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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생체 딸랑이>, 문학 과장과 현실 비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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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 딸랑이>, 문학 과장과 현실 비판

OneTiger 2019. 10. 31. 20:16

[첨단 기술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새로운 자연을 조성합니다. 이건 예언보다 변화와 경이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대단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건조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머나먼 외계 행성을 향해 항해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착륙하고 불모지 행성을 바꿉니다. 이건 테라포밍입니다. 개척 과학자들은 우주선 생태 구역들을 불모지 행성으로 옮깁니다. 자연 생태계는 퍼지고, 불모지 행성은 싱그럽고 살아있는 행성이 됩니다. 외계 행성은 새로운 자연이 됩니다. 새로운 자연 속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이룩합니다. 새로운 사회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에 기반합니다. 새로운 문명은 기후 변화에 부딪히지 않을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기나긴 우주 항해, 개척 과학자들, 외계 행성 테라포밍, 이상적인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 환경 보호,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문명. 이런 것들은 아주 비일상적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유토피아임에도, 사이언스 픽션은 아무렇지 않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아무렇지 않게 비일상적인 것들을 늘어놓습니다. 여러 SF 소설들,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영화들, 게임들에게 이런 것들은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우주 탐사물 설정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환상적인 꿈은 전형적인 소재입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대단합니다. SF 우월론자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칭송한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닙니다. SF 우월론에는 여러 문제들과 한계들이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정말 대단합니다.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가 사이언스 픽션을 주구장창 떠들기 때문에, 이 블로그 역시 대단한지 모릅니다. (솔직히 국내에서 누가 이런 급진적이고 생태적이고 독창적이고 문학적이고 덕스러운 글들을 쓰나요?) 아니면 이 블로그는 그저 한심한 오타 천국에 불과한지 모르나,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은 대단하고, 대단한 사이언스 픽션은 여러 오해들에 부딪힙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대단하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오해합니다. '예언'은 가장 흔한 오해들 중에서 하나일 겁니다.


흔한 오해와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습니다. 고전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부터 최신 블록버스터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까지,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원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예언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서구 근대화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합치기 때문에, 종종 사이언스 픽션과 미래는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미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과 미래가 비슷해진다고 해도,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이버펑크가 미래와 비슷해질 때, 다른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헛다리들을 신나게 짚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하드 SF 작가들조차 그들이 위대한 예언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서 클라크는 하드 SF 소설이 미래를 고찰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예언이 아닙니다. 독자가 하드 SF 소설을 미래에 적용한다고 해도, 이건 예언보다 적극적인 해석에 가깝습니다. 독자는 소설 <뉴욕 2140>을 미래에 적용할 수 있으나, <뉴욕 2140>은 정말 기후 변화 때문에 해수면 상승이 뉴욕을 덮칠 거라고 예언하지 않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뉴욕 2140>이 기후 변화를 너무 과장했다고 지적하고, 킴 스탠리 로빈슨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대표적인 하드 SF 작가이나, 킴 로빈슨은 자신이 과학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드 SF 작가 역시 소설 작가입니다.


하드 SF 작가는 그저 소설 작가에 불과합니다. 분명히 하드 SF 소설들은 놀랍습니다. SF 우월론자들은 주류 문학과 다른 사변 장르들이 하드 SF 소설들에게 감히 까불지 못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이런 주장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으나, 분명히 하드 SF 소설들은 놀랍습니다. 하드 SF 소설들이 어려운 과학 용어들을 줄줄이 늘어놓기 때문에, 독자는 두 눈이 빙글빙글 돌아간다고 느낄 겁니다. 비디오 게임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이 온갖 첨단 장비들과 첨단 기술들을 제시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놀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뜰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것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예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이 미래 화성 테라포밍을 예언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가요? 분명히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은 온갖 첨단 장비들과 첨단 기술들을 이용해 새로운 자연을 조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이룩합니다. 하지만 이게 '예언'인가요? <서바이빙 마스>처럼, 정말 미래 개척 과학자들이 화성을 테라포밍할 수 있나요? 정말 미래 개척 과학자들이 온갖 로봇들을 이용해 대기를 뿜고, 수분을 뿌리고, 미생물들을 퍼뜨리고,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나요? 녹색 화성에서 미래 인류가 화성 공기를 쉼쉬고 싱그러운 녹색 나뭇잎들을 바라볼 수 있나요?


정말 미래 화성 바다에서 장수 거북이 우아하고 여유롭게 헤엄칠 수 있나요? 어쩌면 이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화성 바다에서 미래 개척 과학자들은 장수 거북들을 풀어놓지 못할지 모릅니다. 미래 개척 과학자들이 장수 거북들을 풀어놓기 원한다고 해도, 그들은 광범위한 해양 먹이 그물망을 절대 조성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미래 개척 과학자들은 행성 기후를 바꾸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돔 거주지만 건설할지 모릅니다. 생물학자들은 개조 미생물을 합성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개조 미생물 합성이 불가능하다면, 개척 과학자들은 화성 테라포밍 계획을 향해 작별 인사해야 합니다.



첫째 문단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외계 행성을 향해 항해하고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합니다. 이건 그저 불가능한 공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아무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미래를 겪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소설은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뉴욕 2140>은 미래를 장담하지 못하고,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은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이 뛰어난 그래픽을 이용해 온갖 첨단 기술들을 늘어놓기 때문에, 첨단 기술 홍수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서바이빙 마스>가 미래를 예언한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서바이빙 마스>와 달리, 미래 인류는 지구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서바이빙 마스>와 소설 <야생종>은 다르지 않습니다. <야생종>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과거를 돌아봅니다. <야생종>이 첨단 미래 문명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야생종>이 SF 소설이 아니라고 부정할지 모릅니다. <서바이빙 마스>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온갖 첨단 기술들을 늘어놓아야 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첨단 과학 기술들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소설 <야생종>은 우주 항해와 외계 행성과 메트로폴리스와 합성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야생종>이 SF 소설이 될 수 있나요? 어떻게 <야생종>과 <서바이빙 마스>가 똑같이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나요? 어떤 사람들은 <야생종>이 '예언'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부정하고 외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킴 스탠리 로빈슨은 그저 소설 작가에 불과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소설 작가인 것처럼, 옥타비아 버틀러는 소설 작가입니다. 킴 로빈슨이 미래를 예언하지 못하는 것처럼, 옥타비아 버틀러는 미래를 예언하지 못합니다. <뉴욕 2140>과 <야생종>은 그저 서구 근대화(기후 과학, 생명 과학)를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상력(해수면 상승, 초인 교배)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첨단 기술 사다리가 생명 공학, 테라포밍, 미래 사회학, 물리학, 행성 교신, 무인 로봇들을 늘어놓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첨단 기술 홍수에 빠집니다. 첨단 기술 홍수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미래를 바라볼지 모릅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미래를 겪지 못합니다. <서바이빙 마스>는 그저 서구 근대화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미래를 투영할 뿐입니다. 이건 예언보다 투영입니다. 이건 그저 투영에 불과합니다. 현실 속에는 합성 개조 미생물이 없습니다. 뭐라고 사이언스 픽션이 떠들든, 이건 그저 예언보다 투영에 불과합니다.



비단 <야생종>과 <뉴욕 2140>과 <서바이빙 마스>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놀라운 설정을 떠든다고 해도, 이건 예언이 아닙니다. SF 작가는 놀라운 설정을 고증하지 못합니다. 링월드 같은 초거대 건축물은 아주 경이로운 설정이나, 이것 역시 그저 투영에 불과합니다. 꾸물거리는 합성 미생물부터 초거대 링월드까지, 아주 경이로운 미래 설정과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메리 셸리가 본격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메리 셸리는 미래를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메리 셸리는 고딕 호러를 쓰기 원했습니다.


19세기 고딕 호러는 20세기를 거치고 원조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됩니다. '예언'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모든 문학에는 예언자 성향이 있습니다. 문학이 비유이기 때문에, 문학은 특정한 시대 상황에서 벗어나고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우리는 17세기 문학을 21세기 초반에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건 하드 SF 소설과 <야생종>이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드 SF 소설은 (기계) 공학적인 재미를 자랑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고, 이런 뚝딱뚝딱 과정은 즐겁습니다. <야생종>에는 뚝딱뚝딱 공학적인 재미가 없고, <야생종>과 하드 SF는 다릅니다.



[수몰된 메트로폴리스는 '예언'이 아닙니다. 이건 '과장'을 이용해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야생종>이 뚝딱뚝딱 공학적인 재미를 자랑하지 못한다고 해도, <야생종>과 <서바이빙 마스>는 모두 '예언'이 아닙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예언'이 아니라면, 왜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쓰고, 읽고, 좋아하나요? 왜 이 블로그가 빈약한 지식들을 이용해 사이언스 픽션을 주구장창 떠들기 원하나요? 변화가 경이롭기 때문입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자연 환경과 인류 사회는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수많은 사람들은 변화가 경이롭다고 찬양합니다. 경이로운 변화는 계속 이어질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변화가 이어질지 알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변화는 계속 이어질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여기에 주목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경이로운 변화가 계속 이어질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가 엄청난 환경 오염들을 일으키고 저임금 여자 노동자들을 착취한 것처럼, 변화는 경이보다 경악이 될지 모르나, 경이와 경악은 모두 엄청나게 놀라운 감정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변화에 주목하고 경이/경악을 연출합니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인류 문명은 신화와 전설과 민담을 이야기했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신화는 과학을 만나고, 신화와 과학은 파이널 퓨전~!!을 시도합니다. 고대 신화는 기적을 이용해 초인을 이야기했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을 이용해 초인을 이야기합니다.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 <뉴욕 2140>, <야생종>, <프랑켄슈타인>에는 공통적으로 이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서구 근대화, 변화와 경이/경악, 신화와 과학의 만남. 예언은 여기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경이로운 변화는 예언이 될 수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에게 이건 근본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 변화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시대 변화는 우연히 예언과 맞아떨어질 뿐입니다. 오히려 사이언스 픽션에게 예언보다 '비판'과 '저항'은 훨씬 중요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인류 문명에서 선지자들이 이상향을 이용해 현실을 파악한 것처럼, 시대 변화는 비판을 동반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새로운 자연, 새로운 사회를 제시하고 현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새로운 사회를 제시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와 현실은 대립하고, 이건 훨씬 강렬한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복된 천국과 힘겨운 지상처럼, 고대 선지자들 역시 이상향과 현실을 대조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대 선지자들과 사이언스 픽션은 비슷합니다. 하지만 고대 선지자들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과 논리, 계몽을 이용해 새로운 자연과 사회를 상상합니다. 그래서 서구 근대화 이후, SF, 유토피아, 해방 철학은 한 지붕 세 가족이 됩니다. SF, 유토피아, 해방 철학은 서로 뒤섞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을 이용하나, 한편으로 신화와 전설과 민담처럼, 여전히 사이언스 픽션은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에 속합니다. 사변 장르는 문제를 과장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동원하고 문제를 과장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을 이용해 문제를 과장하는지 보여줍니다. 아랫집 수진은 어떤 SF 소설을 씁니다. 소설 속에서 어떤 인류학자는 놀라운 사실을 증명합니다. 소설 속에서 인류학자는 어떻게 인간 여자에게 둥근 젖가슴이 있는지 증명합니다. <자연 변증법>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손이 인간 진화를 뒷받침했다고 주장합니다.


<자연 변증법>처럼, 인간에게 손은 중요합니다. 인간은 손을 이용해 뭔가를 만집니다. 이건 두뇌 발달을 돕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 노동을 존중합니다. 반면, 육체 노동은 하찮습니다. 사람들은 식당 설겆이 아줌마보다 대학 교수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손이 인간 진화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육체 노동은 중요합니다.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은 별개가 아닙니다. 인간이 손을 이용해 뭔가를 만지기 때문에, 인간 정신은 발달합니다. 아기는 손을 이용해 뭔가를 만져야 합니다. 인간 아기에게는 딸랑이 같은 장난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원시 인류에게는 장난감 공장이 없었습니다. 원시 인류는 도구들을 서툴게 만들었습니다. 원시 인류가 정교한 도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해도, 아기를 위해 원시 인류는 부드럽고 둥글고 포근한 장난감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원시 인류가 부드럽고 둥글고 포근한 장난감을 만들었다고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 여자에게는 둥근 젖가슴이 있습니다. 인간 여자는 아기를 안곤 합니다. 젖을 먹이기 위해 인간 여자는 아기를 안아야 합니다. 인간 여자에게 이건 주된 행동입니다. 당연히 자주 아기는 젖가슴과 만납니다. 젖가슴은 부드럽고 둥글고 포근합니다.


아기는 젖가슴을 얼마든지 만질 수 있습니다. 원시 인류가 장난감을 구태여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인간 여자에게는 장난감이 있습니다. 부푼 젖가슴은 부드럽고 둥글고 포근한 생체 딸랑이, 생체 장난감입니다. 인간 여자가 생체 딸랑이를 만들기 때문에, 인간 아기는 손을 이용할 수 있고, 이건 두뇌 발달을 뒷받침합니다. 결국 인간에게 '몸'이 있기 때문에,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이 이어지기 때문에, 엄마 품에서 아기가 배불리 먹고 마음껏 놀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 여자에게는 부푼 젖가슴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류학자는 이것을 증명하고, 이건 유명한 이론이 됩니다.



이게 유명한 이론이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사고 방식을 바꿉니다. 사람들은 인간에게 비단 이성만 아니라 '몸'이 있다고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정신 노동처럼 육체 노동이 고귀하다고 깨닫습니다. '손'은 정신 노동보다 육체 노동입니다. 인간은 뭔가를 만져야 합니다.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에서 나탈리 앤지어는 은퇴를 번복하는 것처럼 젖가슴 진화 이론이 가부장적인 편견에 자꾸 빠진다고 설명합니다. 생체 딸랑이 이론은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벗어납니다. 사람들은 여자의 몸이 남자를 위한 몸이 아니라 인류 번성(아기)을 위한 몸이라고 깨닫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돌봄 노동 사회화를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대중적인 지식인이 됩니다.


이렇게 아랫집 수진은 소설을 마무리하고 소설 제목을 <생체 딸랑이>라고 짓습니다. SF 소설 <생체 딸랑이>는 미래를 '예언'하지 않습니다. 정말 여자의 부푼 젖가슴이 생체 딸랑이인가요? 아기가 젖가슴을 만지기 때문에, 두뇌가 발달하나요? 어쩌면 이건 사실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그저 헛소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미래 인류학자들은 여자 젖가슴이 정말 생체 딸랑이라고 증명할지 모릅니다. 사실 유방(乳房)은 완방(玩房)인지 모릅니다. 만약 여자 젖가슴이 정말 생체 딸랑이라면, SF 소설 <생체 딸랑이>가 '예언'이 될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우연에 가깝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편견들을 비판하기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식당 설겆이 아줌마보다 대학 교수를 존중합니다. 사람들은 육체 노동보다 정신 노동을 존중합니다. 사람들은 돌봄 노동을 개무시합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은 육아가 노동이 아니라고 개무시합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은 여자의 몸을 왜곡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의 쾌락)를 위해 여자의 몸이 진화하고 나타난다고 왜곡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이런 편견들을 비판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왜 아랫집 수진이 구태여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동원하고 SF 소설을 쓰나요? 아랫집 수진은 일반적인 논설을 쓰고 편견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부장적인 편견은 너무 지배적입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이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논의를 과장하기 원합니다. 일반적인 논의보다 과장된 상상력은 가부장 문화를 훨씬 과감하게 공격할 겁니다. 고려 가요 <정석가>를 보세요. <정석가>는 옥(玉)으로 연꽃을 만들고 영원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보석 연꽃처럼, 문학이 뭔가를 강조하기 원할 때, 문학은 상상력을 동원하고 과장합니다. 가부장 문화를 과감하게 공격하기 위해 아랫집 수진 역시 논의를 과장합니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편견은 엉터리 우생학에 기반합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진화 이론이 아주 획기적이기 때문에, 우생학은 약자들을 계속 왜곡했습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진화 생물학을 과장하고 가부장적인 편견에 맞서기 원합니다. 이것 때문에, 사변 장르에 여러 종류들이 있음에도, 아랫집 수진은 사이언스 픽션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판타지 소설, 공포 소설, 무협 소설, 다른 사변 소설들보다 SF 소설 <생체 딸랑이>를 썼습니다. 하지만 왜 소설인가요?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처럼, SF 매체들은 다양합니다. 만화, 영화,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아랫집 수진이 만화, 영화, 게임보다 소설을 선택했나요? 그림을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영화가 많은 제작 비용을 요구하고, 게임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림, 촬영, 컴퓨터 프로그램보다 글자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글자는 사회적인(지배적인) 기호입니다. 아이들이 미술, 촬영, 프로그래밍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에, 아이들은 글자들을 배웁니다. 글자가 사회적인(지배적인) 기호이기 때문에, 쓰고 읽기는 가장 기초적인 교육입니다. 그림 그리기보다 문맹률은 사회 인프라를 가늠합니다. 글자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어떤 작가 지망생들은 만화, 영화, 게임보다 소설을 선택합니다. 이런 작가 지망생들이 소설을 제대로 쓸 수 있나요? 이런 작가 지망생들이 소설을 억지로 선택했음에도, 그들이 창작하기 위한 기쁨, 글을 쓰는 기쁨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나요?



[사변 장르에서 이런 소설과 <그린 플래닛>은 다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언보다 과장, 현실, 변화입니다.]



이런 작가들이 정말 제대로 소설들을 쓴다고 해도, 이런 작가들과 아랫집 수진은 다릅니다. <생체 딸랑이>는 진화 생물학 '이론'을 설명해야 합니다. 여자가 다른 사람들을 감싸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아기가 되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생체 딸랑이>는 이런 '심리'를 묘사해야 합니다. 이론과 심리 때문에, <생체 딸랑이>는 다른 무엇보다 소설이 되어야 합니다. 이론과 심리는 추상적이고, 다른 매체들보다 소설은 추상적인 것을 가장 구체적으로 전개할 수 있습니다. 글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심지어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진들은 특정한 감정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특정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오로진들은 그들에게 특정한 단어가 필요하다고 푸념합니다. 언어 없이, 인간은 감정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생체 딸랑이>는 어떻게 사람들이 아기 같은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지 묘사해야 합니다. <생체 딸랑이>는 심리를 서술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소설을 선택했습니다. 이론과 심리를 서술하기 위해 아랫집 수진은 소설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리 영화가 엄청난 제작 비용을 퍼붓고 멀티플렉스를 빵빵하게 운영한다고 해도, 영화는 추상적인 이론과 심리를 구체적으로 전개하지 못합니다. <생체 딸랑이>는 글자들을 이용해 (비일상적인) 젖가슴 진화 이론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생체 딸랑이>가 글자들을 이용해 인간 진화를 설명한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여자 젖가슴이 정말 생체 딸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이론이 옳다면, 사람들은 <생체 딸랑이>가 예언서라고 떠받들지 모르나, 아랫집 수진에게 '예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서구 근대화에 상상력을 덧붙이고 현실 속의 편견들에 저항하기 원했습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예언보다 과장된 저항이 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 문제들을 과장하고 편견들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사이언스 픽션이 저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생체 딸랑이>는 사이언스 픽션이 예언보다 저항에 어울린다고 증명합니다.


SF 소설, 심지어 하드 SF 소설조차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궤도 승강기, 링월드, 외계 행성 테라포밍, 궤도 조선소를 예언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드 SF 소설에게조차 핵심적인 목표는 예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서 클라크가 궤도 승강기를 제대로 예언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언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 변화에서 비롯하는 경이/경악, 과장과 새로운 신화, 현실 속의 저항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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