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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펑크와 시대 착오적인 오류 본문

SF & 판타지/스팀펑크, 사이언스 판타지

스팀펑크와 시대 착오적인 오류

OneTiger 2018. 4. 1. 10:50

[20세기 초반에 이런 잠수함은 존재하지 않았죠. 스팀펑크는 시대 고증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재미있는 특징은 시대적인 고증을 뒤섞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현실과 가상을 혼합하고, 때때로 대체 역사나 평행 세계를 창조합니다.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작가는 현실과 가상이 갈라지는 경계를 허물고, 현실은 가상으로 넘어가고 가상은 현실로 넘어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판타지가 고증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도, 창작가는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판타지가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고증을 틀렸다고 해도, 창작가는 오버 테크놀로지나 대체 역사 같은 설정을 들이밀 수 있겠죠.


어제 저는 애니메이션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역사적이고 자연 과학적인 고증을 중시하는 관객은 여러 오류들을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시대 배경은 1914년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마일로가 후원자 휘트모어를 만났을 때, 휘트모어는 커다란 수족관과 실러캔스를 보여줍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비경 탐험물에 뭔가 고고학적이고 고생물학적인 요소를 집어넣기 원했을 테고, 그래서 실러캔스를 집어넣었겠죠. 실러캔스가 고대 모습을 간직했기 때문에.



하지만 실러캔스는 1938년에 발견되었죠. 따라서 이는 고증 오류입니다. 하지만 어떤 관객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에서 지구 역사는 진짜 역사와 다르게 흘렀습니다. <잃어버린 제국>에는 신비한 수정 동력이 존재하죠. 따라서 자연 생태계 역시 다르게 흘렀고, 1938년 전에 사람들이 이미 실러캔스를 발견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후원자 휘트모어가 탐사대를 조직했기 때문에 실러캔스를 일찍 발견했을지 모르죠. 탐사대는 중요한 목동의 일지를 찾았습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 이 탐사대는 목동의 일지 이외에 다른 유물이나 희귀한 생명체를 발견했을지 모르죠.


실러캔스는 고증 오류일 수 있으나, <잃어버린 제국>은 사이언스 판타지이고, 그래서 고증 오류를 반박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주인공 마일로와 탐사대는 아주 거대한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1914년에 아직 본격적인 잠수함 개념은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19세기에 이미 쥘 베른은 <해저 2만리> 같은 소설을 썼으나, 잠수함은 걸음마 수준이었고, 저 유명한 U-보트 같은 개념 역시 아직 확립되지 않았어요. 따라서 거대한 잠수함은 시대 착오적인 설정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스팀펑크 같은 사이언스 판타지는 그런 시대 착오적인 설정을 일부러 밀어붙입니다. 그런 시대 착오적인 설정은 관객을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밀어내고, 관객은 색다른 감성을 느낄 수 있겠죠. <잃어버린 제국>에 등장하는 율리시스 잠수함은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노틸러스보다 훨씬 진보한 잠수함입니다. 노틸러스는 감히 율리시스에 까불지 못할 겁니다. 아니, 20세기 후반 잠수함조차 율리시스보다 못할지 몰라요. 율리시스는 1910년대 기술로 만들지 못하는 오버 테크놀로지입니다. <잃어버린 제국>에는 비단 율리시스만 아니라 다른 땅굴 차량이나 잠수정들 역시 등장합니다. 그것들 역시 오버 테크놀로지죠.


하지만 관객이 그걸 고증 오류라고 비판한다면, 사이언스 판타지는 아예 존재할 명분을 잃을 겁니다. 그런 시대 착오적인 오류를 즐기고 비틀기 위해 작가들이 사이언스 판타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사실 19세기나 20세기 같은 시대적인 구분은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마술사가 너무 많다>나 (스콧 웨스터펠드의) <베헤모스>나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이나 (어제 이야기한) <아마겟돈의 꿈>이 모두 19세기 감성을 드러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짜 시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과학과 이성이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적인 서구 문명을 가리킵니다.



스팀펑크는 그런 근대적인 서구 문명에 현대적인 감각을 집어넣습니다. 현대적인 감각은 과학과 이성을 한껏 뻥튀기하고, 사람들은 역사와 과학과 미래가 뒤섞이는 장면을 바라봅니다. 그런 감성 속에서 사람들은 역사적인 진보나 과학이 나갈 방향을 회고하거나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죠. <잃어버린 제국>이 20세기 초반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저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잃어버린 제국>은 (과장된) 19세기 판타지의 연장선입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탐사대 병사들은 방독면을 씁니다. 하지만 1914년에 방독면은 별로 대중적인 장비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They are billions> 같은 스팀펑크 판타지 역시 방독면을 쓴 병사들을 보여줍니다. (아마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않기 위해 병사들은 방독면을 쓰는 것 같습니다.) 이게 고증 오류일까요. 아니죠. 오히려 이는 사이언스 판타지가 선사하는 즐거움입니다. 19세기 서구 병사들은 방독면을 쓰지 않았으나, 스팀펑크에서 병사들은 방독면을 쓸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제국>에는 여자 탐사대원들이 등장합니다. 이게 고증 오류일까요. 진짜 19세기 비경 탐험 소설들은 여자 탐사대원을 떠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잃어버린 제국>에 여자 탐사대원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게 고증 오류가 될 이유는 없겠죠.



사이언스 판타지가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고증을 마음껏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사이언스 판타지에게 너무 엄중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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