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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식수 전쟁 2017>과 무장 봉기 해석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식수 전쟁 2017>과 무장 봉기 해석

OneTiger 2019. 7. 9. 20:38

새시 로이드가 쓴 <식수 전쟁 2017>은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심각한 기후 변화 때문에, 인류 문명은 식수 전쟁에 휘말립니다. 민중들은 비참하게 몰락하고, 곳곳에서 폭동들은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국가 정부는 무능하게 대처하고, 결국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런던 역시 대규모 폭동에 휘말리고 아비규환에 빠집니다. 소설 주인공 로라에게 기후 변화, 식수 부족, 비참한 생활 고난, 대규모 폭동, 아비규환은 지옥 같습니다. 남한 여자들은 남한이 헬지옥이라고 말하나, 소설 속에서 로라는 런던이 정말 헬게이트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아비규환 런던은 헬게이트 런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격한 운동권은 무장 봉기를 노립니다. 소설 주인공 로라는 무장 봉기에 반대하나, 남자 친구 에디는 과격한 운동권에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로라는 혁명에 소총과 폭발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나, 에디는 무장 봉기 없이 민중들이 정부를 상대하지 못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로라이기 때문에, <식수 전쟁 2017>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은 무장 봉기보다 비폭력 혁명에 찬성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 <식수 전쟁 2017>은 과격한 무장 봉기에 반대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문제는 <식수 전쟁 2017>이 정확하게 명제를 선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설 주인공 로라는 과격한 운동권에게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식수 전쟁 2017>은 무장 봉기에 반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에디는 로라의 남자 친구입니다. 로라는 에디를 사랑합니다. 에디가 과격한 운동권에게 동의한다고 해도, 로라는 에디를 사랑하고 에디를 응원합니다. 로라는 무장 봉기에 동의하지 않으나, 무장 봉기를 설명하기 위해 소설은 어느 정도 비중을 할애합니다. 심지어 소설 전반적으로 이건 꽤나 중요한 논쟁입니다. <식수 전쟁 2017>은 무장 봉기에 반대하(는 것 같으)나, 이건 정답이 아닐지 모릅니다.


로라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사건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소설 시점이 다소 편협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만약 <식수 전쟁 2017>이 3인칭 관찰자 시점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면, 소설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로라는 얼마든지 신나게 떠들 수 있습니다. 로라는 소설 화자 '나'이고, 소설 화자 '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들과 감정들을 솔직하게 당장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은 다릅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합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은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은 문자 그대로 관찰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마음들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신이 되고, 신으로서 작가는 수많은 마음들을 늘어놓습니다. 1인칭 시점에서 소설 화자 '나'는 유일하게 심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심리들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소설 화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들과 행동들을 이용해 그저 심리들을 추측할 뿐입니다. 1인칭 시점 소설에서 '나'는 소설 속의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한 유일한 창문입니다. 반면, 전지적 작가 시점에는 수많은 창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수많은 창문들을 이용해 소설 속의 사건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소설 <식수 전쟁 2017>에서 에디가 소설 화자이거나 에디가 전지적 시점으로 심리를 드러낸다면, 독자들은 로라보다 에디에게 동조할지 모릅니다. 독자들이 무장 봉기에 반대한다고 해도, 소설 화자가 에디이기 때문에, 에디가 생각들과 감정들을 직접 전달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에디에게 감정을 이입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소설에서 형식과 주제는 긴밀하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현실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없으나, 소설에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특정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원할 때, 작가는 소설 시점을 비롯해 다양한 문학 형식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소설을 해석할 때, 독자들은 비단 내용과 주제만 아니라 형식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독자들은 로라가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판하거나 에디가 너무 과격하다고 나무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로라가 보편적인 진리를 말한다고 호평하거나 에디가 현실을 직시한다고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소설 형식을 논의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어떻게 형식이 주제에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로라와 에디는 소설 등장인물입니다. 로라와 에디는 그저 소설 등장인물에 불과합니다. 새시 로이드가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로라와 에디는 무장 봉기가 옳거나 나쁘다고 다투지 않았을 겁니다.


오직 소설 속에서만 로라와 에디는 존재합니다. 현실에는 로라와 에디가 없습니다. 독자들이 현실에 로라와 에디가 있다고 간주한다면, 이건 오류일 겁니다. 독자들이 <식수 전쟁 2017>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소설 속의 세계에 빠질 수 있으나, 독자들이 소설을 평가하기 원한다면, 독자들은 소설에서 빠져나와야 할 겁니다. 소설 외부에서 독자들은 소설 시점, 문단 구성, 문체와 필력, 작가 인터뷰, 미사여구들, 문학적인 비유들, 문학 사조, 장르 공식들을 언급해야 합니다. 분명히 이런 소설 형식들은 소설 주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종종 어떤 독자들은 이런 사실을 잊습니다. 이런 독자들은 현실에 소설 등장인물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독자들은 소설 시점과 문학적인 비유들과 문단 구성과 문학 사조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건 문학 비평이 아닐 겁니다. 사람들이 힐러리 클린턴을 비판하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시점과 필력과 비유와 사조를 언급하지 않을 겁니다. 현실에 힐러리 클린턴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시점과 필력과 비유와 사조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본가 계급의 앞잡이로서 힐러리 클린턴이 대기업들을 편든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신문 논설은 얼마든지 힐러리 클리턴을 먼지가 나도록 깔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 비평과 신문 논설은 다릅니다. 독자들이 <식수 전쟁 2017>을 평가하고 싶다면, 독자들은 소설 형식들을 언급해야 할 겁니다. 이건 독자들이 소설들을 평가할 때 반드시 독자들이 소설 형식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자들이 오직 소설 주제만 평가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소설 형식보다 소설 주제에 훨씬 치중한다고 해도, 이건 독자의 자유입니다. (사실 여기 <SF 생태주의>에서 많은 게시글들 역시 형식보다 내용, 설정, 주제에 치중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소설을 훨씬 제대로 평가하기 원한다면, 독자들은 소설 형식들을 언급해야 할 겁니다. 적어도 독자들은 왜 소설이 소설인지 언급해야 할 겁니다.



물론 독자들이 형식과 내용과 주제를 함께 언급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하나의 정답으로 귀결하지 않을 겁니다. 여전히 독자들은 로라가 옳거나 에디가 옳거나 양쪽 모두 옳거나 양쪽 모두 틀리거나 다른 주제들이 있다고 해석할 겁니다. 새시 로이드가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면, 여기에는 정답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새시 로이드가 로라를 편들거나 에디를 편든다고 해도, 독자들이 새시 로이드를 반드시 믿어야 하나요? 새시 로이드가 소설을 썼기 때문에, 독자들이 반드시 새시 로이드를 믿어야 하나요? 새시 로이드가 반드시 진실을 말한다고 독자들이 완벽하게 장담할 수 있나요?


종종 작가들은 자신들이 쓴 소설들을 직접 해석하지 않습니다. 작가들은 침묵을 지킵니다.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판단을 넘깁니다. 이건 작가가 반드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단편 소설 <다곤>을 옹호한 것처럼, 작가들은 소설들을 옹호하거나 직접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하는 작가들처럼, 독자들은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새시 로이드는 의도적으로 틀린 대답을 내놓거나 알쏭달쏭한 대답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새시 로이드는 독자들이 직접 판단을 내리기 원할지 모릅니다. 누가 새시 로이드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현실에는 전지적 시점이 없습니다.



독자들은 새시 로이드를 어느 정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새시 로이드가 소설을 쓰는 동안, 새시 로이드에게는 어떤 특정한 의도가 있었을 겁니다. 독자들은 이걸 이용해 소설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치인의 연설보다 정치인의 정책을 믿어야 하는 것처럼, 독자들은 작가 인터뷰에 완전하게 기대지 못할 겁니다. 소설 <노변의 피크닉>이 모호한 외계인 설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작가는 완벽한 정답이 아닙니다. 만약 작가가 완벽한 정답이 된다면, 아무도 <노변의 피크닉>을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은 독자가 작가에게 너무 기대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이런 충고 때문에, 새시 로이드가 로라를 편든다고 해도, 독자는 새시 로이드에게 완전하게 기대지 못할 겁니다.


새시 로이드는 그저 소설 작가에 불과하고, 오히려 어떤 관점에서 새시 로이드보다 독자들은 훨씬 무장 봉기를 제대로 이해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장 봉기 논쟁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소설 <식수 전쟁 2017>에서 소설 주인공 화자 로라가 무장 봉기에 반대한다고 해도, 이건 정답이 아닐지 모릅니다. 다른 독자들은 에디를 긍정하고 로라를 비판할지 모릅니다. 소설 <노변의 피크닉>과 달리, <식수 전쟁 2017>에는 외계인이 없으나, 모호한 외계인 설정처럼, 무장 봉기 논쟁에는 정답이 없을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이 무장 봉기에 반대한다고 해석할 테고, 어떤 독자들은 다르게 해석할 겁니다.



만약 창작물이 수많은 해석들을 내놓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창작물을 바라봐야 하나요? 조건 없이,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수많은 해석들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예전에 듀나님과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 <캐롤>을 다르게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듀나님은 <캐롤>에서 레즈비언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 <캐롤>에서 레즈비언 요소와 함께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무슨 해석이 옳은가요? 듀나님과 이동진 평론가 중에서 누가 옳은가요? 영화 속에서 테레즈가 레즈비언 정체성에서 거리를 두는 것 같을 때,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테레즈가 레즈비언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나요?


아니면 테레즈가 다른 것을 걱정하나요? 다른 사람들이 동성애를 차별하기 때문에, 테레즈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표현하지 못하나요? 그래서 듀나님이 옳고, 이동진 평론가가 틀리나요? 아니면 이동진 평론가가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나요? 감독 토드 헤인즈는 영화 <캐롤>이 비단 레즈비언 로맨스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포함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레즈비언 정체성을 부정하나요, 아니면 이게 레즈비언 정체성을 다른 것들과 함께 언급하나요? 아니, 독자가 소설 작가에게 완전히 의존하지 못한다면, 왜 관객이 영화 감독에게 완전히 의존해야 하나요? 이건 끝없는 논쟁입니다. 어쩌면 듀나님과 이동진 평론가는 모두 옳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듀나님과 이동진 평론가를 모두 인정해야 하나요? "문학에는 수많은 해석들이 있어. 듀나님과 이동진 평론가는 모두 옳아. 다른 해석들 역시 옳아. 그래서 논쟁은 필요하지 않아. 우리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어." 이렇게 관객들이 결론을 내린다면, 이런 결론이 옳은가요? 정말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문제가 아닌가요? 하지만 만약 <캐롤>이 이성애 로맨스 영화였다면, 듀나님은 날을 세우고 이동진 평론가를 까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캐롤>이 이성애 로맨스 영화였다면, 이동진 평론가가 보편적인 로맨스를 운운했다고 해도,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왜 <캐롤>이 화제가 됩니까? <캐롤>이 동성애를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왜 동성애가 문제입니까? 현실 속에서 동성애를 비롯해 성 소수자들이 약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현실 속에서 억압적인 사회가 동성애를 비롯해 성 소수자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면, 이동진 평론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현실에 약자들이 있기 때문에, 억압적인 사회가 약자들을 너무 탄압하기 때문에, 이동진 평론가 해석은 도마에 올라갑니다. 아무리 이동진 평론가가 레즈비언 로맨스를 차별하지 않았다고 해도, 현실이 삐뚤어지고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에, 이동진 평론가 해석은 문제가 됩니다.



현실이 너무 삐뚤어진 운동장이라면, 어설픈 중립과 배려는 지배적인 관념을 편들 겁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보편적인 로맨스를 언급했기 때문에, 동성애 차별론자들은 이런 해석을 이용해 레즈비언 로맨스를 지우기 원할지 모릅니다. 만약 현실이 삐뚤어지지 않았다면, 이동진 평론가 해석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라이브톡에서 3시간 동안 이동진 평론가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퍼트리샤 로우스미스나 퍼트리샤 미들스미스라고 부른다고 해도, 이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연이어 <소금의 값>을 <설탕 가격>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이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이건 그저 우스꽝스러운 소동에 불과할 겁니다. 세계적인 작가들과 평론가들 역시 실수들을 저지릅니다.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썼는지 잊거나, 소설 제목을 잘못 말하거나, 영화 대사를 잘못 인용합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퍼트리샤 로우스미스로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청중들은 이걸 스스로 여과할 수 있습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퍼트리샤 로우스미스가 된다고 해도, 이건 탄압과 차별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 소수자 문제는 탄압과 차별로 이어집니다. 심지어 이건 죽음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창작물을 해석할 때, 우리는 현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이 문제이기 때문에, 진짜 문제가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억압적인 현실을 바꿔야 합니다. 현실은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입니다.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는 동성애를 탄압합니다. 영화 해석에는 상대성이 있으나, 가부장 문화에는 상대성이고 나발이고 자시고가 없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절대적으로 나쁩니다. 가부장 문화는 절대적으로 착취와 억압입니다. 아무리 듀나님과 이동진 평론가가 싸운다고 해도, 듀나님과 이동진 평론가는 민중들이 억압적인 남한 정부를 뒤엎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양쪽 모두 오직 영화, 창작물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양쪽 모두 현실 속의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억압적인 사회가 약자들을 차별함에도, 지식인들이 그저 창작물 해석에만 몰두한다면, 이게 올바른 해석일까요? 영화 <위플래시>가 개봉했을 때, 여러 평론가들은 국내 교육을 개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경제학 교과서들, 생물학 교과서들, 역사 교과서들이 거짓말들을 늘어놓고 어린 학생들을 세뇌시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옳은 해석일까요? 이게 옳은 해석이라고 해도, 이게 근본적인 해석이 될 수 있나요? 평론가들이 그저 창작물 타령만 불러야 하나요?



영화 <캐롤>에는 기후 변화와 이상 가뭄이 없습니다. <캐롤>은 환경 아포칼립스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례를 <식수 전쟁 2017>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비단 <식수 전쟁 2017>만 아니라 수많은 창작물들에 이런 사례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바이오스피어 건물부터 외계 행성 테라포밍까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에서 기후 변화와 자본주의 오염이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에, 생태학 SF 덕후들은 훨씬 이런 해석을 의식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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