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야생종> 속의 가부장적인 진화 이론 본문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은 SF 소설입니다. 수많은 SF 작가들과 독자들과 평론가들은 이걸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야생종>은 SF 울타리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겠죠. SF 독자들은 이게 초인 소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초인 소설은 SF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올라프 스태플던이 쓴 <이상한 존>이나 시어도어 스터전이 쓴 <인간을 넘어서>나 스티븐 굴드가 쓴 <점퍼> 같은 소설들처럼, <야생종>은 SF 초인 소설에 속합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초인들이 나오고, 소설 주인공은 안얀우입니다.
안얀우는 아프리카 흑인 여자이고 동시에 동물들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치유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안얀우는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안얀우의 젖에게도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생종>은 어떻게 안얀우가 동물로 변신하고 병에 걸리지 않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안얀우는 표범으로 변신하고 상대를 은밀하게 해치울 수 있습니다. 안얀우는 돌고래로 변신하고 바닷속을 누빌 수 있습니다. 동물 변신은 놀라운 능력이나, 소설 <야생종>은 어떻게 안얀우가 표범으로 변신할 수 있는지 자세히 논증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그저 안얀우가 변신한다고 묘사할 뿐입니다.
하드 SF 소설들과 달리, <야생종>에는 자세한 상상 과학이 없습니다. 하드 SF 소설들은 어떻게 우주선이 항해할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야생종>에는 그런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자세한 상상 과학이 없음에도, 어떻게 <야생종>이 SF 소설이 될 수 있을까요? 왜 SF 독자들이 <야생종>을 SF 소설이라고 인정할까요? 사실 <야생종>은 SF 소설보다 판타지 소설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안얀우는 동물로 변신할 수 있고, 이건 상상 과학보다 마법이나 주술에 가깝습니다. 만약 안얀우가 동물 변신 초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토속 주술사였다면, 소설 주제와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을까요?
왜 옥타비아 버틀러가 <야생종>을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SF 소설로 썼을까요?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뽀대나기 때문에? 아프리카 토속 주술사가 촌스럽고 SF 초인이 뭔가 멋지기 때문에? 미국 출판 시장에서 판타지 소설보다 SF 소설이 훨씬 인기를 끌기 때문에? 아니, 이건 비단 <야생종>만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왜 SF 평론가들은 초인 소설이 SF 소설이 된다고 생각할까요? 왜 <이상한 존>이나 <인간을 넘어서>나 <점퍼>가 SF 울타리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최초의 휴고상 수상 소설은 1953년 <파괴된 사나이>입니다. 알프레드 베스터가 쓴 <파괴된 사나이>는 초인 소설입니다.
최초의 휴고상 수상 소설은 초인 소설이었습니다. SF 팬들은 초인 소설이 휴고상을 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인 소설은 SF 소설이 될 수 있죠. 왜 <파괴된 사나이>가 SF 소설이 될 수 있을까요? <파괴된 사나이>가 초인 설정을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이 소설은 현란하게 텔레파시 능력을 보여주나,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사실 <이상한 존>과 <인간을 넘어서>와 <점퍼>와 <파괴된 사나이>와 <야생종> 같은 초인 소설들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곤 합니다. 이건 관례입니다. 하드 SF 소설들이 열심히 우주선 작동 원리를 떠드는 것처럼, SF 초인 소설들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이 없다면, 상상 과학은 마법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상상 과학이 마법과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초인 소설이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SF 소설이 될 수 있을까요? 소설 <듄> 연대기에는 베네 게세리트 마녀들이 있습니다. 이름과 달리, 그들은 진짜 마녀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법을 부리지 않습니다. 사실 마법은 초능력입니다. 베네 게세리트 마녀들은 엄청난 훈련을 거쳤고 육체를 미묘하게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능력자들입니다. 이런 설정이 정말 상상 과학이 될 수 있을까요?
통상적으로 초인 소설들은 진화 이론에 기반합니다. 19세기 진보 이후, 사람들은 진화 이론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꿀벌과 버섯과 참나무와 표범과 상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생물 다양성 속에서 꿀벌과 버섯과 참나무와 표범과 상어는 진화했습니다. 생물 다양성이 번성할 때, 핵심적인 이유는 진화입니다. 신은 중요하지 않죠.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과학자들은 신이 존재한다고 증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생물 다양성이 진화한다고 증명할 수 있죠.
진화는 온갖 놀라운 생명체들을 낳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생명체들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온갖 놀라운 생물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까지 생물 다양성은 진화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생물 다양성이 진화하는 동안 지구에는 놀라운 생명체들이 살아가겠죠. 어쩌면 인간 역시 진화할지 모릅니다. 인간은 놀랍게 진화하고 뛰어난 초능력을 발휘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인간은 이미 초인으로 진화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이미 여러 초인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초인 소설들은 진화 이론에 기반합니다.
진화 이론에 기반하기 때문에 초인 설정은 상상 과학이 됩니다. 비록 여기에 자세하고 치밀한 설명이 없다고 해도, 초인 설정은 상상 과학이 될 수 있죠. 진화 이론이 존재하기 때문에, 초인 설정은 존재할 수 있고, 그래서 초인 소설은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야생종>은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소설 <잃어버린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야생종>과 <잃어버린 세계> 모두 진화 이론을 뻥튀기합니다. <야생종>은 인간들이 놀라운 초인들로 진화했다고 설정하고, <잃어버린 세계>는 아직 공룡들과 고대 인류가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다고 설정하죠.
그래서 <야생종>은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SF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드루이드가 표범으로 변신하고 돌고래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해도,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진화 이론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판타지가 되고 SF 울타리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안얀우와 드루이드가 똑같이 표범으로 변신한다고 해도, 안얀우와 드루이드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한쪽은 진화를 인정하고, 다른 한쪽은 진화 대신 마법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안얀우는 SF 초인이고, 드루이드는 자연 성직자입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그저 놀라운 진화와 동물 변신을 보여주기 위해 옥타비아 버틀러가 <야생종>을 썼을까요? 소설 <야생종>에게 다른 가치가 있을까요? <야생종>이 진화 이론에 기반할 때, 그게 무엇을 뜻할까요? 안얀우는 '아프리카 흑인 여자'입니다. '아프리카 흑인 여자'에게 진화 이론이 무엇이 될까요? 19세기 유럽에서 진화 이론은 놀라운 과학 혁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19세기 유럽은 자본주의 사회였습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들을 수탈해야 했습니다. 식민지 수탈은 인종 차별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고상한 유럽 백인들은 열등한 아프리카 흑인들을 수탈해야 한다." 이렇게 유럽 백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왜 유럽 백인들이 고상하고, 아프리카 흑인들이 열등할까요? 여기에 과학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네, 아주 과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유럽 백인들은 자신들이 고상하게 진화했고 아프리카 흑인들이 열등하게 퇴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고상한 백인은 열등한 흑인을 수탈할 수 있습니다. 진화 이론은 식민지 수탈과 인종 차별을 뒷받침했습니다. 이른바 호텐토트 비너스는 19세기 진화 이론, 식민지 수탈, 인종 차별과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아직 서구 사회는 이런 시각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서구 사회는 제3세계가 열등하고, 제3세계 여자들이 무식하고 야만적으로 인구를 늘리고, 제3세계가 진화된 문명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남한 사회조차 이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남한 사회가 서구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때문이죠. 여전히 수구 보수적인 남한 사람들은 열대 민족이 열등하다고 말합니다. 열대 민족은 열등합니다. 서구 사회에게 제3세계 여자들은 가축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장 주인이 암소들을 관리하는 것처럼, 서구 사회는 제3세계 여자들(암소들)을 관리하고 싶어합니다.
<야생종>은 이런 상황을 강렬하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야생종>에는 식민지 수탈과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자본주의 권력을 옹호하는 진화 이론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가부장적인 초인은 안얀우를 이용해 초인들이 번식하기 원합니다. 목장 주인이 암소들을 이용해 품종을 교배하는 것처럼, 가부장적인 초인은 식민지를 세우고 거기에서 초인들을 번식시킵니다. 게다가 <야생종>의 시대 배경은 계몽주의 시대와 19세기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와 19세기에서 초기 자본주의는 계속 발달했고 산업 자본주의로 넘어갔죠. <야생종>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야생종>에서 초인 설정은 그저 놀라운 진화 이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안얀우와 호텐토트 비너스는 별로 멀지 않습니다.
독자가 오직 자연 과학만을 따진다면, 독자는 이런 측면을 놓칠 겁니다. 사실 진화 이론은 그저 자연 과학 이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자연 과학 이론은 절대 객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억압적인 계급 사회에서 가치 중립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중립이라고 말할 때, 사실 그 사람은 보수 우파에게 수렴하겠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중립은 그저 착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연 과학 이론을 살필 때, 우리는 사상을 함께 고려하고 사상을 고민해야 할 겁니다. <야생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야생종>이 SF 소설이 될 때, 이 소설에서 (비단 진화 이론만 아니라) 사회 철학 역시 중요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