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넌 쉽게 말했지만>, 서사시와 SF&F 본문
만약 어떤 소설에서 인류 문명이 장거리 세대 우주선을 건조하고, 장거리 우주선이 다른 행성으로 날아가고, 우주선 사람들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고, 새로운 자연에서 새로운 문명이 나타난다면, 이게 서사시가 될 수 있나요? 독자들이 이 소설을 서사시라고 간주할 수 있나요? 이 소설이 서사시에 가까워질 수 있나요? 네, 이건 가능합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이 서사시와 비슷하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소설과 서사시는 가깝습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소설과 서사시가 가깝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설과 서사시는 대립할지 모릅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개인적인 감성과 일상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면, 이게 서사시가 될 수 있나요? 독자들이 이 소설을 서사시라고 간주할 수 있나요? 이 소설이 서사시에 가까워질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소설은 서사시보다 서정시에 가깝습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이 서정시와 비슷하다고 간주할 겁니다. 이 상황에서 소설과 서정시는 가깝습니다. 서정시와 서사시는 대립합니다. 소설과 서정시가 가깝고, 서정시와 서사시가 대립하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소설과 서사시는 대립합니다. 소설이 개인적인 감성과 일상을 이야기할 때, 서사시에서 소설은 멀어집니다.
소설이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할 때, 소설은 서사시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소설이 개인적인 감성과 일상을 이야기할 때, 소설은 서정시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서사시는 세계를 묘사하고, 서정시는 개인을 묘사합니다. 서사시 대 서정시는 세계 대 개인입니다. 일반적으로 세계와 개인은 대조적입니다. 세계는 아주 거창하고 총체적입니다. 개인은 미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소설이 서사시에 가까워질 때, 소설은 세계를 묘사합니다. 이 소설은 거창하고 총체적입니다. 반면, 소설이 서정시에 가까워질 때, 소설은 개인을 묘사합니다.
소설이 개인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미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이렇게 소설이 서사시와 서정시에 가까워질 때, 두 소설은 대조적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소설들, 특히, 주류 문학들이 어디에 가깝나요? 21세기 초반 오늘날, 서사시와 서정시 중에서 소설들(주류 문학들)이 어디에 가깝나요? 대답은 서정시입니다. 많은 독자들은 서사시보다 소설이 서정시에 가깝다고 대답할 겁니다. 평론가들 역시 서사시보다 서정시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소설들이 서정시에 가깝나요? 서구 근대화 이후, 사회보다 개인 관념이 훨씬 커졌기 때문입니다.
사전적인 측면에서 서사시는 '국가나 민족의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된 신화나 전설이나 영웅의 사적 등을 시간의 연쇄에 따라 읊은 문학'입니다. 이 관점에서 서사시는 신화와 전설에게 기반합니다. 신화는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어쩌면 인류 문화에서 신화는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고대 사람들은 어떻게 세계(우주, 자연, 문명, 사회)가 나타나는지 이야기하기 원했습니다. 신화는 이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신화는 어떻게 우주, 자연, 문명, 사회가 나타나는지 이야기합니다. 신화는 아주 거창하고 총체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건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인류 사회(서구 사회)가 19세기 근대화를 거친 이후, 개인 관념은 훨씬 커졌고, 이야기들은 세계보다 개인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개인을 주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고대 이야기(신화)와 근대 이야기(소설)는 다릅니다. 고대 이야기(신화)와 달리, 근대 이야기(소설)는 거창하지 않고 총체적이지 않습니다. 소설이 개인을 주목하기 때문에, 소설은 미시적이고 부분적입니다. 이건 압도적이지 않습니다. 고대 이야기와 근대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고대 이야기가 세계를 중시하고 근대 이야기가 개인을 중시하기 때문에, 근대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됩니다.
근대 이야기가 새로운 것(novella)이기 때문에, 근대 이야기는 소설(novel)이 됩니다. 세계와 개인 관점에서 고대 이야기(신화)와 근대 이야기(소설)는 커다란 차이를 드러냅니다. 어쩌면 신화와 소설에게 세계와 개인은 가장 커다란 차이인지 모릅니다. 독자가 고대 신화를 읽을 때, 독자는 고대 신화가 개인 내면에 치중한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대 신화가 개인 내면에 치중한다고 해도, 개인 내면보다 세계 설정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반면, 소설은 개인 내면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21세기 초반 소설들이 서정시에 가깝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왜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개인 관념이 훨씬 커졌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답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역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은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에서 자본주의는 비롯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 제도에게 기반합니다. 만약 사유 재산보다 공유 사회가 훨씬 늘어난다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는 많고 많고 많고 많은 것들을 사유화(민영화)하기 원합니다. 심지어 공공 분야들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의료는 가장 대표적인 공공 분야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의료를 사유화(민영화)하기 원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의료 민영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는 공공 의료를 비난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공공 의료를 비난하기 때문에, 의료는 대중적인 것보다 고급스러운 것이 되고, 의료 인력들과 설비들은 크게 줄어듭니다. 의료 인력들과 설비들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인류 사회들은 세계적인 전염병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인류 사회들이 세계적인 전염병에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고 많은 사람들은 심각한 고통에 빠집니다.
자본주의가 사유 재산 제도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많고 많은 사람들은 심각한 고통에 빠집니다. 심지어 자본주의가 의료 분야(공공 분야)조차 사유화(민영화)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 제도를 추구합니다. 개인이 재산을 소유할 때, 이건 사유 재산이 됩니다.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뒷받침합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개인 권리를 강조합니다. 이 개인 권리는 다른 무엇보다 개인 소유 권리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재산 문제가 선거와 투표로 직접 이어졌던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에서 개인 권리는 다른 권리들보다 소유 권리, 재산 권리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에게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 사회가 보여줬던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에서 개인 권리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자유에 철저한 초점을 맞춥니다. 만약 자유 민주주의가 소유 권리보다 다른 권리들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여자들은 얼마든지 투표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권리들보다 재산 권리가 중요했기 때문에, 20세기 중반 사회까지, 여자들은 제대로 투표하지 못했습니다. '자유'주의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건 자본주의를 뒷받침합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이 세력을 확장했고,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가 강해졌기 때문에, 개인 관념은 훨씬 커졌습니다. 이건 오직 부르주아 계급만 유일한 이유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르주아 계급 이외에 다른 이유들 역시 개인 관념에게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부르주아 계급은 개인 관념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인류 사회들이 전염병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처럼, 21세기 초반 오늘날은 개인 관념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보다 개인을 열심히 떠듭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회를 부정합니다. 개인 관념이 너무 너무 커졌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회를 너무 너무 부정합니다. 그들은 사회가 나쁜 것이고 개인이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 오늘날에서 개인주의는 가장 커다란 유행입니다. 개인주의는 사회 질서보다 개인 정체성(개성)이 중요하다고 외칩니다. 사회 질서보다 개인 정체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많고 많은 사람들은 온갖 개성들을 늘어놓습니다. 이제 21세기 초반 오늘날은 개성 시대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사회보다 개성들을 외치기 때문에, 온갖 개성들은 넘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온갖 개성들이 넘치기 때문에, 소설들(주류 문학들) 역시 사회보다 개인을 떠듭니다. 이주란 작가는 <넌 쉽게 말했지만>을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어떻게 개인이 소박한 일상을 추구하는지 보여줍니다. <넌 쉽게 말했지만>은 사회를 향해 나가지 않습니다. 사회는 총체적인 관계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관계들을 구성할 때, 사회는 나타납니다. <넌 쉽게 말했지만>에서 주인공은 복잡한 관계들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은 관계들을 밀어내고 고립된 개인을 추구합니다. 이 단편 소설은 사회화보다 개인화를 보여줍니다.
개인화, 사유화, 민영화는 비슷한 위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민영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소설이 개인화를 보여주나요? 어쩌면 이주란 작가는 이것을 의식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개인 재산 권리, 민영화와 상관없이, 이주란 작가는 그저 소박한 개인 일상을 묘사하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넌 쉽게 말했지만>은 사회화를 밀어내고 개인화를 보여주나, 이 단편 소설과 자본주의 사회는 아무 관계를 맺지 않는지 모릅니다. <넌 쉽게 말했지만>에서 주된 감성은 개인적이고 미시적이나,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남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를 옹호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자본주의가 개인 소유 권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은 개인화를 중시합니다. 개인화는 지배적인 관념이 되고,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독자는 <넌 쉽게 말했지만>을 읽습니다. 아무리 이주란 작가가 자본주의 민영화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남한 사회에서 개인화는 지배적인 관념이 되었고,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독자는 <넌 쉽게 말했지만>을 읽습니다. 독자는 이것을 읽고 개인 정체성을 훨씬 강화할지 모릅니다.
지배적인 관념(개인화) 속에서 독자가 개인 정체성을 읽기 때문에, 이건 개인 정체성을 훨씬 강화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넌 쉽게 말했지만>은 자본주의를 뒷받침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주란 작가는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는지 모르나, 이미 사회 구조가 민영화를 중시하기 때문에, 이주란 작가 의도와 상관없이, <넌 쉽게 말했지만>은 자본주의를 뒷받침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 관념이 커지고, 온갖 개성들이 늘어난다고 해도,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나는 월요일을 싫어해." 많은 사람들은 이 문장에 공감합니다. 인간이 사회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온갖 개성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이 다양한 개성들은 월요일을 싫어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고 많은 사람들이 월급 노예, 임금 노예이기 때문에, 다양한 개성들과 상관없이, 그들은 월요일을 싫어합니다. "나는 월요일을 싫어해." 이 문장은 온갖 개성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종속된다고 보여줍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온갖 개성들을 지배합니다. 아무리 개성이 톡톡 튄다고 해도, 이 개인 정체성은 임금 노동자, 임금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개성이 톡톡 튄다고 해도, 이 개성은 그저 겉멋에 불과합니다. 이 개성은 임금 노동(노예) 제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개인 정체성이 자본주의를 넘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이 개인을 중시한다고 해도, 소설은 사회를 배제하지 못합니다. 만약 소설이 오직 개인만 파악하고 사회를 배제한다면, 소설은 미궁에 빠질 겁니다. 그래서 루카치 죄르지는 멜랑콜리가 소설 분위기라고 설명했을 겁니다. 소설이 미궁에 빠지기 때문에, 소설은 실패합니다. 소설이 실패하기 때문에, 멜랑콜리는 소설 분위기를 지배합니다. 이건 모든 근대 소설이 오직 개인만 주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화는 아주(가장) 유구한 이야기입니다.
셋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문화 영역에서 신화는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신화가 아주(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문화는 신화를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개인 관념이 커지고, 아무리 소설이 개인을 중시한다고 해도, 소설은 짧은 역사를 드러냅니다. 소설보다 신화는 엄청난 역사를 자랑합니다. 소설보다 신화가 엄청나기 때문에, 아직 문화는 신화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신격과 세계(우주, 자연, 문명, 사회)를 논의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신격은 우주를 창조하거나 대륙과 문명은 커다란 위기에 빠집니다.
중세 판타지가 신격과 세계를 논의하기 때문에, 중세 판타지는 서시시에 가깝습니다. 중세 판타지는 신화를 근대적으로 계승합니다. 고대 신화와 달리, 여자 드루이드가 지식들을 가르치고 민중들을 이끄는 것처럼, 중세 판타지는 근대 관념들(과 근대 기술들과 근대 제도들)을 덧붙이나, 분명히 중세 판타지와 서사시는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중세 판타지가 서사시와 비슷한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문단은 인류 문명이 외계 행성으로 날아가고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문명을 이룩한다고 설명합니다.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문명은 거창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아주 거창합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인공 건축이 항성을 둘러싼다면, 이건 미시적이지 않고 개인적이지 않고 부분적이지 않을 겁니다. 문자 그대로 링 '월드'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링 월드가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링 월드는 거창하고 총체적입니다. <넌 쉽게 말했지만>은 세계를 밀어내고 개인을 주목하고 멜랑콜리에 빠지나, 스페이스 오페라는 거창한 세계를 주목하고 서사시를 계승합니다. 만약 근대 사람들이 멜랑콜리를 타파하고 총체적인 세계를 보기 원한다면, 주류 소설보다 중세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중세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가 개인을 배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평론가들은 이 장르가 개인보다 세계를 중시하고 개인 주인공보다 세계 주인공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설명합니다. 개인에게 공감하기보다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SF 독자들은 이 장르를 읽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세계 설정 그 자체는 주인공이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계 그 자체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SF 작가는 개인입니다. 개인 관점에서 SF 작가는 세계를 묘사합니다. 아무리 SF 독자가 세계를 파악하기 원한다고 해도, SF 독자는 개인입니다. SF 독자는 세계가 아닙니다.
개인 관점에서 SF 작가는 세계를 묘사하고, 개인 관점에서 SF 독자는 세계를 파악합니다. SF 작가와 SF 독자가 개인이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개인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세계적인 관점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은 전지전능한 창조신이 아닙니다. 아무리 중세 유럽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가 전지적인 시점, 세계적인 시점을 제시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우리가 개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 시점을 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넌 쉽게 말했지만>보다 중세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세계를 논의합니다.
중세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개인 관점을 배제하지 못하나, 주류 소설보다 SF/판타지가 세계를 논의하기 때문에, 만약 근대 사람들이 멜랑콜리를 타파하기 원한다면, 주류 소설보다 SF/판타지는 나을 겁니다. 중세 판타지보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시대 격차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중세 판타지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나을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 같은) 유토피아 이야기가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만약 유토피아 이야기와 SF&F가 만난다면, 이건 금상첨화일 겁니다. 이반 예프레모프와 노라 제미신 같은 SF&F 작가들은 금상첨화입니다.
비록 신화 시대가 사라지고 소설 시대가 지배한다고 해도, 근대 문화에게는 SF&F 작가들이 있습니다. 비록 신화 시대가 사라졌다고 해도, 신화가 아주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문화는 신화를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보다 신화가 유구하기 때문에, 문화는 유구한 명맥을 계속 이어가기 원할 겁니다. SF/판타지는 이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거창하고 총체적인 SF/판타지는 유구한 명맥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멜랑콜리한 주류 소설들에 실증이 났다면, SF/판타지는 좋은 선택일 겁니다.
※ 게임 <스텔라리스> 스크린샷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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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엔들리스 레전드> 스크린샷 출처: 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