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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과 프레데터, 열대 밀림과 원시적인 주술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아즈텍과 프레데터, 열대 밀림과 원시적인 주술

OneTiger 2023. 2. 28. 12:15

[만약 프레데터와 (메소) 아메리카 문명이 비슷하다면….]



하늘에서 갑자기 소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허공에서 소설은 번쩍~ 나타나지 않습니다. 땅에서 이건 불쑥~ 솟아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설들이 많다고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이것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랄라, 만약 하늘에서 소설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소설이 나타날 수 있나요? 만약 허공에서 소설이 번쩍~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많은 소설들이 존재할 수 있나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소설가들이 소설들을 쓰기 때문입니다. 소설가가 쓰기 때문에, 소설은 나타납니다. 만약 소설가가 쓰지 않는다면, 소설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소설가에게서 소설은 비롯합니다.

 

정은숙 작가는 <용기 없는 일주일>을 썼습니다. 정은숙 작가가 썼기 때문에, <용기 없는 일주일>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작가가 쓰지 않았다면, 이 소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정은숙 작가에서 이 소설은 비롯했습니다. 소설에게 소설가는 생산 조건입니다. <용기 없는 일주일>에게 정은숙 작가는 생산 조건입니다. 정은숙 작가가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이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반영했을 겁니다. 정은숙 작가가 <용기 없는 일주일>을 위한 생산 조건이기 때문에, 이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반영했기 때문에, 정은숙 작가 의도는 이 소설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모범적인 독자는 정은숙 작가 의도를 존중합니다. 모범적인 독자는 이 작가 의도가 <용기 없는 일주일>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인정합니다. 비단 정은숙 작가, <용기 없는 일주일>만 아니라 다른 소설가들, 다른 소설들 역시 똑같습니다. 소설가는 소설을 위한 생산 조건입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동안, 소설가에게는 의도가 있을 겁니다. 소설가는 이 의도를 반영할 겁니다. 소설가에게서 소설이 비롯하기 때문에, 소설가에게 의도가 있기 때문에, 모범적인 독자는 소설가 의도가 소설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인정합니다. 이건 모범적인 해석입니다.

 

만약 독자가 소설가 의도를 무시한다면, 이 해석은 모범적이지 않을 겁니다. 서구 백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만약 서구 백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비극적인 운디드니처럼, 서구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미국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용기 없는 일주일>은 이 학살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이 소설이 이 학살을 찬양한다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정은숙 작가는 서구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찬양하지 않을 겁니다. 정은숙 작가에게는 이 의도가 없을 겁니다. 독자는 이 의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정은숙 작가가 서구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찬양하지 않기 때문에, <용기 없는 일주일>은 이 학살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만약 독자가 이 소설이 이 학살을 찬양한다고 해석한다면, 이건 과잉 해석일 겁니다. 이 과잉 해석이 잘못된 것처럼, 독자는 소설가 의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분명히 소설가 의도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이건 독자가 소설가 의도를 절대 넘어서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소설가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가 의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어라,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독자가 소설가를 넘어서나요? 대답은 '원대한 것'입니다.

 

<스페이스 헐크>는 보드 게임입니다. 이 보드 게임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만약 정은숙 작가가 <용기 없는 일주일>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의도했다면, <스페이스 헐크>처럼, 이 소설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되나요? 만약 정은숙 작가가 스페이스 오페라를 의도했다면, 독자가 소설가 의도를 존중하기 때문에, 소설가 의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독자가 <용기 없는 일주일>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분류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정은숙 작가가 의도했다고 해도, 아무리 소설가 의도가 중요하다고 해도, <스페이스 헐크>와 달리, <용기 없는 일주일>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닙니다.



<스페이스 헐크>는 외계 괴물들(진 스틸러들)을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외계 괴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스페이스 헐크>는 다릅니다. 현실과 <스페이스 헐크>가 다르기 때문에, 이 게임 세계는 '다른 세계'입니다. <스페이스 헐크>는 터미네이터 강화복을 묘사합니다. 첨단 기술들은 이 강화복을 제작합니다. 만약 첨단 기술들이 진보하지 않는다면, 이 강화복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스페이스 헐크>는 첨단 기술들과 다른 세계를 결합합니다. <스페이스 헐크>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는 첨단 기술들과 다른 세계를 결합합니다.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는 웅장한 우주 문명을 묘사합니다.

 

터미네이터 해병들은 우주 문명에 속합니다. <스페이스 헐크>와 달리, <용기 없는 일주일>은 우주 문명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용기 없는 일주일>은 첨단 기술들과 다른 세계를 결합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오직 현실만 모방합니다. <용기 없는 일주일>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닙니다. 정은숙 작가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원대합니다. 정은숙 작가가 <용기 없는 일주일>을 쓰기 전에, 이미 많은 소설가들, 평론가들, 독자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논의했습니다. <스페이스 헐크>처럼, 게임 제작자들 역시 스페이스 오페라를 논의했습니다. 독자는 이 원대한 것에게 기반하고 소설가를 넘어섭니다.



[판도라 나비(Na'vi)처럼, 외계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정은숙 작가가 의도했다고 해도, 이 소설가보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원대하기 때문에, 독자는 원대한 것에게 기반하고 정은숙 작가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정은숙 작가가 <용기 없는 일주일>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독자는 정은숙 작가를 넘어서고 이 소설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라고 분리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정은숙 작가는 이 소설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분류하지 않을 겁니다.) <용기 없는 일주일>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닌 것처럼, 아무리 소설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해도, 독자는 소설가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 역시 똑같습니다.

 

작가(author)에게서 작품(work)은 비롯합니다. 소설가는 작가입니다. 소설은 작품입니다. 작가(소설가)에게서 작품(소설)은 비롯합니다. 작가(소설가) 의도는 작품(소설)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 역시 똑같습니다. 이건 작가가 작품을 지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정은숙 작가가 의도했다고 해도, <용기 없는 일주일>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닌 것처럼, 작가에게서 작품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작가에게서 작품이 벗어날 수 있다면, 프레데터는 어떤가요? 프레데터는 외계 사냥꾼입니다. 이 사냥꾼과 메소 아메리카 문명이 비슷한가요?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감독했습니다. 이 영화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아바타>는 외계인들(나비들)을 보여줍니다. 나비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의도했을 겁니다. 관객들은 영화 감독 의도를 존중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만약 제임스 카메론이 의도하지 않았다면, 관객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해석하지 못하나요? 작가 의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를 감독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 감독 의도에 종속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감독 의도에게서 관객들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정은숙 작가가 의도했다고 해도, <용기 없는 일주일>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례처럼, 비록 제임스 카메론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관객들은 나비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비슷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족 사회, 자연 친화적인 문화, 어머니 자연, 양식과 문양, 제국주의 피해자들처럼, 나비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커다란 교집합이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 커다란 교집합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임스 카메론은 나비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라고 의도했을 겁니다.) 나비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비슷한 것처럼, 외계 문명과 지구 문명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아바타>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사이언스 픽션(SF)에 속합니다. 그래서 나비는 SF 외계인입니다. 비단 나비만 아니라 프레데터 역시 SF 외계인입니다. 나비, 이 SF 외계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어지는 것처럼, 프레데터, 이 SF 외계인과 아즈텍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어떻게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이어지나요? 프레데터는 열대 밀림에 속합니다. 많은 사례들은 프레데터가 열대 밀림에 속한다고 보여줍니다. 심지어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 이 비디오 게임은 울창한 외계 밀림조차 묘사합니다. 프레데터처럼, 아즈텍 문명은 열대 밀림에 속합니다.

 

대중적인 관념은 아즈텍 문명이 열대 밀림에 속한다고 분류합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실시간 전략 게임입니다. 이 비디오 게임은 여러 중세 문명들을 묘사합니다. 여러 중세 문명들은 고유한 양식들을 자랑합니다. 중국, 사라센, 브리튼과 달리, 특히, 아즈텍 양식은 울창한 식물들이 석조 구조물을 뒤덮는다고 보여줍니다. 울창한 식물들이 석조 구조물을 뒤덮는 것처럼, 대중적인 관념은 아즈텍이 열대 밀림이라고 분류합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이 관념을 증명합니다. 게다가, 인신 공양, 두개골 수집으로서 아즈텍은 유명합니다. 대중적인 관념은 아즈텍을 야만적이라고 판단합니다.



아즈텍이 두개골들을 전시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관념은 아즈텍을 야만적이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아즈텍은 단순한 야만이 아닙니다. 테노치티틀란처럼, 이 문명은 웅장합니다. 두개골 수집처럼, 아즈텍은 야만적입니다. 동시에, 테노치티틀란처럼, 이 문명은 웅장합니다. 프레데터는 야만적입니다. 이 외계 사냥꾼이 두개골들을 수집하기 때문입니다. 프레데터는 두개골에게 주술적인 가치를 부여합니다. 무서운 두개골 장식처럼, 이 외계 사냥꾼은 야만적입니다. 하지만 프레데터는 단순한 야만이 아닙니다. 생체 감지 가면, 은신 장치, 유도 플라즈마처럼, 이 외계인은 놀라운 기술들을 자랑합니다.

 

현실에서 은신 장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2023년 현재, 아무리 인류 문명이 첨단 기술들을 연구한다고 해도, 아직 은신 장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프레데터 기술은 인류 기술을 넘어섭니다. 두개골 장식처럼, 프레데터는 야만적입니다. 동시에, 은신 장치처럼, 프레데터는 놀라운 기술들을 자랑합니다. 프레데터는 열대 밀림, 야만적인 주술, 놀라운 문명을 결합합니다. 아즈텍은 열대 밀림, 야만적인 주술, 놀라운 문명을 결합합니다. 이것들은 커다란 교집합일 수 있습니다. 이 커다란 교집합은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비슷하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즈텍과 이 외계 사냥꾼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이건 필연적으로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비슷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해석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비슷하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이 반대는 타당합니다. 아무리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커다란 교집합을 형성한다고 해도, 이건 절대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이게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프레데터와 아즈텍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프레데터-아즈텍이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이 관계는 커다란 교집합에게 기반합니다. 열대 밀림, 야만적인 주술, 놀라운 문명은 커다란 교집합일 수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비슷하지 않다고 느낀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열대 밀림, 야만적인 주술, 놀라운 문명이 커다란 교집합이라고 인정할 겁니다. 비록 이 커다란 교집합이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고 해도, 이건 프레데터와 아즈텍을 분류하기 위한 가능성일 수 있습니다. 2004년 영화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아즈텍 문명을 보여줍니다.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비슷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아즈텍을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비록 작가들이 프레데터-아즈텍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작가들에게서 이 외계인은 벗어날 겁니다. 작가들 의도는 이 외계인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아즈텍 문명과 프레데터(Yautja)는 비슷합니다. 이게 과잉 해석인가요?]

 


아무리 정은숙 작가가 <용기 없는 일주일>을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의도했다고 해도, 정은숙 작가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원대합니다. 정은숙 작가가 <용기 없는 일주일>을 쓰기 전에, 이미 많은 소설가들, 평론가들, 독자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논의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원대합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를 감독하기 전에, 이미 대중적인 관념은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부족 사회, 자연 친화, 주술, 제국주의 피해자들을 연결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포카혼타스>와 <아바타>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아바타>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원대합니다.

 

프레데터보다 아즈텍은 원대합니다. 1987년 <프레데터>가 개봉하기 전에, 이미 대중적인 관념은 아즈텍을 열대 밀림, 야만적인 주술, 놀라운 문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비록 작가들이 프레데터-아즈텍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작가들 의도보다 아즈텍이 원대하기 때문에, 작가들 의도에게서 프레데터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프레데터는 아즈텍이 아니야! 우리가 이 외계 사냥꾼을 계획하는 동안, 우리는 아즈텍을 의도하지 않았어!" 작가들은 그들이 아즈텍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하지만 작가 의도는 전부가 아닙니다.



<용기 없는 일주일>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닌 것처럼, 작가 의도는 전부가 아닐 겁니다. 작가 의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비록 작가들이 아즈텍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의도에게서 프레데터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의도에게서 프레데터가 벗어나기 때문에, 프레데터와 아즈텍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마야(잉카)처럼, 프레데터는 비단 아즈텍만 아니라 다른 (메소) 아메리카 문명들과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비슷한 것처럼, 프레데터와 마야(잉카)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나비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비슷한 것처럼, 프레데터와 과거 아메리카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프레데터-메소 아메리카 문명은 불쾌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해석을 불쾌하다고 느낄 겁니다. <아바타>에서 나비들은 착한 역할입니다. 나비들은 악당이 아닙니다. <아바타>는 나비들을 긍정적이라고 묘사합니다. 나비들과 달리, 프레데터는 악당입니다. 프레데터는 사람들을 죽입니다. 아무리 프레데터가 오직 무장한 사람들만 죽인다고 해도, 이 외계인은 악당입니다. 특히, 이 외계인은 야만적인 악당, 주술적인 악당입니다. 만약 프레데터와 아즈텍, 마야(잉카)가 비슷하다면, 음, 이건 아즈텍, 마야(잉카)가 야만적인 악당, 주술적인 악당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비자이 프라샤드는 <워싱턴 불렛 - CIA, 쿠데타, 암살의 기록>을 썼습니다. 이 서적은 미국 권력이 제3세계를 짓밟았다고 고발합니다. 에보 모랄레스는 <워싱턴 불렛>을 추전했습니다. 에보 모랄레스는 전(前) 볼리비아 대통령입니다. 특히, 이 대통령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속합니다. 이 추천사에서 이 원주민 대통령은 파차마마를 언급했습니다. 잉카 신화에서 파차마마는 어머니 자연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구 생물권을 파괴하기 때문에, 에보 모랄레스는 파차마마를 언급했습니다. 볼리비아 대통령이 파차마마를 언급하는 것처럼, 잉카 신화는 볼리비아 문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잉카 신화가 볼리비아 문화로 이어지는 것처럼, 과거 아메리카 문화들은 현재 아메리카 문화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프레데터와 과거 아메리카 문화들이 비슷하다면, 현재 아메리카 문화들이 야만적인 악당, 주술적인 악당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해석을 불쾌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서구 중심주의는 아즈텍, 마야(잉카)가 야만적인 악당, 주술적인 악당이라고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인신 공양이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서구 중심주의는 과거 문명들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왜곡은 위험합니다. 2023년 오늘날, 서구 중심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워싱턴 불렛>은 미국 권력이 제3세계를 짓밟았다고 고발합니다. 에보 모랄레스는 세계화 자본주의가 어머니 자연을 파괴한다고 비판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미국 권력이 제3세계를 짓밟나요? 왜 세계화 자본주의가 어머니 자연을 파괴하나요? 왜 서구 중심주의가 지배적인가요? 17세기 이후, 서구 제국주의는 아메리카 대륙을 수탈했습니다. 북반구 이로쿼이부터 남반구 아마존까지, 서구 제국주의는 아메리카 대륙을 수탈했습니다. 그래서 서구는 커다란 이득을 얻었습니다. 서구는 중국, 인도, 이슬람을 넘어섰습니다. 중국, 인도, 이슬람은 아메리카 대륙을 수탈하지 않았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아메리카를 수탈했기 때문에, 서구는 이른바 제1세계를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수탈은 자본주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아메리카를 수탈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커다란 이득을 얻었습니다. 이건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했다는 뜻입니다. 20세기 초반,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위해 사회주의는 식민지 수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회주의조차 식민지 수탈에 동의했던 것처럼,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를 비판했고 식민지 수탈에 반대했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탄압했습니다.

 

 

[아즈텍, 프레데터, 원시적인 주술, 울창한 열대 밀림….]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들러붙었고 공산주의를 탄압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커다란 위기에 빠졌습니다. 공산주의는 식민지 독립 운동들을 지원했으나, 공산주의가 커다란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이 지원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오랜 동안,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했기 때문에, 서구 제국주의는 너무 강력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제국주의)를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압도했고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에게 이윤 극대화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주의는 많은 것들을 상품들이라고 판단합니다. 자연은 예외가 아닙니다. 자연은 자연보다 상품이 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자연을 파괴합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엔코미엔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짓밟았던 것처럼, 여전히 자본주의는 제3세계를 짓밟습니다. 미국 권력이 세계화 자본주의를 주도하기 때문에, 미국 권력은 제3세계를 짓밟습니다. 미국 권력이 세계화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것처럼, 서구 중심주의는 지배적입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아메리카를 수탈했기 때문에, 서구 중심주의에게 아즈텍, 마야는 열등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즈텍, 마야처럼, 서구 중심주의에게 잉카는 열등한 것일 수 있습니다. 비록 미국 권력이 볼리비아를 짓밟는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이 볼리비아를 조롱하는 것처럼, 서구 중심주의는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비슷하다면, 프레데터가 야만적인 악당, 주술적인 악당이기 때문에, 서구 중심주의는 아즈텍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프레데터-아즈텍은 서구 중심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서구 중심주의를 유발하기 때문에, 이 해석(프레데터-아즈텍)은 서구 제국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비판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서구 제국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이 해석(프레데터-아즈텍)은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건 오직 서구 중심주의만 과거 아메리카 문화를 왜곡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구 중심주의 이외에 다른 것들 역시 과거 아메리카 문화를 왜곡하는지 모릅니다. 전통적인 한반도 문화에게 아즈텍 피라미드 제사는 너무 낯설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남한이 삼성 공화국인 것처럼, 자본주의는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문제이기 때문에, 이 해석(프레데터-아즈텍)은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 이 스크린샷(링크)이 풍자하는 것처럼,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아즈텍 재규어 전사는 야생 동물(재규어)을 모방합니다. 중국 추코누, 사라센 마메루크, 브리튼 롱보우맨은 야생 동물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비단 중국, 사라센, 브리튼만 아니라 다른 고유한 유닛들 역시 동물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즈텍 유닛만 재규어를 모방하는 것처럼, 대중적인 관념은 아즈텍을 문명보다 자연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프레데터와 아즈텍이 비슷하기 때문에, 프레데터가 원시적이고 주술적이기 때문에, 아즈텍이 자연이기 때문에, 프레데터-아즈텍(-자연)은 위험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이건 프레데터-아즈텍 그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프레데터는 SF 외계인입니다. SF 외계인은 문화·예술입니다. 문화·예술은 다양한 해석들을 보장합니다. 다양한 해석들 덕분에, 그 자체로서, 프레데터-아즈텍은 나쁜 연결이 아닙니다. 문제는 문화·예술(상부 구조)보다 경제·사회(토대)입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핑크 타이드를 짓밟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식민지 피해자들을 조롱합니다. 서구 제국주의(토대)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 지배적인 관념 내부에서 프레데터-아즈텍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재규어 전사처럼, 지배적인 관념은 아메리카를 자연이라고 왜곡할 수 있습니다.



※ 영화 <아바타> 스틸샷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5PSNL1qE6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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