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여자들의 공동체와 가부장적인 동요 본문
박문영이 쓴 <지상의 여자들>은 여자들의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여자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룩합니다. 이런 공동체가 지속 가능한가요? 남자들 없이, 어떻게 여자들이 출산할 수 있나요? 여자들의 공동체가 반드시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나요?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오직 변화가 시작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소설이 외계인들을 암시하기 때문에, 어쩌면 외계인들은 여자들의 공동체를 도와줄지 모릅니다. SF 장르에서 여자들의 공동체는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지상의 여자들>이 변화를 완전히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여자들의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다면, 여자들의 공동체는 가부장 문화를 없앨 겁니다.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더 이상 가부장 문화는 폭력을 휘두르지 못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와 여자를 분리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들을 이용해 폭력을 휘두릅니다. 가부장 문화가 어떤 명분을 주장할 때, 가부장 문화는 남자라는 성을 이용합니다. 태생적으로 남자는 적극적이다, 태생적으로 남자는 공격적이다, 태생적으로 남자는 강하다, 태생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지킨다, 태생적으로 남자는…, 기타 등등.
이건 남자가 가부장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가부장 문화가 남자라는 성별을 억지로 특정한 성향들에 연결한다는 뜻입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남자는 가부장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가부장 문화는 남자들을 이용해 폭력을 휘두르지 못할 겁니다. 더 이상 가부장 문화는 자신이 잘났다고 소리를 꽥꽥 지르지 못할 겁니다. 여자들의 공동체는 가부장 문화를 부수고 많은 것들을 바꿀 겁니다. 일상은 엄청나게 바뀔지 모릅니다. 가부장 문화가 일상을 지배했기 때문에, 일상에서 가부장적인 것들이 사라진다면, 일상은 엄청나게 바뀔 겁니다.
언어와 이야기 역시 그럴 겁니다. 부부라는 단어는 남편과 아내를 가리킵니다. 부모라는 단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리킵니다. 남녀 공학이라는 단어는 남학생과 여학생을 가리킵니다. 이런 단어들에서 여자보다 남자는 우선합니다. 여자들의 공동체에서 이런 단어들은 바뀔지 모릅니다. 새로운 단어들은 여자를 강조하거나 성별을 없앨지 모릅니다. 단어들이 바뀌는 것처럼, 동요들 역시 바뀔 겁니다. 동요 <아빠 힘내세요>는 남자 임금 노동자를 강조합니다. <아빠 힘내세요>는 임금 노동 제도와 자본주의 중산층 가족과 가부장 문화가 옳다고 가정합니다. 여자들의 공동체는 이런 동요를 바꾸거나 없앨지 모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 같은 동요를 부르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작곡가가 이 노래를 만들었을 때, 작곡가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찬양하기 원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작곡가는 이 노래를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남한 사회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작곡가는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가 옳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개인보다 사회는 훨씬 거대합니다. 사회가 삐뚤어졌다고 해도, 개인은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지배 계급은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을 이용해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립니다. <아빠 힘내세요> 역시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립니다.
아이들이 <아빠 힘내세요>를 부른다면, 아이들은 임금 노동 제도와 자본주의 중산층 가족과 가부장 문화를 받아들일 겁니다. 아이들은 당연히 사람들이 회사들에 나가야 하고, 당연히 여자와 남자가 1:1 결혼해야 하고, 당연히 남자가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런 생각들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뒷받침합니다. 여자 아이들 역시 이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여자 아이들은 당연히 남자들이 회사들에 나가고, 반드시 여자와 남자가 1:1 결혼하고, 당연히 아빠가 가족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여자 아이들은 여자가 주체가 된다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여자 아이들이 여자임에도, 여자 아이들은 여자보다 남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빠 힘내세요>가 가부장 문화를 떠들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착취하고 짓밟고 폭행한다고 해도, 여자들은 이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미 여자들이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이 이것들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작곡가가 <아빠 힘내세요>를 만들었을 때, 작곡가는 여자들을 세뇌시키기 원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곡가가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빠 힘내세요>는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립니다. 작곡가가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동요는 지배 계급을 떠받듭니다.
작곡가가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동요는 여자들을 착취하고 짓밟고 폭행(하는 사회 구조를 노래)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납니까? 작곡가가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왜 노래가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립니까? 작곡가가 그저 동요를 만들었을 뿐임에도, 왜 동요가 끔찍한 성 폭행들을 미화합니까? 그 자체로서 이 노래가 문제인가요? 그 자체로서 <아빠 힘내세요>가 잘못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여자들의 공동체에서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를 부르지 못할 겁니다. 남자들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빠를 부르고 싶다고 해도, 아이들은 아빠를 부르지 못할 겁니다.
아이들은 아빠를 상정하지 않을 겁니다. 여자들의 공동체에 아빠들이 없기 때문에, 여자들의 공동체에 임금 노동 제도와 1:1 이성애 결혼과 가부장 사고 방식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가 이상하다고 지적할 겁니다. 노래 가사가 이상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를 부르지 않을 겁니다. 여자들의 공동체에서 <아빠 힘내세요>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뒷받침하지 못합니다. 결국 사회 구조 때문에, <아빠 힘내세요>는 문제가 됩니다. 그 자체로서 <아빠 힘내세요>는 문제가 아닙니다.
작곡가가 여자들을 짓밟기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회 구조 때문에, 이 노래는 성 차별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빠 힘내세요>가 불쾌하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동요보다 가부장 문화를 비판해야 할 겁니다. 그 자체로서 <아빠 힘내세요>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동요를 비판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얄팍한 비난에 불과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람들이 <아빠 힘내세요>를 욕한다고 해도, <아빠 힘내세요>를 비롯해, 동요부터 성인 가요까지, 온갖 노래들은 가부장 문화를 뒷받침할 겁니다. 가요 <이대로도 예뻐>는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보조적인 인간으로 내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요 <이대로도 예뻐>는 그저 개인적으로 외모 지상주의를 탓할 뿐입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가 사회 구조이기 때문에, 아무리 <이대로도 예뻐>가 개인적으로 외모 지상주의를 탓한다고 해도, 여자들은 계속 예쁜 외모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여자 혐오 만물 이론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온건하게 대하든, 남자가 여자를 폭력적으로 대하든, 양쪽 모두 성 차별이 됩니다. 심지어 여자 역시 여자를 '성 차별'합니다. 그 자체로서 가부장 문화가 성 차별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 속에서 남자가 밥을 짓든 죽을 쑤든 멜란지 스파이스로 푼디 볶음밥을 만들든, 결국 근본적으로 남자는 성 차별을 저질러야 합니다.
남자가 탕수육을 부어먹든 찍어먹든, 이건 성 차별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가 너무 끔찍하게 폭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여자들은 모든 남자가 잠재적인 성 폭행 범죄자라고 느낄 겁니다. 여자들에게 데이트 상대 남자와 골목길의 낯선 남자 모두 잠재적인 성 폭행 범죄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가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다면, 어떤 여자들은 이게 성 차별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피해 망상에 가까우나, 극심한 상황 속에는 정상적인 윤리 판단이 없습니다. 극심한 상황 속에서 약자들이 피해를 망상한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탕수육 부어먹기는 성 차별이 될지 모릅니다. 가부장 문화가 너무 끔찍한 폭력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말 근본적인 문제는 탕수육 부어먹기보다 가부장 문화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모든 남자는 계속 잠재적인 성 폭행 범죄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남자가 군대 가산점 제도에 반대하고 엄마 육아 휴직에 동의한다고 해도, 가부장 문화는 가부장 문화입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백인 주인이 흑인 여자 노예를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도, 노예는 자유민이 되지 않습니다. 노예는 그저 노예에 불과합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백인 주인이 흑인 여자 노예를 아주 친절하게 대한다면, 흑인 여자 노예는 백인 주인이 못된 꿍꿍이를 감춘다고 의심할지 모릅니다.
이게 피해 망상이라고 해도, 흑인 여자 노예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노예 제도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뒷통수를 긁기 위해 백인 주인이 손을 들었다고 해도, 흑인 여자 노예는 백인 주인이 손으로 자신을 때릴 거라고 오해할 겁니다. 뒷통수를 긁는 행위는 일상적인 행위이나, 약자에게 일상적인 행위는 폭력이 될지 모릅니다. 사회 구조(노예 제도)가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노예 제도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백인들은 함부로 뒷통수를 긁지 못할 겁니다. 탕수육 부어먹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남자들이 개인적으로 여자들을 온건하게 대한다고 해도, 여전히 여자는 그저 보조적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아를 비롯해 돌봄 노동들을 사회화해야 하고, 생산 수단들을 공유(국유)해야 하고, 사회적인 부(富)로 성 해방 운동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방법들 역시 충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너무 오랜 동안 가부장 문화가 너무 끔찍한 폭력들을 휘둘렀기 때문에, 심지어 이런 방법들조차 미진할지 모릅니다.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계속 모든 남자가 잠재적인 성 폭행 범죄자라고 간주할 겁니다. 여자들이 뒷골목을 걸을 때마다, 여자들은 온갖 그림자들과 혼자 불안한 숨바꼭질을 벌여야 할 겁니다.
이렇게 사회 구조가 문제이기 때문에, <아빠 힘내세요>는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작곡가가 선량한 마음으로 <아빠 힘내세요>를 만들었다고 해도, 사회 구조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모든 남자를 잠재적인 성 폭행 범죄자로 만듭니다. 흔히 많은 평론가들은 작가 의도를 중시합니다. 분명히 작가 의도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하지만 <아빠 힘내세요>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 구조가 삐뚤어졌다면, 작가가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문학은 지배적인 관념을 뒷받침할 겁니다. 그래서 평론가가 문학을 해석할 때, 평론가는 어떻게 현실(사회 구조)이 문학을 생산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평론가가 이런 생산 과정을 파악하기 원한다면, 평론가는 현실(사회 구조)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평론가가 가부장 문화를 긍정한다면, 아무리 평론가가 현실(사회 구조)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평론가는 생산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평론가는 소설 속에서 여자 등장인물들이 소극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으나, 평론가는 소설 속의 여자 등장인물들과 현실 속의 여자들을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가부장 문화가 소극적인 여자 등장인물을 만든다고 해도, 평론가는 이런 연결 고리를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평론가는 오직 소설만 떠들 뿐입니다. 이런 평론가는 얄팍합니다.
이런 평론가는 1차원적입니다. 이런 평론가는 초월적인 시공간 속에 소설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이런 평론가는 현실(사회 구조)과 소설을 분리합니다. 현실에서 소설이 절대 독립하지 못함에도, 1차원 평론가는 현실과 소설을 분리합니다. 사회 구조가 무엇이든, 1차원 평론가는 오직 소설만 열심히 떠듭니다. 사회 구조 속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성 폭행한다고 해도, 남편들이 아내들을 구타한다고 해도, 여자들이 지참금, 할례, 명예 살해, 육아 휴직, 편파적인 인사, 성 상품화에 부딪힌다고 해도, 1차원 평론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시공간 속에서 소설이 있기 때문에, 1차원 평론가는 얼마든지 사회 구조를 외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런 수두룩한 1차원 평론가들은 수두룩한 1차원 평론들을 양산합니다. 영화 커뮤니티 사이트 회원부터 명문 대학 교수까지, 수두룩한 1차원 평론가들은 수두룩한 1차원 평론들을 양산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1차원 평론이 전부라고 오해하고, 사람들은 다시 1차원 평론들을 열심히 양산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작가가 무엇을 원했는지만 중시할 겁니다. 사람들은 <아빠 힘내세요>가 나쁘지 않다고 주장할 겁니다. 작곡가가 성 차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작가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 사회 구조입니다. 이 게시글은 <아빠 힘내세요>를 언급했으나, 다른 많은 창작물들, 심지어 하드 SF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 의도보다 사회 구조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부어먹기보다 찍어먹기입니다. '탕수육은 찍먹'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