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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 장르 범주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 장르 범주

OneTiger 2020. 1. 26. 20:22

[괴수 싸움박질과 마가렛 앳우드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지라 어스는 어떤가요?]

 

 

사람들이 소설, 영화, 게임 같은 창작물들을 평가할 때, 종종 사람들은 장르들을 언급합니다. 장르는 소설, 영화, 게임 같은 창작물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이 됩니다. 사람들은 장르에 특정한 공식들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창작물은 특정한 공식을 따르거나 적어도 창작물은 특정한 공식을 의식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특정한 장르에 속함에도, 소설이 장르 공식을 따르지 않거나 의식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장르로서 소설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겁니다. 특히, 사이언스 픽션처럼, 만약 소설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사람들은 장르 공식을 훨씬 구체적으로 적용할 겁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바이오펑크 장르에 속한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은 거대 괴수 장르보다 환경 아포칼립스에 훨씬 가깝다.", "비디오 게임 <Warlock 2: The Exiled>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중세 유럽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에 속한다. 하지만 양쪽 모두 4X 장르에 속한다." 이런 평가들은 장르를 '분류'합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돼지구리 같은 개조 생명체를 소설 <미친 아담>에 집어넣었습니다. 개조 생명체는 바이오펑크 설정에 속합니다. 그래서 마가렛 앳우드는 바이오펑크 작가가 됩니다. 독자는 어떻게 마가렛 앳우드가 바이오펑크 공식을 이용하는지 평가할 겁니다.

 

 

만약 소설 <미친 아담>이 바이오펑크 공식을 제대로 따르거나 제대로 의식한다면, 독자는 바이오펑크로서 <미친 아담>을 호평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미친 아담>이 바이오펑크 공식을 제대로 의식하나요? 대답은 긍정적입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쓴 이후, 바이오펑크 울타리에서 창조주와 피조물, 종속과 해방, 생물종 차별은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시장 경제가 유전 공학 기술을 휘두르기 때문에, 바이오펑크 울타리에서 자본주의는 만악의 근원이 됩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처럼, 개조 생명체들은 자연 생태계를 교란할지 모릅니다. <미친 아담>은 이런 주제들을 의식합니다.

 

<미친 아담>은 이런 주제들을 응용하고, 여러 생물종들이 협력한다고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상업적인 과학 기술을 비판하고, 생물 다양성을 존중하고, 거룩하고 서글픈 유사 신화가 됩니다. 설정, 주제, 사상 측면에서 <미친 아담>에게 여러 오류들과 한계들이 있다고 해도, <미친 아담>은 인상적인 바이오펑크 소설입니다. 마가렛 앳우드 본인이 SF 작가를 부정한다고 해도, 독자는 <미친 아담>이 인상적인 SF 소설, 바이오펑크 소설이라고 호평할 수 있습니다. 소설 <미친 아담>처럼, 사람들이 창작물을 평가할 때, 장르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거대 괴수 장르는 거대 괴수들이 치열하게 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거대 괴수 장르에서 거대 괴수는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다른 거대 괴수, 거대 기계와 싸워야 합니다. 영화 <콩: 해골섬>은 킹콩이 미군 헬리콥터 편대를 습격하고, 스컬크롤러가 모나크 탐사대를 습격하고, 알파 스컬크롤러와 킹콩이 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영화 <콩: 해골섬>에서 이런 습격들과 싸움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콩: 해골섬>이 재미있는 거대 괴수 장르라고 호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콩: 해골섬>이 수작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콩: 해골섬>은 재미있는 거대 괴수 장르입니다.

 

반면,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은 습격과 싸움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괴수 행성> 3부작은 전형적인 거대 괴수 장르보다 환경 아포칼립스 장르에 가깝습니다. 진보한 산업 문명은 거대 괴수들을 부르고, 거대 괴수들은 산업 문명을 파괴하고, 지구 자연 환경은 바뀌고, 사람들은 자연 생태계 변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괴수 행성> 3부작은 진보한 산업 문명보다 소규모 생태 공동체가 대안이라고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괴수 행성> 3부작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이건 너무 심각한 오류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괴수 행성> 3부작은 환경 아포칼립스 공식을 따릅니다.

 

 

영화 <콩: 해골섬> 역시 자연과 문명을 고찰하나, <콩: 해골섬>에서 자연과 문명보다 괴수 싸움박질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반면, <괴수 행성> 3부작이 거대 괴수 장르에 속함에도, 이 3부작은 환경 아포칼립스 공식을 추구합니다. 시청자들은 <괴수 행성> 3부작이 (거대 괴수) 장르를 배신한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미친 아담>처럼, 만약 <괴수 행성> 3부작이 훌륭한 환경 아포칼립스였다면, 시청자들은 이 3부작이 새로운 전형을 확립했다고 호평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괴수 행성> 3부작은 너무 진부합니다. 이런 진부함 속에서 "생명은 승리야."라는 대사는 감동적이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창작물을 평가하기 위해 사람들이 장르를 언급할 때, 사람들은 기대 심리를 드러냅니다. 이미 장르가 어떤 전형을 확립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장르로서 창작물이 전형을 보여주거나 의식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콩: 해골섬>이 거대 괴수 장르이고, 거대 괴수 장르가 싸움박질 전형을 확립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거대 괴수 장르로서 <콩: 해골섬>이 전형(킹콩과 스컬크롤러 싸움박질)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적인 창작물들보다 전형으로서 장르는 우선합니다. 개별적인 창작물들보다 전형으로서 장르는 선천적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장르 공식들이 고정적인 실체인가요?

 

 

게임 플레이어들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개성적인 외계 종족들과 수많은 행성들과 다양한 첨단 과학 기술들과 전술적인 우주 함대 전투를 제시하기 때문에,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개성적인 외계 종족들과 수많은 행성들과 다양한 첨단 과학 기술들과 전술적인 우주 함대 전투를 제시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게 의무인가요? 스페이스 오페라가 개성적인 외계 종족들을 반드시 제시해야 하나요? 이게 고정적인 실체인가요? 이런 전형, 스페이스 오페라 공식이 바뀌지 못하나요?

 

소설 <듄>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하지만 <듄>은 외계 종족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제국 황제부터 프레멘 소녀까지, 주연 등장인물들은 인간들입니다. <듄>이 스페이스 오페라임에도, <듄>은 외계 종족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듄>은 우주 함대 전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듄>은 크리스나이프 싸움 같은 단검 대결에 훨씬 치중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독자들이 <듄>을 비판해야 하나요? 소설 <스타타이드 라이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타타이드 라이징>에는 여러 외계 종족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여러 외계 종족들보다 신종 돌고래들은 훨씬 중요합니다.

 

 

외계 바다에서 신종 돌고래 우주선이 침몰했기 때문에, <스타타이드 라이징>에서 우주 함대 전투보다 외계 해저 풍경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스타타이드 라이징>에서 '스타'타이드보다 스타'타이드'는 훨씬 중요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독자들이 <스타타이드 라이징>을 비판해야 하나요? 하지만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 독자들은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을 좋아합니다. 두 소설이 장르 공식(외계 종족들과 우주 함대 전투)을 제대로 따르지 않음에도, 왜 장르 독자들이 두 소설을 호평하나요?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이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다르다고 해도, 두 소설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게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모두 똑같이 지적 문명이 드넓은 우주를 항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달리,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은 우주 항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두 소설은 사막 행성 생태계와 신종 돌고래들에게 치중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스터 오브 오리온>처럼,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에서도 드넓은 우주 항해는 근본적인 배경 설정입니다. 게다가 <마스터 오브 오리온>처럼,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은 우주 항해 시대와 장엄한 신화를 뒤섞고 우주 신화를 완성합니다.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모두 우주 서사시입니다.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세 이야기들에서 우주 신화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됩니다. 우주 신화라는 근본적인 유사성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이 개성적인 외계 종족들과 우주 함대 전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사막 행성 공학과 해양 종족 우주선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유사성(우주 신화) 아래에서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SF 팬들에게 여전히 <듄>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다를지 모릅니다.

 

<듄>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똑같은 우주 신화이나,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우주 함대 전투를 보여줍니다. <듄>은 우주 어뢰보다 크리스나이프를 훨씬 중시합니다. "이게 뭐야! 어떻게 고작 단검 대결 따위가 '스페이스' 오페라가 될 수 있지? 왜 '스페이스' 오페라가 사막 생태계 공학을 이야기하지? '스페이스' 오페라 팬으로서 우리는 우주 함대 전투를 원해!" 이렇게 SF 팬들은 <듄>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다르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SF 팬들이 스페이스 오페라 공식으로서 우주 함대 전투를 기대하기 때문에, <듄>은 기대 심리를 충족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이런 기준에서 <듄>보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훨씬 충실한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비단 내용, 설정만 아니라 형식, 매체 역시 문제입니다. 국내 SF 문화에서 표도기님(전홍식 관장님)에게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똑같이 중요할 겁니다. 표도기님은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SF 게임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입니다. 한때 표도기님은 게임 잡지 기고자였고, 여전히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표도기님은 종사합니다. 반면, 국내 SF 문화에서 듀나님, 박상준님, 고장원님에게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듀나님은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 영화를 훨씬 많이 이야기합니다. 박상준님과 고장원님 역시 4X 게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박상준님과 고장원님은 소설, 영화를 중시합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4X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원, 인구, 병력, 기술, 문화 같은 많은 수치들을 계산하고 고려해야 합니다. 독자가 <스타타이드 라이징>을 읽는 동안, 독자는 수치들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글자들을 읽고 사상, 심리, 연대기, 세계관을 이해합니다. 반면, 게임 플레이어는 수치들을 계산합니다. 소설과 4X 게임은 다른 매체이고, 그래서 듀나님은 4X 게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모릅니다. 표도기님에게 소설과 4X 게임은 똑같이 중요하나, 듀나님에게 4X 게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똑같은 장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아웃 오브 안중입니다.

 

 

[왼쪽은 바이오펑크를 중시하고, 오른쪽은 우주 함대 전투를 중시하나, 양쪽은 똑같은 우주 신화입니다.]

 

 

형식과 매체처럼, 작가 의도 역시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20세기 초반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을 때, 비디오 게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20세기 초반 서구 문명에서 20세기 후반 컴퓨터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반 SF 작가들이 우주 신화를 쓰는 동안, 그들이 <마스터 오브 오리온> 같은 4X 비디오 게임을 인식했나요? 프랭크 허버트가 2016년에 <마스터 오브 오리온> 리메이크가 나타날 거라고 인식했나요? 만약 데이빗 브린이 우주 4X 게임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똑같은 우주 신화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나요?

 

하지만 비록 데이빗 브린이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 팬들은 <스타타이드 라이징>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똑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울타리에 들어간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SF 작가들이 21세기 초반 우주 4X 게임들을 알지 못했다고 해도, 20세기 초반 우주 신화 소설과 21세기 초반 우주 4X 게임은 똑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울타리에 들어갑니다. 문화 예술 평론에서 작가 의도는 중요하나, 장르를 분류하기 위해 평론가들은 작가 의도보다 근본적인 유사성을 이용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분류처럼, 작가 의도는 창작물을 절대적으로 규정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장르 창작물이 장르 공식을 따르거나 의식해야 한다고 기대하나, 이런 기대 심리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은 아주 다릅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스페이스 오페라에 속합니다. <듄>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다르고, <듄>과 <스타타이드 라이징>은 다릅니다. 소설 <사소한 정의>처럼, 독자들은 예외적인 우주 신화들을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설들은 똑같이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 속합니다. 장르 공식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장르를 언급할 때, 사람들은 고정적인 실체보다 유동적인 변화, 커다란 흐름을 인식해야 할 겁니다.

 

어쩌면 몇 십 년 이후, 또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은 또 다른 고유한 전형을 확립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이런 고유한 전형은 장르 판도를 뒤흔들지 모릅니다. SF 독자들은 <오벨리스크의 문>이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 장르를 뒤섞고 뒤집는다고 호평합니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사이언스 픽션이나, 이 소설에서 판타지 분위기는 아주 강렬합니다. 언뜻 <오벨리스크의 문>은 판타지 같으나, 총체적인 배경 설정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오벨리스크의 문>에서 장르 공식들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장르 공식들을 뒤흔듭니다. 이런 사례는 '흐르는 강물처럼' 장르가 연이어 흐르고 흐른다고 증명합니다.

 

 

이 게시글에서 둘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소설 <미친 아담>은 바이오펑크입니다. 동시에 <미친 아담>은 무너진 산업 문명과 자연 환경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유전 공학들을 함부로 이용하고 자연 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에, <미친 아담>은 소규모 생태 공동체와 새로운 인류를 제시합니다. 애니메이션 <괴수 행성> 3부작 역시 무너진 산업 문명과 자연 환경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미친 아담>처럼, <괴수 행성> 3부작은 소규모 생태 공동체와 새로운 인류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미친 아담>과 <괴수 행성>은 똑같이 환경 아포칼립스에 속할 수 있습니다. <괴수 행성>은 <콩: 해골섬>보다 <미친 아담>에 가깝습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쓴 <에코토피아 뉴스>는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비판하고 생태 사회주의를 제시합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와 소설 <미친 아담>과 애니메이션 <괴수 행성>은 모두 생태계 변화, 환경 오염, 생태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에코토피아 뉴스>가 <미친 아담>, <괴수 행성>과 함께 똑같은 장르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나요? 하지만 <미친 아담> 및 <괴수 행성>과 달리, <에코토피아 뉴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유토피아에 훨씬 가깝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는 새로운 인류, 첨단 유전 공학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19세기 후반 사변 소설이 첨단 유전 공학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나요?

 

 

<에코토피아 뉴스>가 유토피아에 가깝고, 이 소설이 유전 공학을 이야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에코토피아 뉴스>와 <미친 아담> 및 <괴수 행성>은 다릅니다. 하지만 <에코토피아 뉴스>와 <미친 아담>과 <괴수 행성>이 모두 생태계 변화, 환경 오염, 생태 공동체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세 이야기들에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무슨 해석이 옳은가요? <에코토피아 뉴스>가 <미친 아담> 및 <괴수 행성>과 다른가요? 아니면 <에코토피아 뉴스>와 <미친 아담>과 <괴수 행성>이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가나요? 이런 사례처럼, 장르는 단단한 덩어리보다 끊임없는 논의에 가깝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장르가 단단하다고 간주한다면, 이건 너무 단기적이고 1차원적인 시각일 겁니다. <에코토피아 뉴스>가 <미친 아담> 및 <괴수 행성>과 다르다고 해도, 세 이야기들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 가지 이야기들을 언급하고 현실 속의 환경 오염들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이 다르다고 해도, 환경 오염이라는 커다란 전제 속에서 SF 팬들은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몇 십 년 이후, 새로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은 고유한 전형을 확립하고 <에코토피아 뉴스>, <미친 아담>, <괴수 행성>과 어울릴지 모릅니다.

 

 

19세기 후반 <에코토피아 뉴스>, 21세기 초반 <고지라: 괴수 행성>, 몇 십 년 이후의 새로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까지, 여기에는 '커다란 흐름'이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 <괴수 행성>, 새로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이 모두 대대적인 환경 오염, 생태계 변화를 중시하기 때문에, SF 평론가들은 이런 커다란 흐름이 생태학 SF 장르라고 분류/규정할 수 있습니다. 비록 생태학 SF 장르가 공식적인 SF 하위 장르가 아니라고 해도, 윌리엄 모리스가 <고지라: 괴수 행성>을 알지 못했고 생태학 SF 장르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SF 평론가들은 커다란 흐름으로서 생태학 SF 장르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가 유토피아에 가깝고, 이 소설이 첨단 유전 공학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태학 SF 울타리 안에서 <에코토피아 뉴스>와 <미친 아담>과 몇 십 년 이후의 새로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은 비슷한 분류가 됩니다. SF 평론가들은 비단 <에코토피아 뉴스>와 <미친 아담>과 <고지라: 괴수 행성>과 미지의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만 아니라 다른 많은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듄>과 <오벨리스크의 문>이 대대적인 생태계 변화, 자연 환경 변화를 중시하기 때문에, <듄>과 <오벨리스크의 문> 역시 커다란 흐름으로서 생태학 SF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비단 생태학 SF만 아니라 다른 흐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뭔가를 '분류'할 때, 사람들은 '커다란 흐름'을 인식해야 합니다. 분류는 단기적이고 1차원적인 시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통상적으로 남한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언급할 때, 남한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와 독재 국가를 연결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훨씬 부유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악랄한 독재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단기적이고 1차원적인 시각입니다. 이런 시각(북한이 독재 국가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독재이다)은 커다란 흐름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북한이 나타나기 전에,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파리 코뮌은 나타났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파리 코뮌이 프롤레타리아 사회라고 호평했으나, 지배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사회, 파리 코뮌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했습니다. 1차 인터내셔널은 학살을 막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가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본가 계급은 민족 국가를 세우고, 군대를 창설하고, 적대 세력을 끔찍하게 학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사회주의 세력으로서 1차 인터내셔널은 그저 노동자 계급 협회에 불과했습니다. 1차 인터내셔널은 아주 커다란 사회주의 세력이었으나, 약자로서 1차 인터내셔널은 파리 코뮌을 돕지 못했습니다.

 

 

약자로서 1차 인터내셔널이 파리 코뮌을 돕지 못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먼저 학살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잔인무도하게 학살했습니다. 파리 코뮌과 1차 인터내셔널 이후에도 이런 학살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약자 사회주의는 강자 자본주의에게 힘겹게 저항해야 했습니다. 만약 자본주의 강대국이 첩자들을 보내고, 반동적인 쿠데타를 계획하고, 사회주의 약소국을 고립시킨다면, 사회주의 약소국이 무엇을 해야 하나요? 사회주의 약소국은 언론을 통제하고, 비밀 경찰을 운영하고,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구속해야 합니다. 이런 방법들은 반동적인 쿠데타를 막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방법들이 독재 국가를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사회주의는 언론을 통제하고, 비밀 경찰을 운영하고,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구속하나, 이런 방법들은 독재 국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독재 국가로 너무 쉽게 바뀝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독재 국가로 바뀐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사회주의는 독재가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압박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독재가 됩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약자들은 힘겹게 살아가야 합니다. 약자들은 타락하거나 삐뚤어집니다. 사회주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약자로서 사회주의는 타락하거나 삐뚤어집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사회주의는 타락하거나 삐뚤어집니다. 아니면 사회주의는 죽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타락하거나 망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주의 잘못이 아닙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폭언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가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닌 것처럼,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주의 잘못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파리 코뮌 이후에도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연이어 학살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사회주의 흐름에 '아주 약간' 관심을 기울인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끔찍하게 학살해왔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커다란 흐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때, 19세기 후반 파리 코뮌부터 21세기 초반 남아메리카 좌파까지, 사람들은 커다란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커다란 흐름 속에서 북한은 존재합니다. 커다란 흐름 속에서 북한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태학 SF 범주에서 <고지라: 괴수 행성>이 혼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주의 흐름 속에서 북한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북한을 비롯해 사회주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생태학 SF 범주에서 <고지라: 괴수 행성>이 혼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SF 팬들은 <에코토피아 뉴스>를 <괴수 행성>에 적용하고 사회주의를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피규어 전시가 울창한 삼림을 강조하는 것처럼, 고지라 어스는 생태학 SF 범주에 속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고지라: 괴수 행성>에게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대대적인 환경 오염, 생태계 변화는 근본적인 유사성입니다. 왜 이런 근본적인 유사성이 나타납니까? 왜 대대적인 환경 오염, 생태계 변화가 나타납니까? 현실 속에서 세계화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고, 제국주의로 확장하고, 온갖 환경 범죄들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세계화 자본주의, 서구 제국주의가 환경 범죄들을 저지르기 때문에,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에게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생태 사회주의 문학으로서 <에코토피아 뉴스>는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비판합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고지라: 괴수 행성>에게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고, 근본적인 유사성이 대대적인 환경 오염이고,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가 환경 범죄들을 저지르고, <에코토피아 뉴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에, SF 팬들은 사회주의를 <괴수 행성>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 '배후'에는 똑같이 환경 범죄자 자본주의가 있습니다.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에게 자본주의 환경 오염은 똑같은 생산 조건입니다. SF 팬들이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을 멀리 떨어뜨리기 원한다고 해도, SF 팬들은 이런 배후, 생산 조건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괴수 행성>에게 배후가 있는 것처럼, 북한에게도 배후가 있습니다. 환경 범죄자 자본주의 때문에, 생태학 SF <괴수 행성>이 나타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끔찍하게 학살하기 때문에, 북한은 나타납니다. 생태학 SF 범주 안에서 <괴수 행성>이 혼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갑자기 하늘에서 북한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학살했고, 이런 흐름 속에서 북한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북한을 논의할 때, 사람들은 비단 북한만 아니라 19세기 후반 파리 코뮌과 21세기 초반 남아메리카 좌파를 함께 언급해야 합니다. 이게 커다란 흐름, 배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강대국이 약소국을 공격한다면, 약소국은 자신을 폐쇄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 만약 강대국이 약소국을 공격한다면, 약소국은 내부를 철저하게 폐쇄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약소국보다 강대국입니다. 사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이런 커다란 흐름, 배후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독재 국가 북한이 뚝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중세 문학이 거대 공장과 시커먼 매연과 더러운 폐수를 언급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생태학 SF가 뚝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하늘에서 북한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괴수 행성>이 사회주의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에게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SF 팬들은 사회주의를 <괴수 행성>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니, 왜 <괴수 행성>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나? 사회주의는 독재 국가이다. 북한을 봐라. 사회주의는 환경 아포칼립스 대안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어떤 SF 팬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이런 시각은 단기적이고 1차원적입니다. SF 팬들이 <에코토피아 뉴스>와 <괴수 행성>을 비교하는 동안, SF 팬들은 비단 생태학 SF로서 커다란 흐름만 아니라 사회주의로서 커다란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겁니다.

 

 

※ 그림 <Kong - Skull Island 2017 (Legendary) End Battle> 출처: Karl Lindberg,

https://www.artstation.com/artwork/LbB0P

 

※ 사진 <Godzilla 2017 @ GODZILLA SHOW SPACE> 출처: otaku-kabob,

https://myfigurecollection.net/picture/18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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