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특허권 침해>, 웃음과 분노의 대기업 횡포 본문
낸시 크레스가 쓴 <특허권 침해>는 질병 치료약과 유전자 권리를 둘러싼 소송을 그립니다. <특허권 침해>에는 유전 공학이나 개조 생명체가 자세히 나오지 않으나, 질병 치료약을 둘러싼 소송은 그런 분위기를 살짝 풍깁니다. <허공에서 춤추다> 같은 소설처럼 낸시 크레스는 유전 공학이나 개조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이는 낸시 크레스가 유전 공학 전문 작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 소설들에서 낸시 크레스는 그런 소재를 선보였고, 그런 분야에서 독특한 솜씨를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특허권 침해> 역시 그렇고요.
하지만 이 단편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 공학이나 개조 생명체보다 대기업의 탐욕일 겁니다. 소설 속에서 질병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어떤 기업은 질병 치료약을 발표하고 커다란 성공을 거둡니다. 문제는 기업이 치료약을 자체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제약 기업은 질병에 걸리지 않은 어떤 시민에게 유전자를 받았고, 그걸 이용해 질병 치료약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유전자를 제공한 시민은 수익을 얻기 원하고, 기업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업이 대처했을까요? 낸시 크레스는 기업이 대처하는 과정을 서간문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소설들과 달리, <특허권 침해>는 서간문 형식을 선택했습니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간결한 편지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편지들은 대기업 간부들의 속내를 직접 드러냅니다. 대기업 간부들은 서로 편지들을 주고 받고, 편지들은 대기업 간부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간결한 편지들은 허례허식을 생략하고, 직접적으로 대기업의 속내를 폭로합니다. 만약 <특허권 침해>가 일반적인 소설이었다면, 이 소설은 다른 묘사나 표현에 치중해야 했을 테고, 대기업의 속내를 직접 파헤치지 못했을 겁니다.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방법은 서간문 형식처럼 효과적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특허권 침해>는 어지간한 사회주의 SF 소설보다 훨씬 자본주의를 기가 막히게 풍자합니다. 아마 유명한 사회주의 SF 소설들과 비교한다고 해도, <특허권 침해>는 그것들보다 훨씬 통렬할 겁니다. 저는 낸시 크레스가 서간문 형식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때때로 이런 문학 기법은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철학보다 뛰어날 수 있을 겁니다.
<특허권 침해>에서 서간문 형식은 과학적 상상력보다 훨씬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언뜻 <특허권 침해>는 별로 SF 소설 같지 않습니다. 유전 공학과 유전자 권리 문제는 이미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낸시 크레스가 이 소설을 썼을 때, 이런 이야기는 SF 분위기를 풍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21세기 초반에 이런 이야기는 SF 소설보다 테크노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유전 공학 문제는 현실에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기술적 특이점이나 정보 혁명이나 사이보그를 많이 이야기하나, 유전 공학 역시 우리가 무시하지 못할 과학 기술 분야입니다. 저는 유전 공학이 얼마나 많이 세상을 바꿀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유전 공학이 강화 약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새로운 개조 미생물들이 살아있는 그레이 구를 만들 수 있을까요? 정말 유전 공학이 똑똑한 탐지견이나 인조인간 하인을 만들 수 있을까요? 왜 인간의 하인이 기계 로봇이어야 할까요? <모로 박사의 섬>처럼 인간의 하인은 반인반수 인조인간이 될지 모릅니다. 재미있게도 사이버펑크로서 가장 유명한 <블레이드 러너>는 기계 로봇이 아니라 인조인간을 이야기하죠. 하지만 유전 공학이 그저 개량 작물이나 개량 가축에서 그치지 않을까요? 바이오펑크 소설들이 상상하는 설정들이 그저 설정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정말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각종 유전 공학 문제들을 볼 때마다, 저는 유전 공학이 정말 세상을 크게 바꿀지 모른다고 느낍니다. 비록 유전 공학이 똑똑한 개조 동물을 만들지 못한다고 해도.
하지만 유전 공학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특허권 침해>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전 공학은 중심 소재가 아닙니다. <특허권 침해>에서 유전 공학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대기업의 탐욕이고 자본주의의 횡포입니다. 짧은 편지들을 통해 <특허권 침해>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횡포를 부리는지 신나게 고발합니다. 상황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통렬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웃음과 분노를 함께 선사합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대기업들이 좀 더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특허권 침해>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오직 우스꽝스러운 상황만 묘사할 뿐입니다.
이런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대기업들이 탐욕스럽다고 느끼겠으나, 자본주의 그 자체가 무엇인지 파고들지 못하겠죠. 그래서 저는 이런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다른 사회주의 SF 소설을 찾아보거나 사회주의 사상 서적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독자들이 이런 문제를 좀 더 깊게 파고들고 싶다면, 사회주의 경제학 서적이나 사상 서적은 훨씬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소설은 일상을 풍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독자가 일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면, 독자는 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독자들은 대기업들이 좀 더 착해져야 한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한 경쟁으로 이어지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업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도 경쟁에서 진 기업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시장 경제는 그런 것이죠. 그래서 기업들은 악착같이 이기느라 애쓰고, 그런 무한 경쟁은 엄청난 학살들과 수탈들과 오염들을 부릅니다. <특허권 침해>는 이런 구조를 자세히 분석하지 않습니다. 저는 <특허권 침해>를 읽은 독자들이 그저 웃고 화내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