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팀펑크 장르가 뒤를 돌아볼 때 본문
[SF 장르는 19세기 유럽에서 비롯했죠. 이런 사례처럼, 스팀펑크는 그 시대를 반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사상, 노선, 주제를 살필 때, 원류나 기원을 더듬는 과정은 중요할 겁니다. 철학에는 원류나 기원이 있을 테고, 어떻게 그런 원류나 기원이 흐르는지 살펴본다면, 우리는 철학을 훨씬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겠죠. 흐름과 순서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철학이 흘러왔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왜 그것이 발생했는지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철학이나 사상에는 여러 분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분파들을 비교하고 싶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것들이 갈라지고 파생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고 싶다면, 우리는 기원으로 돌아가고, 어떻게 처음에 그것이 나타났는지 알아야 할 겁니다.
가령, 유럽 사회 민주주의를 보세요. 어떻게 사회 민주주의가 나타났을까요? 왜 사회 민주주의가 좌파임에도, 허구한 날 유럽 급진 좌파들은 사회 민주주의를 까고 까고 또 깔까요? 20세기 초반에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급진 좌파들은 자신들을 사회 민주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사회 민주주의가 혁명을 부정적으로 바라봄에도, 왜 그때 좌파 혁명가들이 자신들을 사회 민주주의자라고 불렀을까요? 왜 로자나 레닌이 자신을 사회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했을까요?
오직 21세기 초반의 유럽 사회 민주주의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런 물음들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이런 물음들에 대답하고 싶다면, 우리는 19세기 유럽으로 돌아가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만나는 시점을 살펴야 합니다. 이건 비단 인문학이나 사회 과학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고생물학자들을 보세요. 고생물학자들은 공룡이 아직 멸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음? 뭐라고요? 공룡이 아직 멸종하지 않았다? 이게 동네 뒷산에 스테고사우루스가 돌아다닌다는 뜻인가요? 이게 동네 하천에서 스피노사우루스가 온코프리스티스를 잡아먹는다는 뜻인가요?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중생대 생태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공룡이 나타났고, 어떻게 공룡이 진화했고, 어떻게 공룡이 사라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원류와 흐름을 살피지 못한다면, 우리는 왜 새가 공룡인지 알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계보를 그리고, 어떻게 공룡들이 갈라졌고, 어떻게 그것들 중 일부가 조류가 되었는지 (왜 조류와 파충류가 하나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여러 현상들이나 철학들이나 사상들을 살펴야 할 겁니다. 이 세상에 이상적이고 깨끗하고 순수한 원시 자연이 존재할까요? 여러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환경 운동가들이나 시민 운동가들조차 그런 소리를 떠듭니다.
하지만 진화 역사를 살펴보세요. 자연 생태계가 진화하는 동안 생물 다양성은 계속 붕괴했고 다시 부흥했습니다. 심지어 진화 역사에는 다섯 차례 대멸종들이 있었습니다. 이것들 중 뭐가 이상적이고 순수한 원시 자연일까요? 원시 자연을 보호하고 싶다면, 우리가 아노말로카리스를 복원해야 할까요? 원시 자연을 보호하고 싶다면, 우리가 '5억 년 전의 생물 다양성 폭발'을 복원해야 할까요? 스피노사우루스가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 동물을 다시 복원해야 하나요? 아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자연 생태계는 끊임없이 줄어들고 다시 늘어납니다. 그건 인간의 손을 떠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그렇게 자연 생태계는 순환했습니다.
따라서 이상적이고 순수한 원시 자연은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환경 운동가들조차 이상적인 원시 자연을 운운합니다. 수구 세력들은 훨씬 그렇고요. 그래서 일부 환경 운동가들은 인류가 사라져야 한다고 어리석게 주장하죠. 그들은 선사 시대의 농업 혁명이 환경 파괴라고 말하죠. 이건 너무 형이상학적인 분석입니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망상들이 많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해결이 안 되겠죠. 만약 그들이 원류를 파악하고 기원을 파악하고 흐름을 더듬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은 아주 중요합니다.
SF 소설 역시 비슷합니다. SF 소설은 19세기 유럽에서 비롯했습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세상이 아주 급격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와 달리, 19세기 근대성은 사람들이 절대 상상하지 못하는 것들을 엄청나게 쏟아냈습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떴고 이 놀라운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이런 놀라움을 표현한 가장 유명한 문구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일 겁니다.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지배 기간 동안 부르주아들은 과거의 모든 세대가 창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창조했다. 자연력의 정복, 기계, 농업과 공업에서 화학을 응용하는 방법, 증기선 항해, 철도, 전신, 경작을 위한 모든 대륙의 개간, 하천 운하, 땅에서 솟아난 것 같은 인구. 과거 무슨 세기가 이런 생산력이 사회적인 노동력의 무릎에서 잠들었음을 예감했는가?" 이 문구는 얼마나 유럽 사람들이 놀라 자빠졌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세상이 극단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SF 소설(사이언티픽 로망스)은 19세기 유럽에서 비롯했고, SF 소설들 역시 시대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들은 19세기 유럽을 살펴야 할 겁니다. SF 평론가들은 왜 19세기 유럽이, 하필 다른 곳이 아니라 19세기 유럽이 SF 소설을 낳았는지 분석해야 할 겁니다. 게다가 SF 장르 역시 그런 것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 SF 장르들 중 무슨 장르가 19세기 유럽에 주목할까요? 당연히 그건 스팀펑크 장르일 겁니다. 스팀펑크는 19세기 유럽(과 비슷한 가상 세계들)로 들어가고, 19세기 유럽이 보여주는 온갖 혼란들을 비틀고 풍자하고 과장합니다. 19세기 유럽에서 근대성과 봉건성은 대립했고, 과학과 강령술은 대립했고, 가스등과 전기 불빛은 대립했습니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팀펑크 소설에서 과학자는 마법사와 어울리고, 전기 잠수함은 바다 괴수와 싸울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는 거의 유일하게 SF 소설이 태어나는 시점을 뒤돌아보는 SF 장르일 겁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렇게 스팀펑크 소설들을 사랑하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