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에일로라>의 교활한 고양이 인조인간 본문
단편 소설 <에일로라>는 폴 디 필리포가 쓴 복수극입니다. 이야기는 다소 전형적입니다. 재벌 가문이 있고, 사생아가 있습니다. 사생아는 막대한 유산을 받을 수 있었으나, 가문은 사생아를 모독하고 추방합니다. 사생아는 가문에게 복수하고 유산을 되찾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꽤나 흔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기 위해 구태여 독자가 SF 소설을 찾아야 할까요. 물론 <에일로라>는 재미있는 복수극입니다. SF 요소들을 제외한다고 해도, 주인공이 음모를 깨닫고 모략을 꾸미고 복수를 실행하는 과정은 흥미진진합니다.
언제나 이런 복수극은 살이 떨리는 긴장감을 연출하고 통쾌한 한 방을 선사합니다. 이런 복수극은 소설 주인공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다시 건져올립니다. 그런 과정에서 독자는 추락과 상승이라는 극명한 대조를 겪고, 통쾌함을 느낍니다. 이런 느낌은 독자들이 복수극을 읽는 주된 이유들 중 하나일 겁니다. 덕분에 자극적인 3류 치정 드라마들은 이런 이야기를 활용하곤 합니다. 작가가 너무 자극을 추구한다면, 이런 이야기는 추잡하고 통속적인 굴레에 빠질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복수극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기본적으로 <에일로라>는 재미있는 복수극입니다. 그것 이외에 SF 소설로서 <에일로라>가 드러내는 장점이 뭘까요. <에일로라>는 스페이스 오페라이자 바이오펑크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우주를 돌아다니고 외계 광물을 채굴하는 탐험가이자 지질 전문가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우주 세계와 외계 희귀 광물은 꽤나 흔한 소재이고, 별로 특별하지 않죠. 작가 역시 희귀 광물에 별로 공을 들이지 않았고요. 바이오펑크는 좀 더 독특합니다. 소설 속에는 인간들을 섬기는 유사 인간 하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인조인간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조인간들과 달리, 그들은 반인반수에 가깝습니다. 유전 공학자들은 인간과 각종 동물들의 유전자들을 결합했고 인조인간 하인들을 만들었습니다. 소설 주인공과 동행하는 인조인간 하인은 고양이 인간입니다. 게다가 이 고양이 인조인간은 암컷이죠. 흠, 이른바 집사들(고양이 애호가들)은 <에일로라>를 좋아할지 모르겠군요. 저는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는 독자는 <에일로라>에게 호감을 보일지 모르죠. 이런 설정은 로망을 자극합니다. 만약 우아하고 늘씬하고 민첩하고 교활한 고양이가 인간처럼 똑똑하다면? 그런 고양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우리가 SF 소설을 읽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편견과 고정 관념을 깨고, 기나긴 자연 생태계와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 사회를 전망하기 위해 SF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 겁니다. 동시에 저는 SF 독자들이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그 누군가는 명석한 천재일 수 있고, 용감하고 날쌘 초인일 수 있고, 완전히 도덕적인 성인일 수 있고,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자일 수 있어요. 아주 명석한 천재가 인류 문명을 진보로 이끈다면? 용감한 초인이 비극적인 학살을 막고 사람들을 구한다면? 완전히 도덕적인 인공 지능이 타락하지 않는 정부를 건설한다면? 모든 재산을 공유하는 외계인들이 유토피아를 이룩한다면?
우리는 그런 인간상을 꿈꾸고, SF 소설 속에서 그런 인간상을 만나기 원합니다. 저는 SF 독자들이 그걸 원한다고 생각해요. <에일로라> 역시 비슷합니다. 만약 고양이의 장점들을 선보이는 인조인간이 존재한다면? 그런 인조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아낀다면? 이건 꽤나 로망을 자극하는 발상입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소설에 흥미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양이 인조인간의 행동이 진짜 고양이와 얼마나 닮았는지 비교하고 그런 부분을 재미있게 읽겠죠. 고양이 같은 인간. 그저 비유가 아니라 진짜 고양이 유전자를 포함하는 인간. 고양이 애호가들이 이런 설정을 좋아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양이 애호가들이 이런 설정을 꿈꾸지 않을까요?
<에일로라>는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별로 하드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유전 공학 설정은 자세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에일로라>는 짧은 복수극이고, 그런 역할에 충실합니다. 하지만 저는 고양이 인조인간이 단편 소설을 좀 더 특별하게 꾸민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소설 주인공의 동반자가 고양이 인조인간이 아니라 그저 기계 로봇이었다면? <아이 로봇> 같은 소설에 나오는 기계 로봇이 소설 주인공과 동행했다면? 아마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능글맞고 교활하고 엉큼하고 은밀하고 우아한 고양이는 복수극과 잘 어울립니다.
아마 <장화 신은 고양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누군가는 이런 고양이 인조인간을 상상했을 겁니다. 저는 정말 고양이가 능글맞고 교활하고 엉큼하고 은밀하고 우아한 동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표범 같은 동물은 정말 교활하고 치명적이고 우아하죠. 따라서 고양이 역시 그럴 것 같습니다. 적어도 고양이의 대중적인 인상은 그렇습니다. 폴 디 필리포는 그런 인상을 인조인간에 투영했어요. 폴 디 필리포가 이런 분위기를 의도했을까요? 저에게는 그걸 알 방법이 없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양이 인조인간은 그런 분위기를 풍깁니다.
인조인간 이외에 다른 바이오펑크 설정 역시 등장합니다. 각종 살덩이들을 이용해 모습을 바꾸는 기술은 필수적인 기술이겠죠. 특히, 이런 복수극에서 그런 기술은 필수적일 겁니다. 가문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반적으로 소설 주인공은 바이오펑크 기술에 의지하는군요. 하지만 단편 소설이기 때문에 몇몇 아쉬움이 있습니다. 작가가 소설 주인공과 고양이 인조인간의 관계를 좀 더 부각했다면, 분위기가 훨씬 흥미로웠을 겁니다. 작가는 치명적이고 우아한 고양이 여인을 만들었으나, 이런 설정을 한껏 살리지 못했어요. <에일로라>가 단편 소설이기 때문에 작가에게 별로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