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문학이라는 다양한 모태와 장르라는 특수성 본문
비평 서적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의 영문 제목은 <How to Read Literature>입니다. "어떻게 문학을 읽을까?" 영문 제목은 대략 이런 느낌입니다. 흠, 그래요. 어떻게 문학을 읽어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가 문학을 읽을 수 있을까요? 저자 테리 이글턴은 도입부, 인물, 서사, 해석 같은 방법들을 이용해 어떻게 우리가 문학을 읽을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물론 테리 이글턴은 어떤 딱 부러지는 해답을 지정하지 않습니다. 문학을 읽을 때, 딱 부러지는 해답은 없을 겁니다. 어떤 보편적인 기준이나 공감대는 있겠으나, 그것조차 바뀔지 모릅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서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 설명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문학과 설명서는 다릅니다. 설명서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설명서는 뭔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휴대폰 설명서는 어떻게 사람들이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그건 유일한 주제이고, 가장 뚜렷한 주제입니다. 누군가는 휴대폰 설명서를 문학적으로 읽을 수 있겠으나, 문학적인 재미를 위해 휴대폰 설명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휴대폰 설명서가 미사여구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휴대폰 설명서는 휴대폰을 설명해야 합니다.
문학은 다릅니다. 문학은 훨씬 열린 대상입니다. 문학은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는 모태입니다. 도로 표지판을 쳐다볼 때, 우리는 그것이 교통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교통 신호가 있습니다. 아무리 도로 표지판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예쁘다고 해도, 결국 그건 교통 신호를 가리킵니다. 기호가 무엇이든, 기의(의미)는 하나입니다. 문학은 그렇지 않아요. 무슨 문학을 읽든, 우리는 그것을 하나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문학은 수많은 재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을 수 있습니다. 시대가 바뀔 때, 문학들 역시 사라지거나 부활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는 하나이나, 사람들은 온갖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사실 철학자들 역시 철학 텍스트를 오만 가지로 해석합니다. 철학 텍스트가 훨씬 명료한 주제를 드러냄에도, 철학자들은 오만 가지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어요. 문학은 철학 텍스트보다 훨씬 심합니다. 설사 어떤 문학이 특정한 뭔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다른 것들을 해석할 수 있죠. 물론 <에코토피아 뉴스>나 <붉은 별: 어떤 유토피아> 같은 소설은 명백히 특정한 주제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런 소설들은 소설보다 사상 서적에 가깝죠. 대부분 소설들은 이런 특징과 거리를 두고요.
그래서 작가들은 소설을 특별히 해석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어떤 작가들은 그런 특별한 해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설 <드래곤 라자>는 아예 독자들에게 그걸 슬쩍 부탁합니다. <드래곤 라자>에서 운차이는 여러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를 들은 이후, 샌슨은 그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운차이는 샌슨을 꾸짖습니다. 만약 특정한 주제를 전달하고 싶었다면, 운차이는 그 주제를 직접 이야기했을 겁니다. 이야기는, 문학은 총체적입니다. 운차이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 샌슨과 후치와 엑셀핸드는 서로 다른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서로 다르게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해석들은 완전히 틀리지 않고, 거기에는 서로 다른 가치들이 있겠죠. 어쩌면 똑같은 소설을 이용해 작가와 독자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해석들 역시 완전히 틀리지 않겠죠. 물론 독자가 보편적인 기준이나 공감대를 너무 넘어간다면, 그런 해석은 많은 반발들을 부를 겁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에서 테리 이글턴은 어떤 동요가 심각한 권력 투쟁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테리 이글턴은 묻습니다. 우리가 동요를 권력 투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여러 독자들은 차이나 미에빌이 쓴 <이중 도시>가 유럽과 이슬람을 비유한다고 생각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유럽(영국) 작가이기 때문이겠죠. 북한 독자들이나 남한 독자들은 <이중 도시>가 분단 국가를 상징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차이나 미에빌은 이런 해석을 경계합니다. 그런 해석은 옳을지 모르나, <이중 도시>에는 오직 그런 해석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일부러 진실을 외면합니다. 사람들은 일부러 안보고 일부러 안듣습니다.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사람들은 일부러 그걸 안 쳐다봅니다. <이중 도시>는 그런 사람들을 풍자하는지 모릅니다. <이중 도시>는 그저 특정한 국제적인 정세들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풍자할지 몰라요.
미국 사회에서 흑인 범죄자들은 꽤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많은 미국 백인들은 흑인들이 폭력적이라고 비난하죠. 하지만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 때문에 흑인들은 오랜 고통과 가난을 겪었고, 그런 상황은 흑인들을 범죄로 몰고 갑니다. 백인들이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을 저질렀기 때문에 흑인들은 범죄자가 됩니다. 이는 아주 간단한 사실 같으나, 많은 백인들은 이런 사실을 직시하지 않아요. 소설 <이중 도시>에는 노예 제도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는 <이중 도시>를 이용해 흑인 범죄자들을 변호하고 미국 백인들을 비판할 수 있겠죠.
독자들이 <이중 도시>를 이용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면, 이런 해석은 유럽 대 이슬람이나 북한 대 남한 같은 특정한 상황보다 훨씬 보편적인 상황을 가리킬 수 있겠죠.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보편적인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문학이 위대하다고 예찬합니다. 이렇게 문학은 수많은 것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어떤 해석을 절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작가가 그걸 아예 부정하기 원한다고 해도,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그런 해석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학은 다양한 해석들을 낳을 수 있어요.
문제는 이겁니다. 독자들이 이런 다양한 해석 방법들을 모든 소설에 골고루 적용할 수 있을까요? 특정한 소설들은 다양한 해석들보다 특정한 주제에 치중하지 않을까요. 가령, SF 소설들은? SF 독자들이 이런 시각(다양한 해석들을 허용하는 시각)을 SF 소설들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특히, 하드 SF 소설들은 다양한 해석들보다 특정한 주제를 뚜렷하게 부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전설이다> 같은 소설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온갖 해석들을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 떼와 맞서는 것처럼 수많은 야근들을 물리치는 직장인을 비유하는지 모르죠.
하지만 SF 독자들이 하드 SF 소설에 이런 시각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노변의 피크닉>처럼 모호한 소설은 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력의 임무> 같은 소설은 훨씬 적은 해석들을 낳겠죠. <중력의 임무>는 자연 과학을 치밀하게 고민하고, 다양한 해석들이 끼어들 여지는 줄어듭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드 SF 소설 역시 소설이고, 독자들은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독자는 <중력의 임무>를 <오디세이아>나 <보물섬>이나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나 기타 해양 소설들에 비유할지 모릅니다. 어쨌든 <중력의 임무>는 해양 모험을 이야기합니다. <중력의 임무>는 인간이 미지의 세계를 방문하는 환희를 담았어요. 하드 SF 소설 역시 여러 보편적인 해석들을 낳을 수 있죠.
문제는 여기에서 SF 독자들이 더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항해 모험을 읽고 싶다면, 미지의 세계를 방문하는 환희를 읽고 싶다면, 왜 독자들이 구태여 <중력의 임무>를 골라야 할까요. 분명히 문학은 열린 대상이고, 모태로서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 역시 문학이고요. 하지만 장르가 장르인 이유는 보편성보다 특수한 규칙들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학이 다양한 해석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해도, 보편적으로 접근하고 싶을 때, 수많은 해석들을 가공하고 싶을 때, 독자들은 왜 장르가 장르인지 고민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