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영화라는 실시간 매체와 소설이라는 느긋한 매체 본문
영화는 극장 매체입니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극장을 찾습니다. 거대한 화면, 북적거리는 관객들, 고소한 팝콘 냄새, 매표소와 길다란 줄, 대형 포스터. 이런 것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종종 어떤 사람들은 극장보다 2차 매체(비디오, DVD, 블루레이, 유료 다운로드)들을 선호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의 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관객들 때문에? 음료수를 너무 많이 마신다면,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광고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이유들이 있겠으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가 실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실시간입니다. 관객이 어떤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어떤 대사를 놓친다고 해도, 영화는 관객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관객이 영화가 제시한 설정이나 주제나 문제 의식을 곱씹기 원한다고 해도, 영화는 관객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영화가 탐정 영화이고, 그 영화가 굉장히 복잡한 트릭을 구사한다면, 어떤 관객들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왜 관객들이 탐정 영화를 보겠어요?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재미 때문이겠죠. 어떤 관객들은 퍼즐을 천천히 파악하기 원할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실시간 매체이고, 절대 그런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영화에는 상영 시간이 있습니다. 관객들이 퍼즐을 파악하거나 직접 맞추기 원한다고 해도, 영화는 관객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오직 엔딩 크레딧을 향해 줄기차게 전진할 뿐이고, 관객이 실마리나 단서를 놓친다고 해도, 영화는 절대 그걸 다시 보여주지 않습니다. 만약 탐정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이 화장실에 들린다면, 그 관객은 굉장히 중요한 단서를 놓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관객이 중요한 단서를 놓친다고 해도, 영화는 관객에게 상관하지 않아요. 영화는 절대 뒤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신나게 앞으로 달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극장보다 비디오나 DVD나 블루레이나 유료 다운로드를 선호합니다. 왜? 그런 매체들이 흐름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루레이나 유료 다운로드를 볼 때, 시청자는 영화를 멈추거나 뒤로 돌릴 수 있습니다. 어떤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어떤 대사를 놓쳤을 때, 퍼즐을 곱씹기 원할 때, 설정이나 주제나 문제 의식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원할 때, 시청자는 영화를 멈추거나 뒤로 돌릴 수 있습니다. 블루레이나 유료 다운로드에는 그런 장점이 있죠. 화면이 작고 음향이 시시하다고 해도, 블루레이나 유료 다운로드는 이런 장점을 선보일 수 있어요. 극장 매체는 절대 이런 장점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 저 역시 극장보다 블루레이 같은 쪽을 좋아해요.)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평론가들은 극장보다 비디오 시장에서 <블레이드 러너>가 인기를 끌었다고 말합니다. <블레이드 러너>에는 엄청난 광고판들, 글자들, 복장들이 나옵니다. 비디오를 관람하는 시청자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살펴볼 수 있으나, 영화 관객은 그렇지 못합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차이나 타운에서 형사 케이가 도시락을 까먹는 장면은 가장 대표적일 겁니다. 차이나 타운 장면 역시 엄청난 정보들을 포함했죠. 마리에트가 케이에게 "여기에서 나는 언제나 기다리는 중이다."라고 말했을 때, 광고 방송은 한국어로 "아니에요. 틀렸어요."라고 말합니다. 이건 꽤나 재미있는 장난 같은 연출입니다.
하지만 어떤 관객들은 광고 방송을 잘못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듣고 싶겠죠. 영화는 그게 가능하지 않으나, 블루레이나 유료 다운로드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블레이드 러너 2049> 같은 영화가 극장보다 블루레이 전용 영화라고 말해요. 문제는 아무리 시청자가 영화를 멈추거나 뒤로 돌린다고 해도 그게 일반적인 시청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시청자는 영화를 멈추거나 뒤로 돌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감상합니다. 게다가 블루레이나 유료 다운로드 시장으로 가기 전에 영화는 먼저 극장으로 갑니다.
따라서 대부분 영화 제작자들은 일반적인 실시간 감상에 초점을 맞출 겁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영화는 수많은 정보들을 담지 못합니다. 설사 영화가 그런 것들을 담는다고 해도, 관객이 그걸 파악하기 원한다면, 극장보다 블루레이를 선택하는 편이 낫겠죠. 여기에서 저는 SF 장르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자주 SF 장르는 복잡하고 자세한 사변을 늘어놓습니다. 특히, 하드 SF 장르는 훨씬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드 SF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잠시 독자들은 독서를 멈추고, 설정이나 주제를 되새길 겁니다. 종종 독자들은 앞장으로 돌아가고, 무슨 설정이 이어지는지 확인할 겁니다.
사실 책은 이런 행위에 잘 어울리는 매체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잠시 독자가 멈추거나 앞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건 어색하지 않은 행위입니다. (이런 특징이 없다면, 아주 복잡한 하드 SF 소설이나 추리 소설은 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책과 달리, 영화는 실시간이고 혼자 신나게 앞으로 달립니다. 따라서 영화가 복잡한 설정이나 사변을 담는다면, 시청자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화와 시청자는 서로 동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보다 소설이 훨씬 SF 장르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소설은 독자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소설은 혼자 신나게 달리지 않습니다. 책은 독자와 동행합니다. 독자가 텍스트를 읽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 책은 앞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실시간이고 혼자 달리나, 책은 독자와 함께 느긋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SF 장르는 혼자 신나게 달리는 실시간 매체보다 독자와 함께 느긋하게 걷는 책에 어울릴 겁니다. 물론 사람들이 화려한 우주 함대 전투를 원한다면,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소설은 절대 영화가 자랑하는 화려한 볼거리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변이나 설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소설을 쉽게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아니, 근본적으로 그건 불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