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중세 판타지와 볼터의 기계 공학 본문
[이런 장면은 중세 유럽 판타지보다 우주를 동경하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깝습니다.]
비디오 게임 <엔들리스 레전드>는 4X 전략 판타지입니다. 이 게임은 언뜻 중세 유럽 판타지로 보여요. 여러 게임 언론들이나 게임 플레이어들 역시 <엔들리스 레전드>가 중세 유럽 판타지라고 말하고요. 하지만 속내는 좀 더 복잡합니다. <엔들리스 레전드>는 <엔들리스 스페이스>와 똑같은 설정을 공유합니다. 제목처럼 <엔들리스 스페이스>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입니다. 따라서 <엔들리스 레전드>는 판타지처럼 보이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겉모양은 중세 유럽 판타지이나, 알맹이는 사이언스 픽션이죠.
사실 이는 별로 놀랍거나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SF 울타리 안에 판타지 같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많습니다. 잭 밴스나 마이클 무어콕이나 앤 매카프리나 나오미 노빅 등은 판타지 같은 사이언스 픽션을 쓰거나 판타지에서 많은 특징들을 본땄습니다. 어떤 창작물이 중세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을 넘나드는 현상은 특별하지 않고, <엔들리스 레전드>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세력은 볼터입니다. <엔들리스 레전드>에 여러 세력들이 등장하나, 그들 중 볼터는 좀 더 튑니다. 나중에 볼터가 우주에 진출하기 때문이죠.
중세 유럽 판타지 세력들과 달리, 볼터는 좀 더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습니다. 볼터는 과학 특성 세력이고, 첨단 과학으로 다른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볼터는 강화복이나 인간형 기계를 이용하고, 일반적인 병사들 역시 범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볼터 해병들은 특별하게 생긴 쇠뇌를 발사해요. 볼터는 기계와 생체를 결합하는 듯하고, 다른 세력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 기술을 연구합니다. 다른 세력들이 마법을 부리고 주문을 외울 때, 볼터는 자동 쇠뇌와 기계 공학과 로봇을 이용합니다. 나중에 볼터는 우주선을 연구하고, 행성 밖으로 진출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엔들리스 스페이스>로 이어지고, 그래서 볼터는 중세 판타지 세력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세력으로 바뀌죠. 볼터는 중세 판타지 속의 스페이스 오페라 세력이고, 덕분에 뭔가 좀 특별하게 보입니다. 강화복 병사와 인간형 기계가 중세 유럽 판타지를 휘젓고 다닌다면, 그게 평범하게 보일 이유가 없겠죠. 덕분에 볼터는 <엔들리스 스페이스> 시리즈에 꾸준히 출현하는 듯하고, 게임 제작진은 볼터를 주인공 세력으로 밀어주는 듯합니다. 저는 <엔들리스 스페이스> 시리즈를 제대로 플레이한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잘못 알았을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엔들리스 레전드>에서 볼터는 톡톡 튀는 세력이고, 볼터의 인간형 기계들은 중세 판타지를 독특하게 휘저을 수 있습니다.
중세 판타지를 휘젓는 기계 공학은 <엔들리스 레전드>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중세 판타지와 기계 공학이 만나는 설정은 드물지 않아요. <토치라이트> 같은 비디오 게임은 전사와 궁수와 마법사와 악마가 등장하는 판타지입니다. 전사는 장검을 휘두르고, 궁수는 활을 쏘고,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고, 사방에서 악마들이 몰려오죠. 좀비와 해골 병사는 일상이고, 거대한 마법은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토치라이트>는 비단 마법만 아니라 기계 공학 역시 보여줍니다. 이 게임에는 골렘을 빙자한 인간형 로봇이 등장하고, 게임 플레이어 역시 로봇들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드워프들은 보행 기계에 탑승하고 개틀링 기관총을 쏠 수 있어요.
<토치라이트> 같은 사례가 증명하는 것처럼 종종 중세 판타지와 기계 공학은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토치라이트> 같은 게임이 스팀펑크를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토치라이트>에서 인간형 기계나 보행 병기는 스팀펑크 분위기를 팍팍 풍깁니다. 이런 기계들은 고풍스러운 19세기 디자인과 황동 빛깔을 선보이고,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칙칙 뿜고, 톱니바퀴들을 돌립니다. 사실 중세 판타지가 기계 공학을 이용하고 싶다면, 이런 고풍스러운 스팀펑크 설정이 잘 어울리겠죠.
하지만 <엔들리스 레전드>의 볼터는 다릅니다. 볼터는 스팀펑크를 이용하지 않아요. 해병들, 강화복 병사들, 인간형 기계들은 19세기 디자인이나 고풍스러운 황동 빛깔이나 복잡한 톱니바퀴들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강화복 병사나 인간형 기계는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칙칙 뿜지 않습니다. 볼터의 병사들과 기계들은 훨씬 현대적으로 보입니다. <토치라이트>와 <엔들리스 레전드>는 똑같이 중세 판타지와 기계 공학을 결합했어요. 하지만 <토치라이트>는 고풍스러운 스팀펑크 설정을 이용했고, <엔들리스 레전드>는 좀 더 현대적인 디자인을 선택했죠.
만약 <엔들리스 레전드>에서 볼터가 스팀펑크 설정을 이용했다면, 나중에 <엔들리스 스페이스>와 연결하기가 어색했을 겁니다. <엔들리스 레전드>는 <엔들리스 스페이스>로 이어져야 하고, <엔들리스 스페이스>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따라서 <엔들리스 레전드>가 스팀펑크를 이용했다면, 스팀펑크가 스페이스 오페라로 이어지겠죠. 스페이스 오페라로 이어지는 스팀펑크…. 저는 이게 나쁜 궁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련된 스페이스 오페라로 이어지고 싶다면, 볼터는 스팀펑크보다 좀 더 현대적인 디자인을 선택해야 했을 겁니다. 이는 그저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나, 결과적으로 볼터에게 스팀펑크보다 좀 더 세련된 사이언스 판타지가 훨씬 어울립니다.
※ 개인적으로 <엔들리스 레전드>에서 제일 시선이 가는 세력은 와일드 워커스, 야생을 걷는 자들입니다. 윌리엄 모리스가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목가적인 판타지를 선보였기 때문에 저는 이런 목가적인 종족에게 관심이 쏠리는군요. 하지만 야생을 걷는 자들은 그런 목가적인 공동체보다 존 로널드 톨킨이 만든 우드 엘프에 더 가까운 세력입니다. 4X 판타지 게임에게 목가적인 사회주의 공동체를 기대하기가 어려울지 모르겠어요.
※ <반 헬싱의 놀라운 모험> 같은 게임과 달리, <토치라이트>는 구닥다리 로봇이 아니라 귀여운 로봇을 선보여요. <반 헬싱의 놀라운 모험>에서 스팀펑크 로봇들은 칙칙하고 딱딱하게 보이나, <토치라이트>에서 로봇들은 훨씬 둥글둥글하고 귀엽죠. 나중에 이를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