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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식물 아내>부터 티타누스 모수라까지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식물 아내>부터 티타누스 모수라까지

OneTiger 2019. 12. 29. 20:13

[모스라는 자연 영성 분위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반면, 오타치는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할 겁니다.]

 

 

수마트라 호랑이는 야생 동물입니다. 야생 동물로서 수마트라 호랑이는 자연 생태계 최고 포식자입니다. 다른 여러 최고 포식자들, 알파 프레데터들처럼, 수마트라 호랑이는 자연 생태계가 풍요롭다는 증거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는 생태학적인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수마트라 호랑이는 독특한 진화 증거입니다. 아무르 호랑이 및 벵골 호랑이와 수마트라 호랑이는 아주 다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에게는 훨씬 풍성한 갈기, 짙은 줄무늬들, 물갈퀴, 작고 날렵한 체구가 있습니다. 어쩌면 계통 분류학에서 수마트라 호랑이는 아무르 호랑이 및 벵골 호랑이와 독립적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특성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가 최고 포식자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수마트라 호랑이는 권력을 상징할지 모릅니다. 공자가 포악한 정치와 무서운 호랑이를 비교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에게 생태학적인 지표 및 계통 분류학보다 권력은 중요한 문제일지 모릅니다. 만약 공자가 수마트라 호랑이를 봤다고 해도, 공자는 어떻게 야생 밀림에서 호랑이와 생물 다양성이 상호 작용하는지 파악하지 않았을 겁니다. 열대 밀림 생태학자와 공자가 똑같은 수마트라 호랑이를 본다고 해도, 생태학자와 공자는 다른 것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수마트라 호랑이에게서 생태학자가 생태학적인 지표를 뽑아내거나 공자가 정치 철학을 뽑아내는 것처럼, 어떤 대상에게서 사람들은 다른 측면들을 뽑아낼지 모릅니다. 코니 윌리스는 <둠스데이 북>을 썼습니다. 어떤 독자들에게 <둠스데이 북>은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둠스데이 북>이 시간 여행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둠스데이 북>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둠스데이 북>이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크리스마스에 모태 솔로들이 <나 홀로 집에>를 시청하는 것처럼, 크리스마스에 어떤 독자들은 <둠스데이 북>을 읽을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코니 윌리스가 여자 SF 작가라고 주목할지 모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자 작가들보다 남자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SF 울타리에서도 이른바 3대 그랜드 마스터는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같은 남자들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에게 성 해방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전형적이고 똑똑한 백인 남자들은 대표적인 SF 등장인물이었고, 아직 이런 경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SF 장르는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여자 작가 코니 윌리스에 주목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어떤 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재미일 겁니다. <둠스데이 북>이 시간 여행 이야기든, 크리스마스 이야기든, 여자 작가 소설이든, 중요한 기준은 재미입니다. <둠스데이 북>이 재미있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둠스데이 북>을 읽을 겁니다. 하지만 '재미'가 무엇인가요? 왜 <둠스데이 북>이 재미있나요? 아무 이유 없이, <둠스데이 북>이 그저 재미있는 소설에 불과한가요? 어쩌면 <둠스데이 북>이 시간 여행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크리스마스가 시간적인 배경이기 때문에, 여자 작가가 소설을 썼기 때문에, 독자들은 <둠스데이 북>이 재미있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소설 <휴먼 디비전>은 발랄하고 개성적인 등장인물들, 복잡한 줄거리, 희극적이고 암울한 분위기, 해학적인 수다 보여줍니다. <휴먼 디비전>과 <둠스데이 북>은 똑같이 사이언스 픽션, 소설 매체입니다. 하지만 <휴먼 디비전>이 시간 여행 이야기보다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시간적인 배경이 크리스마스가 아니기 때문에, 존 스칼지가 남자 작가이기 때문에, <휴먼 디비전>과 <둠스데이 북>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뭔가를 파악할 때, 사람들은 여러 특성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것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과 영화 <퍼시픽 림>은 거대 괴수들을 보여줍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과 <퍼시픽 림>에서 거대 괴수들이 치고 박고 싸우기 때문에, 두 영화는 비슷합니다. 만약 관객들이 거대 괴수 싸움박질을 원한다면, <고지라: 괴수왕>과 <퍼시픽 림>은 비슷한 분류가 될 겁니다. 어쩌면 관객들은 영화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를 함께 좋아할지 모릅니다.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거대한 드래곤 스마우그가 드워프들을 습격하기 때문입니다. <뜻밖의 여정> 초반부에서 스마우그는 드워프 왕국을 불태우고, 이런 장면은 상당히 웅장합니다. <고지라: 괴수왕>에서 (킹)기도라가 벼락을 치고 도시를 부수는 것처럼, 스마우그는 드워프 왕국을 불태웁니다.

 

스마우그가 드워프 왕국을 불태우는 것처럼, <퍼시픽 림>에서 거대 괴수 오타치는 도시를 파괴합니다. 기도라, 스마우그, 오타치는 모두 거대 괴수이고, 거대 괴수로서 기도라, 스마우그, 오타치는 문명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기도라, 스마우그, 오타치는 비슷한 분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라, 오타치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적어도 기도라, 오타치는 사이언스 판타지에 속합니다. 반면, 스마우그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 속합니다. 스마우그는 전형적인 화룡입니다. 아무리 기도라, 스마우그, 오타치가 비슷한 분류가 된다고 해도, 스마우그에게는 결정적인 차이(중세 유럽 판타지)가 있습니다.

 

 

어떤 관객들에게 기도라, 스마우그, 오타치는 비슷한 분류입니다. 하지만 어떤 관객들은 중세 유럽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게다가 <고지라: 괴수왕> 및 <퍼시픽 림>과 달리,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스마우그는 다른 거대한 뭔가와 싸우지 않습니다. 거대한 드워프 조각상은 스마우그에게 도끼를 날리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오직 스마우그만 거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스마우그의 폐허>보다 <고지라: 괴수왕> 및 <퍼시픽 림>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거대한 화룡이 핵심 소재라고 해도, 영화 주제는 거대한 화룡이 아닙니다.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주제는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 모험입니다. 거대한 화룡보다 중세 판타지 모험은 훨씬 중요한 주제입니다. 영화 <호빗> 3부작에서 스마우그는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영화 <반지 원정대>에는 거대한 화룡이 없으나, 많은 관객들은 <반지 원정대>와 <스마우그의 폐허>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관객들에게 두 영화는 똑같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반지 원정대>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관객들은 <퍼시픽 림>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런 관객들은 거대 괴수보다 중세 판타지 모험, 마법사, 검사, 엘프, 드워프를 훨씬 중시합니다.

 

 

스마우그와 오타치가 비슷하다고 해도, <반지 원정대>와 <퍼시픽 림>은 다릅니다. 만약 어떤 관객들이 기도라, 스마우그, 오타치를 함께 좋아한다고 해도, <반지 원정대>에 거대 괴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관객들은 <반지 원정대>를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이런 분류는 <고지라: 괴수왕>을 훨씬 멀리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과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은 똑같이 고지라 시리즈에 속합니다. 만약 관객들이 <고지라: 괴수왕>을 좋아한다면, 관객들이 <괴수 행성> 3부작을 좋아할까요? 대답은 모호합니다. <괴수 행성> 3부작은 거대 괴수 대전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폭넓은 관점에서 <괴수 행성> 3부작은 고지라 시리즈에 속하나, <괴수 행성> 3부작은 거대 괴수 대전보다 행성 테라포밍, 자연 생태계 변화, 트랜스휴머니즘, 인류 문명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괴수 행성> 3부작에서 거대 괴수들보다 이런 것들은 훨씬 핵심 소재이고, 그래서 거대 괴수 팬들은 <괴수 행성> 3부작을 비판합니다. 3편 <행성 포식자>에는 (킹)기도라가 있으나, 많은 거대 괴수 팬들은 이게 진정한 기도라가 아니라고 야유합니다. 만약 어떤 관객들이 <퍼시픽 림>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관객들은 <괴수 행성> 3부작, 행성 테라포밍, 트랜스휴머니즘, 인류 문명 변화를 싫어할지 모릅니다.

 

 

<괴수 행성> 3부작에서 '지구인들'은 열대 밀림 부족과 만납니다. 마이나와 미아나는 열대 밀림 부족에 속하고, 그들은 전형적인 '문명인'이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주인공 하루오 사카키는 전형적인 지구인, 문명인이나, 마이나와 미아나는 열대 밀림 부족민, 새로운 인간 유형입니다. <괴수 행성> 3부작은 전형적인 문명인이 열대 밀림 부족민, 새로운 인간을 만나고 자연과 문명을 깨닫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장대한 행성 테라포밍과 트랜스휴머니즘 속에서 전형적인 문명인은 열대 밀림 부족민을 만나고 자연과 문명을 회고합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과 <퍼시픽 림>에는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스마우그의 폐허> 역시 어떻게 자연과 문명이 변증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하지 않습니다. 비록 <괴수 행성> 3부작이 얄팍한 고민, 진부한 생태 철학, 낭만적인 자연 관점을 드러낸다고 해도, 분명히 자연과 문명을 고찰하기 위해 <괴수 행성> 3부작은 행성 테라포밍, 트랜스휴머니즘, 열대 밀림 부족을 이야기합니다. 주연 등장인물 마이나는 열대 밀림 부족 소녀이고, 마이나는 (서구 산업 자본주의가 아닌) 또 다른 문명, 여자, 제3세계, 사회적인 약자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마이나와 달리, <고지라: 괴수왕>과 <퍼시픽 림>과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열대 부족 소녀는 주연을 맡지 않습니다.

 

 

그래서 <괴수 행성> 3부작과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야생종>, 단편 소설 <식물 아내>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세상 숲>, <야생종>, <식물 아내>는 자연 환경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여기에는 인간 진화, 제3세계, 생태 철학, 여자, 또 다른 문명이 있습니다. <행성 포식자>는 고지라 시리즈에 속하나, <고지라: 괴수왕>보다 <행성 포식자>는 <세상 숲>, <야생종>, <식물 아내>에 훨씬 가깝습니다.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가 제3세계, 거대 괴수, 행성 테라포밍, 트랜스휴머니즘, 대대적인 생태계 변화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괴수 행성> 3부작과 <문명: 비욘드 어스>는 비슷합니다.

 

SF 팬들은 <세상 숲>, <야생종>, <식물 아내>, <괴수 행성> 3부작, <문명: 비욘드 어스>가 비슷하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숲>에 거대 괴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SF 팬들은 어떻게 <괴수 행성> 3부작과 <세상 숲>이 비슷한지 반박할지 모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 거대 괴수 3종 세트(크라켄, 제노 타이탄, 공성 벌레)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문명: 비욘드 어스>와 <퍼시픽 림>을 함께 좋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퍼시픽 림>은 자연과 문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비욘드 어스>와 <식물 아내>가 자연과 문명을 비슷하게 논의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는 모스라가 있습니다. 거대 괴수로서 모스라는 자연의 여신에 가깝습니다. 영화 <퍼시픽 림>에는 온갖 거대 괴수들이 있으나, 이 영화에는 자연의 여신이 없습니다. 아무리 관객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관람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자연의 여신으로서 거대 괴수를 찾지 못할 겁니다. 비단 <퍼시픽 림>만 아니라 이런 블록버스터 영화들에서 자연의 여신으로서 거대 괴수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모스라는 아주 기발하고 독특하고 고유한 SF 설정입니다. 오타치, 나이프 헤드, 슬래턴은 전형적이고 파괴적인 거대 괴수 설정이나, 모스라는 훨씬 독창적이고 고유합니다.

 

아무리 <고지라: 괴수왕>과 <퍼시픽 림>이 비슷하다고 해도, 아무리 관객들이 두 눈을 부릅뜨 관람한다고 해도, <퍼시픽 림>에서 자연의 여신을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반면, <괴수 행성> 3부작에서 이건 가능합니다. 마이나와 미아나는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기 위한 주술사에 가깝습니다. 마이나와 미아나는 자연의 여신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어머니 자연이 있고, <식물 아내> 역시 어머니 자연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래서 <고지라: 괴수왕>(의 모스라), <괴수 행성> 3부작, <문명: 비욘드 어스>, <식물 아내>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런 분류는 논리적입니다.

 

 

[모스라는 열대 부족 소녀와 새로운 자연, 사회로 이어집니다. 오타치에게 이건 너무 어려울 겁니다.]

 

 

만약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관객들이 모스라를 좋아한다면, 관객들은 거대하고 성스러운 어머니 자연 분위기를 느끼기 원할 겁니다. 이런 관객들에게 <퍼시픽 림>은 만족스럽지 않을 겁니다. 반면, 아무리 거대 괴수 팬들이 <괴수 행성> 3부작에게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괴수 행성> 3부작은 거대하고 성스러운 어머니 자연 분위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는 짤막하나, 분위기 연출은 정말 대단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러 기준들을 이용하고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소설, 만화, 영화, 게임에는 오직 한 가지 측면만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분류들은 다양해집니다.

 

분류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분류와 어떤 분류는 충돌하거나 대립합니다. 웹진 alt.SF가 SF 소설과 SF 게임이 다르다고 펄펄 날뛰는 것처럼, 국내 대표 SF 평론가로서 고장원님이 SF 비디오 게임보다 SF 소설을 훨씬 중시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게임보다 소설에 속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SF 매체로서 소설처럼 게임은 중요할 겁니다. 이 블로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떤 골수 SF 독자들은 이 블로그가 소설과 게임을 너무 무리하게 연결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소설' <미친 아담>과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가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나요?

 

 

이 블로그에는 비단 '소설' <미친 아담>과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류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류들은 많은 비판들에 부딪혀야 합니다. 이 블로그에서 아무리 제가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제 분류는 옳지 않습니다. 제 분류는 정석이 아닙니다. 탕수육 부먹파가 찍먹파를 사도라고 취급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이 블로그가 정석보다 사도라고 간주할 겁니다. 이런 비판 역시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제 분류가 억지 연결이 될지 모름에도, 왜 제가 <미친 아담>과 <문명: 비욘드 어스>를 연결하나요? 아니, 비단 저만 아니라 왜 수많은 평론가들이 장르를 분류하나요?

 

어제 12월 28일 게시글은 마스다 미리가 그린 <밤하늘 아래>를 이야기했습니다. 만화 <밤하늘 아래>는 일상 만화 장르에 속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교양 천문학이 있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에게 <밤하늘 아래>는 천문학 서적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만화책 띠지가 가리키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가 영어 학습 교재라고 분류합니다. 마스다 미리는 일상 만화 작가이나, 분명히 <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는 일상 만화보다 영어 학습 교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류에서 <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와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는 다른 장르에 속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수마트라 호랑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기준들을 만듭니다. 인간들은 수마트라 호랑이를 만들지 않았으나, 수마트라 호랑이를 바라보기 위해 인간들은 생태학을 만들고 계통 분류학을 만듭니다. 열대 밀림 생태학에서 수마트라 호랑이와 열대 밀림 파충류는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갈지 모르나, 계통 분류학에서 수마트라 호랑이와 열대 밀림 파충류는 다른 울타리에 속할 겁니다. 인간들이 생태학과 계통 분류학을 만드는 것처럼, 인간들은 장르들을 만듭니다. 생태학과 계통 분류학이 수마트라 호랑이를 다르게 바라보는 것처럼, 장르들은 창작물들을 다르게 분류합니다.

 

우리 인생에 정도(正道)가 없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다양한 측면들을 향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양한 측면들을 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주 다양한 주관적인 경험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주관적인 경험들은 다양한 선택들을 향해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뭔가를 먹기 원할 때, 입맛들이 상대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한정식 메뉴를 선택할 테고, 어떤 사람들은 고르곤졸라 포카치아를 달달한 벌꿀에 찍을 겁니다. (고르곤졸라 포카치아 역시 '찍먹'입니다.) 사람들이 한정식 메뉴를 선택하든, 고르곤졸라 포카치아를 달달한 벌꿀에 찍든, 이건 상대적인 선택입니다. 이런 선택들에는 우열과 정답이 없습니다.

 

 

이건 모든 선택, 연결, 분류가 상대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정식 메뉴와 고르곤졸라 포카치아는 똑같이 먹거리이고, 예외 없이, 인간은 뭔가를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한정식 메뉴와 고르곤졸라 포카치아가 상대적인 선택이라고 해도, 양쪽 모두 먹거리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가 육체적인 존재인 것처럼,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이고, 이건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먹거리 고르곤졸라 포카치아와 육체적인 존재 인간처럼, 분류들이 상대적이라고 해도, 분류하기 위한 기준에는 '배후'가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헬조선에서 많은 (남자) 시민들은 '일베-메갈-페미'를 분류합니다. 메갈리아가 커다란 화제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일베처럼, 메갈리아는 극단적입니다. 메갈리아는 성 해방을 부르짖습니다. 일베처럼 메갈리아가 극단적이고, 메갈리아가 성 해방을 부르짖기 때문에, 헬조선 (남자) 시민들은 '일베-메갈-페미'를 분류합니다. 분명히 일베와 메갈이 똑같이 극단적이기 때문에, 일베-메갈 분류는 틀리지 않습니다. '꼴페미 씨발년'은 타당한 분류입니다. 문제는 분류 기준 '배후'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여자들을 차별함에도, 일베-메갈 분류는 돌봄 노동 착취를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광신도들이 우상을 떠받드는 것처럼, 오히려 자랑스러운 헬조선 시민들은 자유 시장 경제를 떠받듭니다.

 

 

자랑스러운 헬조선에서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체계입니다. 그래서 일베-메갈 분류가 타당하다고 해도, 이런 분류 '배후'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자랑스러운 헬조선 (남자) 시민들이 혜화역 시위를 향해 꼴페미 씨발년이라고 욕한다고 해도, 꼴페미 씨발년 '배후'는 멍청하고 한심한 망상, 억지 연결입니다. 이건 진정한 억지 연결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본주의와 수구 꼴통 씨발을 연결해야 합니다. 이건 훨씬 타당한 분류입니다. 그래서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씨발이 됩니다. '가부장 제도-자유 시장 경제-씨발'은 훨씬 타당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뭔가를 분류할 때, '배후' 문제는 훨씬 근본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내가 이것들을 분류하는가? 기준 '배후'가 무엇인가? 왜 내가 다른 기준들보다 이 기준을 중시하는가?" 마이나는 제3세계, 생태계 변화, 새로운 사회, 여자, 사회적인 약자, 어머니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같은 가부장적인 기후 변화 재앙 시대에서 마이나는 의미심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티타누스 모수라부터 <미친 아담>까지, 마이나는 이런 분류에 속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가부장적인 기후 변화이기 때문에, 다른 기준들보다 '티타누스 모수라-마이나-식물 아내-세상 숲-야생종-문명: 비욘드 어스-미친 아담' 분류는 훨씬 중요한지 모릅니다.

 

 

다른 많은 분류들이 상대적인 것처럼, '티타누스 모수라-마이나-식물 아내-세상 숲-야생종-문명: 비욘드 어스-미친 아담' 분류는 상대적입니다. 문제는 분류하기 위한 기준 '배후'입니다. 이런 분류는 상대적인지 모르나, 분류하기 위한 기준 배후, 가부장적인 환경 오염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게 자본주의 환경 오염은 가장 심각한 위기입니다. 어쩌면 근미래 경제 공황과 제3차 세계 대전보다 기후 변화는 훨씬 치명적일지 모릅니다. 21세기 초반 시점에서 자본주의에게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은 가장 커다란 위기였습니다. 기후 변화는 이것을 능가할지 모릅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가 대대적인 경제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이런 영향이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을 뛰어넘을지 모른다고 예측합니다. 만약 이런 예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기후 변화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될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뉴딜이 세계 대공황을 끝냈다고 생각하나, 이건 착각입니다. 뉴딜보다 제2차 세계 대전은 경제 대공황을 끝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1930년대 경제 공황을 끝낸 것처럼, 만약 기후 변화가 경제 공황을 부추긴다면, 경제 공황을 끝내기 위해 인류 문명에게는 3차 세계 대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 근미래 경제 공황, 3차 세계 대전은 맞물립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심각한 문제임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유 시장 경제를 떠받듭니다. 자랑스럽게 무식한 헬조선 (남자) 시민들 역시 자유 시장 경제를 떠받듭니다. 솔직히 지질학적인 단위에서 홀로세 대멸종, 6번째 대멸종을 부추기는 행성급 환경 오염 앞에서 워마드가 정말 문제가 되나요? 하지만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동시에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그래서 여자들이 차별을 받음에도, 헬조선 (남자) 시민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보다 워마드를 물어뜯습니다. 왜 헬조선 시민들이 자유 시장 경제를 떠받드나요? 헬조선 시민들이 열등하고 멍청하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이고, 지배적인 관념이 시민들을 세뇌하기 때문에, 시민들은 열등하고 멍청해집니다. 시민들이 멍청하다고 해도, 이건 시민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본주의가 진짜 문제이기 때문에, 티타누스 모수라-마이나-식물 아내-미친 아담 분류 '배후'는 진짜 문제를 지적합니다. 기후 변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기후 변화를 비판하기 위한 시선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제3세계, 생태계 변화, 새로운 사회, 여자, 사회적인 약자, 어머니 자연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이 분류 '배후'에는 가장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 그림 <Mothra2019> 출처: Syrazel-NightRose,

https://www.deviantart.com/syrazel-nightrose/art/Mothra2019-81564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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