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오만과 편견>은 거대하고 유구한 흐름에 속합니다.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거대하고 유구한 흐름, 현실이 나타나기 때문에, 작가는 소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비단 제인 오스틴과 <오만과 편견>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과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가는 작품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작가가 만들기 때문에, 작품은 나타납니다. 작가 없이, 작품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작가 역할, 작가 의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작가 역할, 작가 의도보다 현실은 훨씬 우선합니다. 독자는 거대하고 유구한 흐름 속에서 작가가 작품을 만든다고 고려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작품을 해석할 때, 작가 의도보다 거대하고 유구한 흐름은 우선합니다.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을 썼으나, 작가가 작품을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다른 작가들과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미셸 푸코 같은 철학자들은 제인 오스틴이 작가보다 담론의 선구자라고 말합니다. <오만과 편견>은 소설 속의 또 다른 세계라는 담론을 펼칩니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을 썼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은 이 담론을 선구적으로 논의합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은 이 담론을 혼자 소유하지 않습니다. 제인 오스틴은 그저 이 담론을 이끌 뿐입니다. 이 담론의 장(소설 속의 세계)은 폐쇄적이지 않습니다.
<오만과 편견>은 담론의 장이 되고, 다른 독자들은 담론에 참가하고 제인 오스틴에게 동의하거나 반박할 수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은 고정적인 소설, 닫힌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열린 담론입니다. 제인 오스틴이 열린 담론을 논의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독자들)은 이 담론에 참가하고 동의하거나 반박합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계급 차이는 연애와 결혼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이 소설에서 계급과 결혼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이 어떻게 인류 사회가 계급 사회가 되는지 인식했나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썼고 계급 투쟁을 설명했습니다.
마르크스/엥겔스와 달리, 만약 제인 오스틴이 계급 투쟁 과정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면, 독자가 계급 투쟁을 <오만과 편견>에게 적용하지 못하나요? <오만과 편견>에서 계급과 결혼이 핵심 소재이기 때문에, 스피노사우루스보다 이건 훨씬 중요한 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이 19세기 중반 서적이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을 쓰는 동안, 제인 오스틴은 <공산당 선언>을 읽지 않았습니다. 제인 오스틴이 <공산당 선언>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 선언>이 제인 오스틴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독자가 <공산당 선언>을 <오만과 편견>에게 적용하지 못하나요?
하지만 <오만과 편견>이 닫힌 감방보다 열린 마당에 가깝기 때문에, 독자는 열린 마당에 얼마든지 참가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제인 오스틴이 <공산당 선언>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비록 계급 투쟁이 작가 의도가 아니라고 해도, 소설 속의 또 다른 세계가 열린 담론이기 때문에, 독자는 담론에 참가하고, <공산당 선언>을 적용하고, 계급 투쟁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열린 담론에 참가하는 것처럼, 미셸 푸코가 제인 오스틴을 작가보다 담론의 선구자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이건 작가의 죽음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담론 선구자의 탄생입니다. 중세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디오 게임 <베이스 원>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이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항해 시대를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 정거장을 건설합니다. 우주 정거장은 첨단 진보 분위기를 팍팍 풍깁니다. 반면, 비디오 게임 <포크 테일>은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첨단 진보 분위기와 중세 판타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베이스 원>이 첨단 진보 분위기를 풍기고, 첨단 진보 분위기와 중세 판타지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베이스 원>과 중세 판타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베이스 원>과 <포크 테일>을 연결한다면, 이건 과잉 해석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베이스 원>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혼자 장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베이스 원>을 비롯해 많고 많은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애니메이션들, 보드 게임들, 비디오 게임들, 기타 등등을 포함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아주 거대한 열린 담론이고, <베이스 원>은 거대한 열린 담론에 속합니다. 게임 제작자들은 <베이스 원>과 <포크 테일>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고, 게임 제작자들 의도는 중요합니다. <베이스 원>에서 게임 제작자들 의도는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게임 제작자들이 <베이스 원>을 만들기 전에, 이미 스페이스 오페라는 나타났고, SF&F 범주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포함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세 판타지라는 장르 안에서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존재합니다.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을 쓰기 전에, 이미 19세기 상류 계급이 나타났던 것처럼,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중세 판타지는 나타났습니다. <워해머 40K>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워해머 40K>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워해머 40K>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 안에서 <워해머 40K>는 존재합니다. <워해머 40K>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스페이스 오페라는 나타났습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썼으나, 마르크스/엥겔스는 추악하고 비열한 계급 사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계급 사회는 존재했고, 이 현실 속에서 마르크스/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썼습니다. 이 현상처럼, <워해머 40K>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스페이스 오페라가 나타났기 때문에, <워해머 40K>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혼자 장악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중세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가 나타나기 전에,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가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을 썼을 때, 이미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은 비슷한 흐름에 속했습니다.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SF 작가입니다. 어슐라 르 귄이 SF 작가이기 때문에, 만약 출판사가 어슐라 르 귄 모음집을 편집한다면, 이 모음집이 오직 SF 소설들만 수록해야 하나요? 만약 이 모음집이 판타지 소설들을 수록한다면, 이게 잘못된 편집인가요? "어슐라 르 귄은 SF 작가야! 그래서 어슐라 르 귄 모음집은 오직 사이언스 픽션들만 수록해야 해! 만약 출판사가 판타지를 집어넣는다면, 독자는 출판사를 비판할 수 있어!" 이 주장이 타당한가요? 만약 출판사가 'SF' 모음집을 편집한다면, 이 모음집이 판타지를 수록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분명히 SF 작가로서 어슐라 르 귄은 아주 아주 유명합니다.
하지만 어슐라 르 귄은 비단 SF 소설들만 아니라 판타지 소설들을 함께 썼습니다. 비단 어슐라 르 귄만 아니라 다른 SF 작가들 역시 판타지 소설들을 쓰거나 판타지 분위기를 풍깁니다. 앤 맥카프리는 드래곤 라이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이 완전한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아니면 사이언스 판타지, 'SF&F'라는 분류가 이 소설을 포함할 수 있나요? 어슐라 르 귄과 액 맥카프리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가깝거나 두 장르는 사이언스 판타지를 형성합니다. 이건 장르 관례입니다. 비록 출판사가 SF 모음집에 판타지를 집어넣는다고 해도, SF 독자는 출판사가 독자를 기만한다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어떤 SF 작가는 중세 유럽 판타지를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 작가가 중세 판타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이 작가는 SF&F, 사이언스 판타지라는 넓은 범주를 혼자 장악하지 못합니다. 이 작가보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훨씬 유구하고 넓은 범주입니다. 아무리 이 작가가 중세 판타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독자는 SF&F, 사이언스 판타지라는 넓은 범주를 고려하고 이 작가와 중세 판타지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가 SF 모음집에 판타지를 집어넣는 것처럼, 이게 장르 관례이기 때문에, 작가는 이 관례를 완전히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SF&F는 닫힌 체계보다 열린 담론의 장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워해머 40K>에서 성직자와 해병 사서는 비슷합니다. 게임 제작자들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직자와 해병 사서는 넓은 범주(중세 판타지, 스페이스 오페라, 사이언티픽 로망스)에 속합니다. 또 다시 이 넓은 범주는 SF&F라는 훨씬 넓은 범주에 속합니다. 게임 제작자들은 SF&F 범주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합니다. 성직자와 해병 사서는 고정적인 설정보다 열린 담론의 장입니다. 비단 성직자와 해병 사서만 아니라 다른 SF 설정들, 판타지 설정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고정적인 설정보다 열린 담론의 장입니다.
※ 게임 <포크 테일> 스크린샷 출처: Neodyinamite,
www.youtube.com/watch?v=X6rtA_YPhxQ
※ 게임 <베이스 원> 스크린샷 출처: Rap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