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테이시스>와 우주선 속의 녹색 지옥 본문
[우주선 속의 녹색 정원은 싱그러울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릇된 유전 공학이 망치지 않는다면.]
비디오 게임 <스테이시스>는 공포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영화 <에일리언>이나 <이벤트 호라이즌>과 비슷합니다. 배경 무대는 아주 거대한 우주선 내부입니다. 게임 주인공 존 마라첵은 우주선 내부를 돌아다닙니다. 문제는 존 마라첵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존 마라첵은 왜 자신이 우주선 내부를 돌아다녀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우주선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우주선 내부는 끔찍한 피칠갑 지옥에 가깝습니다. 우주선 승무원들은 끔찍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방에는 이상하고 기괴한 생명체들이 널렸고, 그것들은 시체들을 잔인하게 찢어발깁니다.
각종 장비들은 망가졌고 정상이 아닙니다. 역겨운 것들은 기본이고,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고 썰렁하고 적막하고 종종 소름이 끼칩니다. 우주선 내부를 돌아다니는 동안 존 마라첵은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지 조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각종 장비들이 망가졌기 때문에, 존 마라첵이 우주선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방에 기괴한 생명체들이 널렸기 때문에, 우주선 내부는 위험하고 복잡한 미궁에 가깝습니다. 존 마라첵이 약간 방심한다면, 경비 로봇들이나 이상한 생명체들은 존 마라첵을 쏘거나 죽일지 모릅니다.
SF 세상에서 이런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설정은 아주 진부하죠. 어떤 사람들은 <스테이시스>가 <에일리언>이나 <이벤트 호라이즌>을 모방하는 3류 우주 공포 게임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그런 진부함은 없지 않습니다. 이런 우주 공포 이야기를 만들 때, SF 게임 제작자는 어느 정도 그런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재가 진부하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주제나 관점이나 연출일지 모릅니다. 사실 여러 SF 작가들이 똑같은 소재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주제나 관점이나 연출에 따라 이야기들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똑같이 인공 생태계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서로 다른 서사들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작가는 엄중하고 과학적으로 인공 생태계를 조성하는 과정을 서술할 겁니다. 어떤 작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생태 사회주의적으로 인공 생태계를 관리할 수 있는지 서술할 겁니다. 어떤 작가는 인공 생태계를 이용해 생명 현상이 아름답고 경외적이라고 시적으로 서술할 겁니다. 사실 소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SF 장르가 창의적인 발상을 중시한다고 해도, 소재는 등장인물, 주제, 서사, 분위기, 해석을 절대적으로 좌우하지 못합니다. 소재가 진부하다고 해도, SF 장르는 얼마든지 다른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스테이시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별로 진부하다고 느끼지 못할 겁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미덕은 고전적인 감성과 세련된 분위기일 겁니다. <스테이시스>는 전형적인 포인트 앤 클릭 게임입니다. 시점은 아이소메트릭입니다. 게임 주인공 존 마라첵을 움직이고, 사물을 조사하고, 물품을 얻거나 사용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마우스 콘솔을 클릭합니다. 인터페이스는 직관적이고 간단합니다. 왕년의 루카스아츠 게임들과 달리, 구태여 게임 플레이어는 명령어를 클릭하거나 조합하지 않습니다. 인벤토리 역시 꽤나 제한적입니다. 구태여 조사 명령을 입력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간단하게 사물들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 플레이어는 다른 것에 상관하지 않고 퍼즐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여러 어드벤처 게임들처럼, <스테이시스>에서 퍼즐은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실 퍼즐은 게임 진행을 좌우하는 가장 커다란 요소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각종 퍼즐들을 제대로 풀 수 있다면, 게임 진행에 다른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몇몇 모호한 부분 이외에 게임 진행은 쾌적합니다. 따라서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테이시스>는 끔찍하고 적막하고 기괴하고 미래적인 분위기를 한껏 선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존 마라첵이 되고 그런 분위기에 빠질 겁니다.
<스테이시스>는 절대 역동적이지 않습니다. 몇몇 역동적인 부분 이외에 전반적으로 이 게임은 정적입니다. 심지어 게임 주인공 존 마라첵은 쉽게 뛰지 못합니다. 특히, 몇몇 지역에서 존 마라첵은 힘든 사건들을 겪고 흐느적거립니다. 당연히 게임 진행은 빠르지 않습니다. 게임 진행 그 자체가 어렵지 않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빠르게 서사를 넘기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분위기에 주목할 겁니다. 비단 <스테이시스> 이외에 다른 어드벤처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들은 그림으로 이루어진 소설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이런 게임들은 몽환적이고 유려한 게임 분위기를 중시했습니다. 이른바 시에라 어드벤처 게임들, 루카스아츠 어드벤처 게임들은 그런 특징을 추구하죠. 웃기고 산만한 <광기의 저택>부터 장대한 모험을 따라가는 <인디아나 존스: 아틀란티스의 운명>까지, 여러 게임들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드벤처 게임에 다른 특별한 액션이나 사격이나 전투가 없기 때문에 어드벤처 게임들은 분위기 연출에 승부를 겁니다. <사이베리아> 같은 게임은 스팀펑크 설정을 아름답고 광활한 그림과 합쳤고, 그래서 이 게임은 아주 좋은 평가들을 받았죠. <스테이시스> 역시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물론 <스테이시스>가 공포 게임이기 때문에 세련되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악몽으로 흘러갑니다. 거대한 우주선 내부를 돌아다니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악몽을 구경합니다. <스테이시스>는 아이소메트릭이 품은 입체적인 감성과 미래적인 우주선 인테리어와 화사(하게 끔찍)한 그림체를 멋지게 조합했습니다. <데드 스페이스> 같은 게임과 달리, <스테이시스>는 첨단 그래픽 효과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시점이 아이소메트릭이기 때문에, 첨단 그래픽 효과가 있다고 해도, 첨단 효과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소메트릭 그래픽을 감상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전지적으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이소메트릭은 특정한 부분을 자세하게 포착하지 못하나, 대신 전반적으로 풍경을 둘러볼 수 있죠. (그래서 <엑스컴>처럼 많은 전략 게임들은 아이소메트릭 시점을 선호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전장을 한 눈에 둘러봐야 하기 때문이죠.) <스테이시스>는 이런 특징에 주목했고 섬세한 그래픽으로 우주선 내부를 조망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그래픽과 분위기에 흠뻑 취할 수 있습니다. 역겨운 생명체들을 견딜 수 있다면,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게임 플레이어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겠죠.
주제와 서사에서 <스테이시스>는 그릇된 유전 공학을 지탄합니다. 유전 공학이 상업성을 쫓을 때, 얼마나 첨단 과학이 위험하고 역겨울 수 있는지 <스테이시스>는 섬세하고 유려한 그래픽과 분위기 연출로 강조합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생체 트랜스휴머니즘이나 인공 생태계를 지지한다고 해도, <스테이시스>가 자랑하는 역겨운 유전 공학들을 구경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마음을 돌릴지 모릅니다. 심지어 풍성하고 싱그러운 녹색 식물들 역시 기괴하고 역겨울 수 있습니다. 존 마라첵은 테아라는 우주선 승무원을 만납니다. 테아는 식물들을 키우는 생물학자입니다. 당연히 테아는 식물 재배 구역을 가장 좋아합니다. 여기는 싱그럽고, 풍성하고, 자연적입니다.
하지만 유전 공학은 싱그럽고 풍성한 자연을 얼마든지 끔찍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선샤인> 같은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삭막한 우주선에서 식물 재배 구역은 가장 생명력이 넘치고 신선한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주선 승무원들은 식물 재배 구역이 식물원이나 정원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서 지친 마음을 치유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릇된 유전 공학은 치유가 흘러넘치는 녹색 정원을 소름이 끼치는 녹색 지옥으로 바꿀 수 있죠.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식물 재배 구역을 인상적으로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주 공포 게임들은 많으나, '우주선 속의 녹색 지옥'은 흔하지 않겠죠. (SF 팬들이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 속의 식물 재배 구역들을 비교한다면, SF 팬들은 다양하게 생태적인 상상력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유감입니다, 테아. 이런 풍경은 절대 생태적이지 않고, 풍성하지 않고, 자연적이지 않아요.]
<스테이시스>는 상업성에 물든 유전 공학을 비판하나,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상업성을 비판하는 다른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처럼, 결국 <스테이시스>는 윤리적인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 게임은 사회 구조를 의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사회 구조가 사람들을 압박한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거대 자본가들이 유전 공학을 휘두른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그걸 막을 수 있겠습니까. 민중들이 그걸 막고 싶다면, 민중들은 권력을 잡아야 합니다. 권력은 소수 거대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민중들이 계속 소수 거대 자본가들에게 얽매인다면, 미래 인류는 정말 끔찍한 녹색 지옥을 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