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셀 투 싱귤러리티>와 고풍, 보편성 본문
1)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2) 인터넷은 마음의 양식이다.
1번 문구와 2번 문구는 다릅니다. 두 문구는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1번 문구는 긍정적입니다. 2번 문구는 어색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독서(종이책)를 마음의 양식이라고 인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을 마음의 양식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라고 해도, 아무리 인터넷이 엄청난 지식들을 선사한다고 해도, 독서, 종이책과 달리, 인터넷은 마음의 양식이 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독서, 종이책이 마음의 양식인가요? 왜 인터넷이 마음의 양식이 아닌가요? 종이책과 인터넷에게 무슨 차이가 있나요? 이 물음들은 여러 대답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 대답들은 고풍(古風)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종이책은 고풍스러울 수 있습니다. 인터넷은 고풍스럽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풍은 옛날 분위기를 가리킵니다. 종이책은 옛날 분위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종이책이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처럼, 이미 고대 사람들은 종이책들을 썼습니다. 출판 기술들, 인쇄 기술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고대 종이책들이 대중적이지 않았다고 해도, 적어도 이미 고대 사람들은 문헌들(텍스트들)을 썼습니다. 종이책과 문헌(텍스트)이 비슷한 의미일 수 있기 때문에, 종이책은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엄청난 지식들을 선사했던 것처럼, 아주 오랜 동안, 종이책은 지식, 지혜를 상징했습니다. 종이책이 아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인류 문화들이 지식, 지혜를 상징하기 원할 때, 종이책은 좋은 기호일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중세 전략 게임입니다. 시대 배경이 중세이기 때문에, 대학교는 종이책 조각을 전시합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대학교 상징은 종이책입니다. 중세 게임 대학교가 종이책 조각을 전시하는 것처럼, 종이책은 지식(대학교)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가 중세 전략 게임이기 때문에, 다양한 문명 건물들은 고풍스럽습니다. 특히, 대학교가 학문의 전당이기 때문에, 대학교는 훨씬 고풍스러울 수 있습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가 섬세한 그림체를 선사하기 때문에, 섬세한 그림체와 고풍스러운 건물은 아주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 그림체를 호평합니다.) 만약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대학교가 컴퓨터 조각을 전시했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렸을 겁니다. 중세 대학교와 컴퓨터, 인터넷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컴퓨터, 인터넷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중세 문명이 중국이든, 사라센이든, 아즈텍이든, 비잔티움이든, 중세 문명은 컴퓨터를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중세 문명이 컴퓨터를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문명은 인터넷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중세 문명이 컴퓨터, 인터넷을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대학교 상징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중세 대학교 상징이 컴퓨터가 아닌 것처럼, 인터넷은 너무 짧은 역사를 드러냅니다. 20세기 후반 이후, 인터넷은 대중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20세기 이전에, 컴퓨터가 나타나기 전에, 인터넷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아, 이 역사는 100년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아아, 인터넷 역사는 100년에 미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터넷 역사가 100년을 넘어간다고 해도, 인터넷 역사보다 종이책 역사는 훨씬 압도적입니다. 종이책 역사에게 인터넷 역사는 그저 꼬꼬마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엄청난 지식들을 선사한다고 해도, 인터넷 역사는 감히 종이책 역사에게 깝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19세기 산업 혁명이 근대를 열었다고 해도, 여전히 19세기 근대 사람들 역시 종이책들을 썼고 종이책들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19세기가 근대 사회라고 해도, 근대 사람들은 컴퓨터를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썼습니다. <자본론>은 종이책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과학을 찬양했으나, 카를 마르크스는 종이책을 썼습니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썼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종이책입니다. 메리 셸리는 SF, 사이언스 픽션(과학적인 허구)을 시도했으나, 메리 셸리는 종이책을 썼습니다.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말레이 제도>를 썼습니다. <말레이 제도>는 종이책입니다.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과학자(진화 생물학자)였으나,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종이책을 썼습니다. 카를 마르크스, 메리 셸리, 알프레드 월리스처럼, 19세기는 근대가 시작한다고 알렸으나, 19세기 사람들은 종이책들을 썼습니다. 컴퓨터 역사는 너무 짧습니다.
정보 통신 기술들이 발달했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전자책들을 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자책들이 발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무리 21세기 초반이 과학 시대라고 해도, 과학 시대에서 종이책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건 영원히 종이책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언젠가 종이책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500년 이후, 전자책은 종이책을 밀어낼지 모릅니다. 1,000년 이후, 아무도 종이책을 읽지 않을지 모릅니다. 미래 사회에서 종이책은 그저 유물, 낡은 것, 골동품, 추억, 과거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미래 사회에서 종이책이 그저 낡은 것에 불과할지 모르는 것처럼, 언젠가 종이책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더 이상 미래 사람들은 종이책이 지식, 지혜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미래 사람들은 인터넷을 마음의 양식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미래 정보 통신 기술들이 종이책들을 밀어낼지 모르는 것처럼, 아무도 종이책이 고정적이고 절대적이라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비록 종이책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종이책은 유구합니다. 고대부터 21세기 초반 오늘날까지, 종이책이 지식, 지혜를 상징하는 것처럼, 꼬꼬마 인터넷은 감히 성숙한 종이책에게 깝치지 못합니다.
종이책이 성숙하기 때문에, 종이책은 마음의 양식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인터넷은 마음의 양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1번 문구는 긍정적이나, 2번 문구는 어색합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사람이 고풍을 중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1번 문구에게 동의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2번 문구에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1번 문구에게 반대하든, 2번 문구에게 동의하든, 인터넷보다 종이책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분명히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종이책이 유구하고, 인터넷이 너무 짧은 것처럼, 인문학자와 과학자는 유구하고 너무 짧습니다.
인문학자(scholar)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과학자(scientist)는 너무 짧은 역사를 드러냅니다. 종이책과 인문학자는 비슷합니다. 인터넷과 과학자는 비슷합니다. 이미 고대 사람들은 철학, 문학, 종교,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고대 문명들은 인문학자들, 스콜라들을 포함했습니다. 인문학자들, 스콜라들과 달리, 고대 문명들은 과학자들, 사이언티스트들을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과학자들, 사이언티스트들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이후, 마침내 과학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고대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인문학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나, 과학자는 자랑하지 못합니다.
과학 역사가 그저 200년을 넘을 뿐이기 때문에, 과학자는 유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대 인문학자들이 과학을 논의했다고 해도, 이 고대 과학은 근대 과학이 아닙니다. 고대 과학과 근대 과학은 너무 다릅니다. 고대 과학과 근대 과학이 다른 것처럼, 아무리 고대 인문학자들이 과학을 논의했다고 해도, 인문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다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인문학자들은 과학을 논의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문학자들을 과학자들이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다르기 때문에, 고대 문명은 과학자들을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자들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유구한 종이책과 너무 짧은 인터넷처럼, 인문학자는 유구하고, 과학자는 너무 짧습니다. 인문학자에게는 성숙한 전통, 품격, 역사가 있습니다. 과학자는 너무 어립니다. 인문학자에게 과학자는 그저 꼬꼬마에 불과합니다. 과학자가 그저 꼬꼬마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자는 고풍스럽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풍이 옛날 분위기를 가리키고, 과학자가 옛날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자는 옛날 분위기를 풍기지 못합니다. 인문학자가 옛날에 속하기 때문에, 인문학자는 옛날 분위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인문학자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차이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 논의는 고풍스럽습니다.
이 논의와 달리, 과학은 고풍스럽지 않습니다. "45억 년 전에, 태양계에는 생명체가 없었습니다. 지질학적인 규모에 대한 눈 깜짝 할 사이에, 거의 모든 것은 바뀌었습니다. 지구 원시 찌개는 생명체 기원을 일으키기 위한 유기 화합물을 포함합니다. 이 장대한 진화 게임이 펼치는 모든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이 클릭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 진화 페이지로 넘어갑니다. 생명 진화의 다음 장을 열기 위한 엔트로피를 얻으세요. 생명 혁명의 위대한 이정표-공룡 멸종, 불의 발견, 산업 혁명, 다른 것들을 이끌어내세요. 현재를 넘어서는 미래 진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보세요." 이 문구들이 고풍스러운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 문구들은 고풍스럽지 않습니다. 이 문구들이 진화 생물학을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고대에 속합니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고풍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 고풍스러운 철학 논의와 달리, 19세기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가 <말레이 제도>를 썼던 것처럼, 근대가 시작한 이후, 진화 생물학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근대가 시작하기 전에, 진화 생물학은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근대 이전에, 진화 생물학이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진화 생물학은 새로운 것입니다. 진화 생물학이 새롭기 때문에, 진화 생물학은 옛날 분위기를 풍기지 않습니다.
진화 생물학이 옛날 분위기를 풍기지 않기 때문에, 진화 생물학은 고풍스럽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셀 투 싱귤러리티>는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특히, 게임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세포부터 특이점까지, <셀 투 싱귤러리티>는 장대한 생명 진화 역사를 전개합니다. <셀 투 싱귤러리티>가 생명 진화 역사를 전개하기 때문에, <셀 투 싱귤러리티>는 진화 생물학에 속합니다. 적어도 <셀 투 싱귤러리티>는 진화 생물학을 모방합니다. 진화 생물학이 고풍스럽지 않고, <셀 투 싱귤러리티>가 진화 생물학을 모방하기 때문에, <셀 투 싱귤러리티>는 고풍스럽지 않습니다. 이 게임은 새롭습니다.
진화 생물학이 새로운 것이고, <셀 투 싱귤러리티>가 진화 생물학을 모방하기 때문에, <셀 투 싱귤러리티>는 새로운 것에게 가깝습니다. 이 관점에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와 <셀 투 싱귤러리티>는 대립합니다. 중세 아라비아 대학교가 종이책 조각을 갖추는 것처럼,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고풍스러울 수 있으나, 고대 사람들이 어류에서 양서류가 비롯했다고 논의하지 않았던 것처럼, <셀 투 싱귤러리티>는 고풍스럽지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는 인문학자에게 가깝습니다. <셀 투 싱귤러리티>는 과학자에게 가깝습니다. 과학자보다 인문학자는 유구합니다.
게다가 근대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지배적입니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 비중은 늘어났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는 너무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입니다. 자본주의에게 다른 무엇보다 자본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매출, 이윤, 돈벌이를 중시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출, 이윤, 돈벌이는 가장 중요합니다. 인문학자와 과학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인문학자와 과학자는 매출, 이윤, 돈벌이에게 종속됩니다. 과학자가 첨단 기술들을 연구하기 때문에, 과학자는 매출, 이윤, 돈벌이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과학자를 좋아합니다.
과학자와 달리, 인문학자는 첨단 기술들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인문학자는 철학, 문학, 종교, 역사, 다른 여러 가지를 연구합니다. 이것들은 첨단 기술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인문학자가 프레아 토라니를 연구한다고 해도, 프레아 토라니는 첨단 기술들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프레아 토라니가 첨단 기술들을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인문학자는 매출, 이윤, 돈벌이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다른 무엇보다 돈벌이를 중시하고, 인문학자가 돈벌이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인문학자를 싫어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자는 높은 위상으로 올라가나, 인문학자는 위기에 빠집니다.
과학자들, 사이언티스트들이 높은 위상으로 올라가고, 인문학자들, 스콜라들이 위기에 빠지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고풍스럽지 않습니다. 과학자와 자본주의가 이어질 때, 훨씬 멀리 고풍과 과학자는 떨어집니다. 오랜 동안, 인문학자와 자본주의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자는 천박한 돈벌이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건 과학자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화 시뮬레이션 <셀 투 싱귤러리티>는 경이롭습니다. 비록 이 진화 게임이 고풍스럽지 않다고 해도, 이 게임은 경이롭습니다. 비록 과학자가 고풍스럽지 않다고 해도, 과학은 경이롭습니다. 과학에게는 이 가치가 있습니다.
<셀 투 싱귤러리티>는 과학이 경이롭다고 보여줍니다. <셀 투 싱귤러리티>는 어떻게 생명 진화가 장대한 경로를 거쳤고 인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보여줍니다. 진화 생물학이 발달하기 전에, 인류는 어떻게 인류가 나타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신화가 생명 창조를 떠든다고 해도, 신화는 그저 허구에 불과합니다. 진화 생물학이 진짜 생명 창조를 설명하는 것처럼, 인문학, 스콜라보다 과학자, 사이언티스트는 경이롭습니다. 고풍과 경이, 이 두 감성은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판타지가 신화, 전설, 민담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판타지는 고풍스럽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사이언스, 과학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경이롭습니다. 판타지는 인문학자, 스콜라에게 가깝고,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자, 사이언티스트에게 가깝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이언스 픽션은 사이언티스트에게 가깝습니다.) 만약 어떤 독자들이 고풍을 좋아한다면, 이 독자들은 판타지 소설들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독자들이 경이를 좋아한다면, 이 독자들은 사이언스 픽션들을 좋아할 겁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인문학자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인문학자는 보편적입니다. 인문학자가 보편적인 것처럼, 판타지는 보편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어떤가요?
과학자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 오직 서구 사회에서만 과학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과학은 서구(유럽)에 속합니다. 과학은 중국, 아즈텍, 인도, 사라센에 속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도가 엄청난 문화를 자랑한다고 해도, 아무리 인도가 수학 기초를 닦았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인도보다 서구에 속한다고 느낍니다. 과학이 중국, 아즈텍, 인도, 사라센보다 서구에 속하기 때문에, 과학은 제한적입니다. 과학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과학자는 제한적입니다. 과학자처럼, <셀 투 싱귤러리티>는 제한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제한적입니다.
판타지는 보편적일 수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제한적입니다. 판타지가 보편적이고, 사이언스 픽션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는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2번 문구보다 1번 문구가 긍정적일 수 있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는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사람이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를 긍정적이라고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과학 시대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경이로운 과학은 많은 것들을 이룩했습니다. 아무리 인문학자들이 고풍스럽다고 해도, 고풍스러운 인문학자들보다 경이로운 과학자들은 많은 것들을 이룩했습니다.
과학이 많은 것들을 이룩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긍정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을 긍정적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전히 보편성은 걸림돌입니다. 아직 사이언스 픽션은 보편성을 얻지 못합니다. 1,000년 이후, 2,000년 이후, 3,000년 이후, 만약 과학 역사가 유구하다면, 미래 사이언스 픽션은 보편성을 얻을지 모릅니다. 미래 사이언스 픽션과 달리, 현재 사이언스 픽션은 보편성을 얻지 못합니다. 다행히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결합하고 사이언스 판타지가 된다면?
사이언스 판타지는 판타지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보편성을 얻습니다. 한편으로 사이언스 판타지는 사이언스, 과학을 덧붙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가 사이언스, 과학을 덧붙이기 때문에, <셀 투 싱귤러리티>가 경이로운 것처럼, 사이언스 판타지는 경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대지 모신을 모방하든, 중세 판타지가 스팀펑크를 도입하든, 가스 램프 판타지가 기계 장치들을 철컹거리든, 사이언스 판타지는 고풍, 보편성, 경이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판타지는 인기를 끄는지 모릅니다. 과학이 보편성을 얻기 전까지, 사이언스 판타지는 인기를 잃지 않을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적어도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은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가깝습니다. <괴수 행성> 3부작이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이 3부작은 경이를 선사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모스라가 위대한 어머니 여신이고, 어머니 여신이 고풍스럽고 유구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모스라는 보편성을 보장합니다. <괴수 행성> 3부작이 경이(스페이스 오페라), 보편성(어머니 여신)을 얻는 것처럼, 사이언스 판타지는 좋은 해답일 수 있습니다. 모스라처럼, 비디오 게임 <섀도우런: 드래곤 폴>에서 포이어슈윙은 어머니 여신에게 가깝습니다.
<섀도우런: 드래곤 폴>, 이 사이버펑크는 비단 포이어슈윙만 아니라 자연의 수호자, 켓찰코아틀 여신 Mujaji 역시 언급합니다. 미래 과학과 신화가 결합하기 때문에, 어떤 SF 팬들은 <드래곤 폴>을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하드 SF 우월주의는 사이언스 판타지를 너무 싫어합니다. 하드 SF 우월주의가 순수한 사이언스 픽션을 구분하기 원하기 때문에, Mujaji처럼, 사이언스 픽션이 판타지를 도입할 때, 하드 SF 우월주의는 얼굴을 찡그립니다. 하지만 미래 과학이 경이를 선사하고, 어머니 여신(포이어슈윙, Mujaji)이 보편성을 얻기 때문에, <드래곤 폴>은 경이와 보편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 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내세웁니다. 과학자, 사이언티스트는 인간입니다. 인문학자, 스콜라가 인간인 것처럼, 과학자, 사이언티스트는 인간입니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고, 과학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과학자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자는 편견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 역사는 과학자들이 많은 편견들에 빠진다고 보여줬습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매출, 이윤, 돈벌이를 위해 과학자들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왜곡합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자본주의가 다른 무엇보다 돈벌이를 중시하기 때문에, 심지어 환경 오염조차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원인입니다. 비록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라고 해도, 비록 자본주의가 행성급 오염 원인이라고 해도, 많은 과학자들이 편견에 빠지기 때문에, 이 과학자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 과학자들은 자본주의보다 인류를 비난합니다. 인류 중에서 압도적인 민중들은 빈곤층에 속하나, 많은 과학자들은 인류, 빈곤층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비난합니다. 이 비난이 과학인가요? 글쎄요, 과학이 객관적인가요?
※ 게임 <Cell to Singularity>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977400/Cell_to_Singular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