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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어미木의 자살>과 <어스블러드>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어미木의 자살>과 <어스블러드>

OneTiger 2022. 1. 3. 20:00



이 사진은 긍정적입니다. 새가 열매를 먹기 때문에, 이 사진은 긍정적입니다. 새가 열매를 먹고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어떤 것을 먹고 영양분을 섭취합니다. 인간이 영양분을 섭취하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육체를 유지하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사진과 달리, 굶주림은 부정적입니다. 왜 굶주림이 부정적인가요? 만약 인간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면, 인간은 굶주릴 겁니다. 인간이 굶주리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육체는 무너집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열매는 생존으로 이어지고, 굶주림은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열매는 생존이고, 굶주림은 죽음입니다. 생존은 긍정적이고, 죽음은 부정적입니다. 열매 사진이 긍정적인 것처럼, 모성은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아기가 굶주릴 때, 아기는 으앙으앙~ 웁니다. 만약 엄마가 아기를 먹인다면, 아기는 배부를 겁니다. 아기가 배부르기 때문에, 아기는 만족합니다. 아기가 모유를 먹기 때문에, 아기가 만족하는 것처럼, 모성은 긍정적입니다. 자연이 열매를 선사하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것처럼, 엄마가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아기는 만족합니다. 그래서 자연과 여자는 이어집니다. 이 연결에서 대지 모신은 비롯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대지 모신이 긍정적인가요?



"저승을 헤매어 구해온 영약은 기진한 그네의 희보얀 젖줄기가 아니었을까 불어터진 젖을 아비에게 물리고 곤히 잠든 겨울나무의 쐐기풀 같은 육신이 아니었을까." 이 문구는 모유를 영약이라고 표현합니다. 여자(엄마)는 모유를 생산하고, 모유는 영약이 되고, 아기는 모유를 먹습니다. 여자가 아기(아버지)를 먹이기 때문에, 아기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모유를 생산하고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이 문구는 모성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문구에서 모성은 풍요롭기보다 부정적입니다. 아무리 모유가 영약이라고 해도, 지옥에서 이 영약은 비롯합니다. 여자는 불어터진 젖을 물립니다.

 

여자(엄마)는 풍요로운 젖보다 불어터진 젖을 물립니다. 풍요로운 육체보다 겨울 나무 쐐기풀은 쓸쓸하고 힘들고 외로운 육체에 가깝습니다. 여자가 모유를 생산하기 때문에, 아무리 아기(아버지)가 성장할 수 있다고 해도, 이 문구가 풍요로운 모성보다 부정적인 모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 문구는 모성을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왜 이 문구가 모성을 비판하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가부장 제도가 모성을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인류 문명 역사는 계급 투쟁 역사입니다. 계급 투쟁 역사는 가부장 제도 역사입니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는 사유화, 민영화를 추구합니다. 자본주의가 사유화를 추구하고, 사유화와 공공화가 대립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공공화를 짓밟습니다. 자본주의가 공공화를 짓밟고, 공공 육아가 공공화에 속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공공 육아를 싫어합니다. 자본주의는 육아를 사회적인 노동보다 개인적인 여자 노동이라고 매도합니다. 자본주의가 매도하기 때문에, 육아는 개인적인 여자 노동이 됩니다. 억지로 여자와 육아가 이어지기 때문에, 여자는 가정적이어야 합니다.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여자는 섬세하고 감정적이고 조신합니다. 자본주의는 여자가 가정적이고 감정적이라고 매도합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가부장 제도는 여자가 섬세하고 조신하다고 매도합니다. 만약 이 범주, 가정적이고 섬세하고 감정적이고 조신한 범주에서 어떤 여자가 벗어난다면, 가부장 편견은 이 여자를 비난할 겁니다. "어휴, 네가 여자야? 여자는 조신해야 해."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여자는 조신해야 합니다. 육아가 개인적인 여자 노동이기 때문에, 여자는 가정적입니다. 이 상황에서 여자는 인간보다 가정적인 존재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여자를 인간보다 가정적인 존재라고 매도합니다. 만약 가정적인 존재에서 어떤 여자가 벗어난다면, 가부장 편견은 이 여자를 비난할 겁니다.



가정적인 존재에서 어떤 여자가 벗어날 때, 가부장 편견이 이 여자를 비난하는 것처럼,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여자는 인간보다 가정적인 존재가 됩니다. 여자가 인간보다 가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여자에게는 인간 권리가 없습니다. 여자는 인간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여자가 인간 권리를 주장할 때, 지배적인 관념은 여자를 가정적인 범주에 밀어넣습니다. 이건 억압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인간 권리를 삭제하고 여자를 가정적인 범주에 밀어넣기 때문에, 이건 억압입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 가부장 편견은 여자를 억압합니다. 이 억압은 모성이 됩니다.

 

가부장 편견은 이 억압을 모성이라고 왜곡합니다. 자본주의가 공공 육아를 싫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는 개인적인 여자 노동이 되고, 자본주의(경제)가 가부장 편견(관념)을 유발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은 여자를 가정적인 존재라고 매도합니다. 이 매도는 억압이나, 가부장 편견은 이 억압을 모성이라고 왜곡합니다. "여자는 모성적이야. 여자가 모성적이기 때문에, 여자는 헌신적이야. 헌신적인 여자는 아기를 돌봐야 해. 어떻게 여자가 철학자, 과학자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은 철학자, 과학자가 여자보다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철학 사전, 과학 사전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을 떠듭니다.



철학 역사 사전, 과학 역사 사전이 여자들보다 남자들을 떠드는 것처럼, 오랜 동안, 가정적인 존재에서 여자들은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아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가부장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은 지배적입니다. 가부장 편견이 지배적이고, 지배적인 관념, 가부장 편견이 억압을 모성이라고 왜곡하기 때문에, 모성은 부정적입니다. "저승을 헤매어 구해온 … 쐐기풀 같은 육신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문구는 모성을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이 문구는 <어미木의 자살2>에 속합니다.

 

김선우 시인은 <어미木의 자살2>를 썼고, 가부장 편견이 모성을 왜곡하기 때문에, <어미木의 자살2>는 모성을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김선우 시인은 비단 <어미木의 자살2>만 아니라 <어미木의 자살4> 역시 썼습니다. <어미木의 자살4>는 여자와 자연을 연결합니다. "펄럭이는 수천의 손 수천의 잎새 흰개미 알 매미 껍질 보드라운 음지 식물들이 난리법석을 떨며 살고 있더란 말이다 보잘것없는 제 아기들의 어미 된 것들이 죽은 나무 둥치 갈라 터진 틈새마다 그득그득 흰 빵을 물려주고 있더란 말씀이다" 여자(엄마)가 죽은 이후, 여자(엄마)는 자연이 됩니다. 자연(엄마)은 먹거리(흰 빵)이 됩니다.





자연은 먹거리를 선사하고 생명체를 먹입니다. 자연이 생명체를 먹이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는 먹이 그물망입니다. 자연이 먹거리를 선사하고 생명체를 먹이는 것처럼, 자연 생태계가 먹이 그물망인 것처럼, 여자(엄마)는 모유를 생산하고 아기를 먹입니다. 이 관점에서 자연과 여자는 비슷합니다. 자연과 여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어미木의 자살4>는 자연과 여자를 연결하는지 모릅니다. 이 연결에서 대지 모신은 비롯합니다. 문자 그대로 대지 모신은 어머니 여신에 속합니다. 이 연결이 긍정적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가요? 만약 이 연결이 긍정적이라면, 왜 시 제목이 다른 무엇보다 '자살'인가요?

 

자살은 긍정적인 단어보다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죽음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자살은 부정적입니다. 자살이 스스로 죽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자살은 훨씬 비극적인지 모릅니다. 어미木, 어미 나무가 자살하기 때문에, <어미木의 자살> 시리즈는 비극적인 시들인지 모릅니다. 만약 <어미木의 자살> 시리즈가 비극적이라면, 어미 나무가 대지 모신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에, 대지 모신 역시 비극적일 겁니다. 2021년 12월 20일 게시글이 설명했던 것처럼, 세계 환상 문학상 트로피는 나무 조각입니다. 왜 환상 문학상 트로피가 나무인가요? 많은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에서 나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신화들, 전설들, 민담들에서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판타지가 신화, 전설, 민담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판타지에서도 나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나무에게는 여러 역할들이 있습니다. 이 그림(링크)이 보여주는 것처럼, 대지 모신은 나무입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식물(나무)이 영양분 생산자이기 때문에, 많은 그림들은 대지 모신을 나무(식물)라고 표현합니다. 대지 모신이 나무(식물)인 것처럼, 대지 모신은 먹거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모성이 아기를 먹이는 것처럼, 영양분 생산자, 어머니 여신은 생명체를 먹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모성과 나무가 이어진다고 해도, 어미 나무는 부정적입니다.

 

만약 <어미木의 자살4>가 대지 모신을 비판한다면,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어미木의 자살4>가 어머니 여신을 비판하나요? 가부장 편견이 모성을 왜곡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은 어머니 여신을 왜곡하는지 모릅니다. 자연 생태계가 먹이 그물망인 것처럼, 여자가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자연과 여자는 비슷합니다. 가부장 편견이 모성을 왜곡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 속에서 어머니 여신은 이 왜곡을 정당화하는지 모릅니다. "그래, 맞아! 여자가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자연과 여자는 비슷해! 어머니 여신은 여자가 아기를 먹인다는 뜻이야! 여자가 아기를 먹이는 것처럼, 여자는 가정적이야! 이건 자연적이야!"



가부장 편견은 모성을 왜곡하고 가정적인 여자가 자연적인 여자, 어머니 여신이라고 왜곡하는지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어머니 여신은 억압, 왜곡을 정당화합니다. 어머니 여신이 억압, 왜곡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어미木의 자살4>는 대지 모신을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어미木의 자살4>가 대지 모신을 비판한다면, 이유는 가부장 편견인지 모릅니다. <어미木의 자살4>가 대지 모신을 비판하는 것처럼, 김선우 시인은 어머니 여신을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선우 시인은 비단 <어미木의 자살4>만 아니라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 역시 썼습니다. 이 시는 모성을 긍정하는 것 같습니다.

 

"내 애인은 다섯 살배기 동생이 되어 내게 말했다 고마워 언젠가 나도 엄마가 되어줄게 핑그르르, 내 무덤에서 정말로 젖이 돈 것만 같았다." 이 문구는 부정적이기보다 긍정적입니다. 이 문구에서 '고마워'와 엄마, 무덤, 모유는 이어집니다. 엄마, 무덤, 모유가 '고마워'로 이어지는 것처럼,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는 모성을 긍정하는 것 같습니다. 모성이 긍정적이기 때문에,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는 대지 모신을 긍정하는지 모릅니다. <어미木의 자살2>는 모성을 비판합니다. <어미木의 자살4>는 대지 모신을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는 두 부정적인 시와 다릅니다.



김선우 시인은 여러 시들을 썼습니다. 어떤 시는 모성, 어머니 여신을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시는 모성, 어머니 여신을 긍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답이 무엇인가요? 어머니 여신이 긍정적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가요?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애인이 동생이 되고, 아버지(아들)가 엄마 젖을 빨고, 애인(동생)이 언니/누나 젖을 빠는 것처럼, 김선우 시인은 모성을 순환이라고 파악하는지 모릅니다. 모성이 순환이기 때문에, 어머니 여신이 긍정적인가요? 모성이 순환이기 때문에, 아버지, 애인이 아들, 동생이 되고 엄마/언니/누나 젖을 빠는 것처럼, 결과적으로 여자는 모성으로 이어지는지 모릅니다.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가 표현하는 것처럼, 모성은 죽음을 포함합니다. 무덤이 아기를 키우는 것처럼, 영원히 탄생과 죽음이 반복하기 때문에, 심지어 모성은 죽음조차 포함합니다. 아무리 호랑이가 알파 프레데터, 최고 포식자라고 해도, 호랑이는 죽습니다. 언젠가 호랑이는 죽습니다. 죽은 호랑이에게서 분해자들은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이건 다소 문학적인 표현이나, 죽은 호랑이는 대지로 돌아갑니다. 모성이 대지 모신이기 때문에, 죽은 호랑이는 엄마 품으로 돌아갑니다. 이 영양분은 식물들을 키웁니다. 초식동물들은 식물들을 뜯어먹습니다. 또 다른 호랑이는 초식동물들을 사냥합니다. 자연은 순환합니다.

 

 

자연은 멈추지 않습니다. 생태학자 레이첼 카슨이 자연을 순환이라고 표현하고, 비디오 게임 <미들 어스: 섀도우 오브 워>에서 카르난 역시 자연을 순환이라고 표현하고, 비디오 게임 <시즌스 애프터 폴>에서 야생 정령이 자연에게 시작과 종말이 없다고 표현하고, <고지라> 시리즈에서 모스라가 죽고 태어나는 것처럼, 자연은 멈추지 않습니다. 자연과 여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모성 역시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김선우 시인이 어머니 여신을 비판한다고 해도, 김선우 시인은 모성이 멈추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자연, 모성은 죽음조차 포함합니다. 이 영원한 반복이 부정적인 굴레인가요?

 

결과적으로 여자가 모성과 이어지기 때문에, 이건 굴레입니다. 모성, 이 굴레에서 여자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관점에서 모성은 굴레, 운명적인 쳇바퀴입니다. 하지만 만약 모성이 그저 운명적인 쳇바퀴에 불과하다면,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 만약 모성이 그저 운명적인 쳇바퀴에 불과하다면, 여자가 쳇바퀴에게 굴복해야 하나요? 여자가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나요? 모성이 굴레이기 때문에, 김선우 시인이 여자가 굴레에게 굴복한다고 표현하나요? 굴복이 김선우 시인 의도인가요? 김선우 시인이 여자가 운명적인 쳇바퀴, 비참한 굴레에게 굴복하기 원하나요?



만약 모성이 굴레보다 순환이라면, 모성이 비참한 운명이 아닐 겁니다. 애인이 동생이 되고 젖을 빨기 때문에, 모성은 순환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모성이 순환인가요? 가부장 편견은 모성을 왜곡하나, 어떻게 모성이 긍정적인가요? 이 상황에서 문제는 어머니 여신 그 자체보다 가부장 편견입니다. 가부장 편견이 모성을 왜곡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이 여자를 인간보다 가정적인 존재라고 왜곡하기 때문에, 어머니 여신은 부정적입니다. 가부장 편견이 어머니 여신을 왜곡하기 때문에, 문제는 가부장 편견입니다. 독자들이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할 때, 독자들은 가부장 편견을 비판합니다.

 

비록 <어미木의 자살4>가 대지 모신을 비판한다고 해도, 어머니 여신 그 자체보다 가부장 편견이 악랄한 문제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할 때, 독자들은 가부장 편견을 비판해야 합니다. 가부장 제도에서 가부장 편견은 비롯합니다. 자본주의가 공공 육아를 싫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는 세계화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가부장 편견이 비롯하고, 독자들이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할 때, 독자들이 가부장 편견을 비판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김선우 시인이 이것을 의도했나요?



김선우 시인이 <어미木의 자살4>를 썼을 때, 만약 김선우 시인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원했다면, 독자들은 김선우 시인 의도를 따르고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이 썼기 때문에, <어미木의 자살4>는 나타났습니다. 만약 김선우 시인이 쓰지 않았다면, <어미木의 자살4>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김선우 시인 없이, <어미木의 자살4>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미木의 자살4>는 김선우 시인에게 종속됩니다. 김선우 시인 의도에서 이 시가 비롯했기 때문에, 김선우 시인 의도는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시는 시인 의도를 반영합니다.

 

시가 시인 의도를 반영하기 때문에, 모범적인 독자가 시를 해석할 때, 모범적인 독자는 의도를 중시합니다. 만약 김선우 시인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원했다면, 독자들이 김선우 시인 의도를 따를 때, 이 해석은 모범적일 겁니다. 만약 김선우 시인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원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의도와 해석은 어긋날 겁니다. 의도와 해석이 어긋나기 때문에, 이 해석이 모범적이지 않나요? 모범적인 해석이 오직 의도만 중시하나요? 의도에서 해석이 벗어나지 못하나요? 가정적인 존재에서 여자가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해석이 전능한 의도를 떠받들어야 하나요?





의도가 전능하기 때문에, 전능한 의도가 해석을 지배하나요? 의도 만능주의, 전능한 의도주의가 타당한가요? 만약 일방적으로 의도가 해석을 지배한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지 모릅니다. 만약 의도가 해석을 지배한다면, 가부장 편견 의도는 페미니즘 해석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의도가 해석을 지배하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이 어떤 것을 의도할 때, 페미니즘은 이 의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해석이 전능한 의도를 떠받들기 때문에, 가부장 편견이 어떤 것을 의도할 때, 페미니즘은 이 의도를 비판하지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여자들은 가정적이야! 하지만 이 문구 의도는 억압이 아니야!"

 

필연적으로 여자들은 가정적입니다. 이 문구 의도는 억압, 차별이 아닙니다. 가부장 편견은 억압, 차별이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 편견이 억압, 차별을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 해석은 의도를 존중합니다. 페미니즘은 가부장 편견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여자가 가정적이라고 해도, 가부장 편견이 억압, 차별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침묵해야 합니다. 수구 꼴통 할배들은 여자들이 가정적이고 조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수구 꼴통 할배들은 조신한 여자가 억압이라고 의도하지 않습니다. 수구 꼴통 할배들은 억압, 차별이 의도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억압, 차별이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수구 꼴통 할배들 의도를 존중해야 하나요? 의도가 해석을 지배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수구 꼴통 할배들 의도를 따라야 하나요? "여자들은 가정적이고 조신해야 해! 하지만 우리는 억압, 차별을 의도하지 않아! 우리는 그저 자연적인 여자를 의도할 뿐이야! 자연적인 여자는 우리 의도야!" 수구 꼴통 할배들이 억압, 차별을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오직 이 의도만 중시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가부장 편견은 억압, 차별을 자연이라고 정당화합니다. 페미니즘은 이 정당화를 비판해야 합니다.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것처럼, 해석은 주체적입니다.

 

아무리 가부장 편견이 억압, 차별을 의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리 가부장 편견이 자연적인 여자를 의도한다고 해도, 페미니즘은 이 의도가 그저 정당화에 불과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이 의도를 정당화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의도는 해석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뭐라고 가부장 편견이 의도하든, 페미니즘이 가부장 편견을 비판하는 것처럼, 해석은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해석이 의도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할 때, 독자들은 김선우 시인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시인 의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독자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이 <어미木의 자살4>를 썼을 때, 비록 김선우 시인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해석이 의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독자들은 김선우 시인 의도를 넘어서고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이 <어미木의 자살4>를 썼기 때문에, 김선우 시인 의도는 가장 중요합니다. 분명히 김선우 시인 의도는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모범적인 문학 독자는 시인 의도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독자가 시인 의도를 무시한다면, 이건 나쁜 해석, 잘못된 해석일 겁니다. 하지만 김선우 시인은 현실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이 투쟁은 너무 처절하고 고통스러우나, 이 투쟁은 현실입니다. 이 현실에서 많고 많은 여자들은 살아갑니다. 김선우 시인은 이 현실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김선우 시인은 이 현실에 속합니다. 김선우 시인보다 이 현실, 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투쟁은 훨씬 원대합니다. 김선우 시인이 <어미木의 자살4>를 쓰기 전에, 이미 이 현실, 이 투쟁은 나타났습니다. 김선우 시인보다 이 현실이 원대하기 때문에,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하기 위해 독자들은 원대한 현실에게 기반하고 김선우 시인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김선우 시인 의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비록 김선우 시인이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들은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인 의도가 시를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해도, 문학 독자는 원대한 현실에게 기반하고 시인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독자가 현실에게 기반하고 시인 의도를 넘어서는 것처럼, 해석은 현실에게 기반하고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비단 시인 의도만 아니라 다른 의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미木의 자살4>가 자연과 여자를 연결하는 것처럼, 대지 모신은 먹거리를 가리킵니다.

 

열매 사진이 긍정적인 것처럼, 자연 환경은 먹거리를 선사합니다. 자연이 먹거리를 선사하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연 환경 덕분에, 인간은 살아갑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이 필수적입니다. 그 어떤 예외 없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자연이 필수적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자연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만약 소수가 자연을 소유하고 다수가 자연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겁니다. 인류 사회는 자연 환경을 공유해야 합니다. 어머니 여신은 공유지 경제가 타당하다고 증명합니다. 비록 김선우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들은 대지 모신과 공유지 경제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이 자연과 여자를 연결했을 때, 비록 김선우 시인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들은 공유지 경제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해석하는 것처럼, 해석은 의도를 넘어서고 공유지 경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 어스블러드>는 가이아, 대지 모신을 이야기합니다. 자연의 수호자들, 늑대인간들, 가루우들은 가이아, 대지 모신을 숭배합니다. <어스블러드>는 늑대인간들을 보여주나, 재규어부터 바다 악어까지, 원작 스토리텔링 게임에서 비단 늑대인간들만 아니라 다른 변신 야수 종족들 역시 대지 모신을 숭배합니다.

 

이 다소 잔혹한 그림(링크)처럼, 심지어 거대 육식 공룡조차 어머니 여신을 숭배하고 자연 환경을 수호합니다. 오오~, 야생적인 변신 야수 종족들이 대지 모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 어스블러드>에서 어머니 여신은 근본적인 세계 설정입니다. 어머니 여신은 공유지 경제를 가리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어스블러드>에서 근본적인 세계 설정, 대지 모신이 공유지 경제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제작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했나요? 만약 게임 제작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게임 플레이어가 공유지 경제를 해석할 때, 의도와 해석은 어긋날 겁니다.





김선우 시인이 쓰기 때문에, <어미木의 자살4>가 나타나는 것처럼, 게임 제작자들이 구상하기 때문에, <어스블러드>는 나타납니다. 김선우 시인에게서 <어미木의 자살4>가 비롯하는 것처럼, 게임 제작자들에게서 <어스블러드>는 비롯합니다. <어미木의 자살4>가 김선우 시인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어스블러드>는 게임 제작자들에게 종속됩니다. 김선우 시인 의도가 <어미木의 자살4>를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인 것처럼, 게임 제작자들 의도는 <어스블러드>를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모범적인 게임 플레이어는 다른 무엇보다 게임 제작자들 의도를 중시합니다.

 

만약 게임 제작자들이 공유지 경제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모범적인 게임 플레이어는 이 의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해석이 의도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제작자들 의도를 넘어서고 공유지 경제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제작자들 의도를 비판할 수조차 있습니다. <어스블러드>에서 레드 탈론(붉은 발톱) 부족은 공유지 경제를 논의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붉은 발톱 부족이 대지 모신을 숭배한다고 해도, 붉은 발톱 부족은 공유지 경제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비단 붉은 발톱 부족만 아니라 다른 늑대 부족들, 다른 변신 야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에서 대지 모신은 근본적인 세계 설정입니다. 하지만 이 사이언스 판타지는 공유지 경제를 논의하지 않습니다. 재규어가 다국적 기업을 사보타주하든, 바다 악어가 강화복 병사를 물어뜯든, 스피노사우루스가 거대 로봇과 싸우든, 공유지 경제는 핵심 주제가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가부장 편견이 의도하든, 페미니즘이 가부장 편견을 비판하는 것처럼, 비록 이 사이언스 판타지가 공유지 경제를 논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비판할 수 있습니다. 비단 이 사례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스블러드>처럼,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에서 대지 모신은 근본적인 세계 설정일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테라제네시스>가 가이아의 딸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적어도 대지 모신은 중요한 상징일 수 있습니다. 대지 모신이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에, 비록 의도가 공유지 경제를 주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해석은 공유지 경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대지 모신이 중요한 상징이기 때문에, 만약 의도가 공유지 경제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해석은 의도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연 생태계는 먹이 그물망입니다. SF/판타지보다 먹이 그물망은 원대합니다.



이 게시글은 자본주의가 가부장 편견을 유발한다고 비판하나, 이건 오직 자본주의만 가부장 편견을 유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계 자유 시장 경제가 유일한 가부장 제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인류 문명 역사가 가부장 제도 역사인 것처럼, 자본주의보다 가부장 제도는 훨씬 유구합니다.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 본격적인 자본주의는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17세기 상업 자본주의가 발달했다고 해도,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를 논의할 때,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든, 옹호하든) 자본주의는 산업 자본주의를 가리킵니다. 산업 자본주의 역사는 그저 대략적인 200년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 역사가 그저 200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부장 제도에게 자본주의는 그저 꼬꼬마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사라진다고 해도, 가부장 제도는 사라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2022년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가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에, 만약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가부장 제도를 타파하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공공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공유지 경제는 대립합니다. 어머니 여신이 공유지 경제이기 때문에, 공유지 경제 사회는 모성 사회입니다. 자본주의와 모성 사회는 대립합니다. 모성 사회는 '진짜 모성, 자연 환경 공유'를 왜곡하지 않을 겁니다.

 

 

※ 게임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 스크린샷 출처:
https://kr.ign.com/video/10178/werewolf-the-apocalypse-earthblood

※ 사진 <Birds Berries …> 출처: IlyaYurukin,
https://pixabay.com/photos/birds-berries-branches-waxwings-5500566/

※ 사진 <Loaf Ciabatta …> 출처: RitaE,
https://pixabay.com/photos/loaf-ciabatta-flour-wheat-flour-4957679/

※ 사진 <Composing Woman …> 출처: KELLEPICS,
https://pixabay.com/illustrations/composing-woman-fantasy-face-239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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