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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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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길을 찾는다." 유물론적인 생태학 SF 평론

OneTiger 2019. 12. 6. 20:15

[신진 대사, 번성, 진화 덕분에, 생명 현상은 감동적입니다. 심지어 비디오 게임조차 마찬가지입니다.]



르네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 오직 물질들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의식(정신)이 있으나, 인간 의식 외부에는 오직 물질들만 있습니다. 여기에서 물질은 비활성적인 것, 살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동물 역시 비활성적인 것입니다. 사실 동물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동물은 기계와 비슷합니다.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의식이 있기 때문에, 동물보다 인간은 훨씬 낫습니다. 이렇게 르네 데카르트는 세계관을 정리하나, 21세기 초반 시각에서 르네 데카르트는 심각한 생물종 차별론자입니다. 문제는 르네 데카르트처럼 카를 마르크스 역시 20세기 이전 서구 백인 남자 지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입니다. 초기 마르크스부터 후기 마르크스까지,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물론자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르네 데카르트 세계관과 20세기 과학 혁명은 크게 어긋나고, 그래서 르네 데카르트 세계관은 낡은 것입니다. 이건 구닥다리, 골동품입니다. 르네 데카르트처럼 카를 마르크스가 20세기 이전 서구 백인 남자 지식인이기 때문에, 마르크스 유물론 역시 낡은 것, 구닥다리, 골동품인지 모릅니다. 마르크스 유물론이 낡은 구닥다리인지 모름에도,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카를 마르크스 유물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원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카를 마르크스 유물론은 오직 자연 과학에만 몰두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유물론은 실천 철학, 사회 사상이고, 자연 과학 분야에서 마르크스 유물론이 낡은 구닥다리 골동품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사회 사상으로서 마르크스 유물론을 연구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원합니다. 게다가 '자연 과학적인 측면'에서 19세기 마르크스 유물론이 정말 낡은 것, 구닥다리, 골동품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첨단 과학 시대에도 여전히 마르크스 자연관에는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 유물론은 현실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오직 현실만 중요합니다. 현실에서 의식, 정신적인 측면은 비롯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도덕에게 가치를 부여할 때,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상정합니다. 이런 상정 위에서 사람들은 도덕에게 가치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왜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가요? 사람들은 이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개인의 자유는 중요합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상황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입니다. 개인의 자유는 우주적인 진리입니다. 하늘에서 이건 뚝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관념론에 불과합니다. 마르크스 유물론은 주체적인 의식을 강조하나, 이런 얄팍한 관념론은 주체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다고 해도, 하늘에서 이런 사고 방식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이런 사고 방식은 파생합니다. 여기에서 '현실'은 '생산 관계'입니다. 남한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생산 관계입니다. 생산 관계로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합니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기 때문에, 국가 정부는 시장 경제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영리 기업들이 온실 가스를 팍팍 뿜고, 행성급 환경 오염이 커진다고 해도, 국가 정부는 영리 기업들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생산 관계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떠듭니다.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를 떠들 때, 이것은 현실 속의 생산 관계를 정당화합니다. 만약 개인의 자유가 생산 관계,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정당화하지 못한다면, 개인의 자유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겁니다. 인간에게는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권리가 있습니다. 기후 변화 속에서 인간은 절대 건강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리 기업들은 온실 가스를 뿜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의 건강한 자유를 위해 영리 기업들은 온실 가스를 뿜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자유'는 자본가 계급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나불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개무시합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킨다고 해도,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열심히 지껄여대고 산업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이렇게 그 자체로서 개인의 자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생산 관계(산업 자본주의)에서 개인의 자유는 나타납니다. 생산 관계에서 도덕, 교육, 종교, 국가, 문학은 나타납니다. 하지만 왜 생산 관계인가요? 왜 생산 관계에서 정신적인 측면이 비롯하나요? 왜 다른 무엇보다 생산 관계가 중요한가요?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육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먹방들은 엄청난 인기들을 끕니다. 하지만 먹거리 방송들이 엄청난 인기들을 끌기 전에, 이미 19세기 서구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하늘에서 식량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에게는 식량이 필요하나, 하늘에서 식량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식량을 얻어야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식량을 얻나요? 어떻게 인간이 물고기를 먹을 수 있나요? 자연 환경에서 인간은 물고기를 낚아야 합니다. 자연 환경, 연못에는 먹거리(물고기)가 있고, 인간은 노동(낚시)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노동하기 때문에, 인간은 식량을 얻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먹고 삽니다. 마르크스 유물론에게 이건 핵심 개념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은 노동해야 합니다. 마르크스 유물론은 육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노동한다고 판단하고, '노동'은 핵심 개념이 됩니다. 문제는 소유 권리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연못을 차지한다면, 물고기를 먹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연못 주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연못을 차지한다면, 이 사람은 권력자, 지배 계급이 될 테고, 지배 계급은 다른 사람들, 피지배 계급을 억압할지 모릅니다. 마르크스 유물론은 이런 생산 관계에 주목합니다.


연못은 생산 수단입니다. 연못은 식량(물고기)을 얻기 위한 생산 수단입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연못 주인에게 복종합니다. 그래서 연못 주인은 사람들을 억압합니다. 만약 연못 주인 놈팽이가 여자를 성 폭행한다고 해도, 먹고 살기 위해 여자는 연못 주인 놈팽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는 것처럼, 여자 역시 연못 주인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시민 배당 개념이 존재하고, 물고기가 시민 배당이라면? 하루를 충분히 먹고 살기 위해 누구에게나 매일 물고기들을 어느 정도 낚기 위한 권리가 있다면?



평균적으로 매일 사람들은 물고기 다섯 마리를 먹어야 합니다. 이건 평균 열량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매일 다섯 마리를 낚기 위한 권리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낚시 권리가 있다면, 사람들은 연못 주인에게 저항할 수 있을 겁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공유지의 비극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고 지배 계급이 연못을 차지해야 한다고 떠벌이나, 먹고 살기 위해 여자는 연못 주인 놈팽이에게 매달리지 않을 겁니다. 여자는 연못 주인 놈팽이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고 연못 주인 놈팽이의 사타구니를 거침없이 걷어찰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산 관계와 생산 수단 소유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생산 관계 관점에서 마르크스 유물론은 인류 문명을 바라봅니다. 생산 관계 관점에서 마르크스 유물론은 인류 역사 흐름을 지켜봅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것이 역사 유물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론>을 강의하거나, 경제 공황과 세계 대전을 비판하거나, 민중 봉기를 연구할 때, 생산 관계는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누군가는 물을지 모릅니다.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산 관계는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인간이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가요? 식량 노동이 인간, 육체적인 존재의 전부인가요?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는 화성 생존자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화성 탐사 대원이었으나, 개척 기지가 무너졌기 때문에, 화성 탐사 대원들은 화성 생존자들이 됩니다. 화성에서 생존자들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화성은 불모지 행성이고, 화성에서 먹고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먹는 문제는 전부가 아닙니다. 어떤 남자 대원은 여자 대원들이 천연 자원이라고 말합니다. 왜 여자가 자원이 되나요? 개척지는 사회적인 재생산을 거쳐야 합니다. 만약 개척자들이 후손들을 낳지 않고 기르지 않는다면, 개척지는 망할 겁니다. 재생산 없이, 개척지는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합니다. 이건 개척지가 아닙니다.


개척지는 사회적인 재생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여자들 없이, 재생산 과정은 없습니다. 오직 여자만 아기를 낳고 먹일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중요하고, 그래서 남자 대원은 여자가 자원이라고 말합니다. 여자 대원은 발끈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여자는 자원이다)이 여자를 구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 때문에, 여자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여자의 육체는 자원이 되고, 자원으로서 여자는 존재합니다. 여자는 인간보다 자원, 아기를 낳고 먹이기 위한 자원이 됩니다. 여자는 인간보다 생체 인큐베이터, 생체 모유 생산 공장이 됩니다.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 차별, 억압입니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육체적인 인간에게 식량 노동은 전부가 아닙니다. 육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재생산해야 합니다. 재생산 없이, 인류 문명은 멸망합니다. 하지만 재생산이 중요하다고 해도, 지배 계급은 재생산 과정에 댓가를 지불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배 계급이 재생산에 댓가를 지불한다면, 지배 계급은 훨씬 적은 몫을 차지할 테고, 지배 계급은 권력을 강화하지 못할 겁니다. 자본가 계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가 계급에게 이윤 극대화는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사실 이윤 극대화는 유일한 목표입니다. 지구 환경이 무너진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 극대화만 중시합니다.


만약 자본가 계급이 재생산 과정에게 댓가를 지불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이윤의 일부를 분배해야 할 겁니다. 자본가 계급이 이윤의 일부를 분배하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은 댓가를 지불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생산 과정이 인류 문명을 뒷받침함에도, 재생산 과정이 아주 원초적이고 근본적임에도, 자본가 계급은 댓가를 지불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핑계를 대야 합니다. 댓가를 지불하지 않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핑계를 대야 합니다. 아하, 자본가 계급에게는 좋은 핑계가 있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이건 핑계가 됩니다.



여자는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육아를 반드시 맡아야 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직접 먹이기 때문에, 여자는 육아를 반드시 맡아야 합니다. 이건 자연의 섭리입니다. 이게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여자는 댓가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건 좋은 핑계입니다. 이건 너무 좋은 핑계입니다. 엘리너 마르크스는 여자에게 자연적인 소명 따위가 없다고 외쳤으나,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때문에, 심지어 여자들조차 엉터리 핑계를 믿습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은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화성의 왕궁>이 지적한 것처럼, 재생산 과정이 인류 문명을 뒷받침함에도, 자본가 계급은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음절로 '착', '취'입니다.


자본주의는 '착취'입니다. 자본주의는 여자의 육체를 왜곡하고 재생산 과정을 착취합니다. 재생산 과정을 착취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여자의 육체를 왜곡하고 자연의 섭리를 씨부렁거립니다. 댓가 없이, 여자는 육아를 반드시 맡아야 합니다. 육아 '노동'이 댓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는 보조적입니다. 남자는 돈을 버나, 육아 노동이 댓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는 보조적입니다. 남자는 주된 존재가 되고, 여자는 보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함부로 대합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백인이 흑인을 착취하고, 백인이 중요한 존재가 되고, 흑인이 보조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착취 경제' 자본주의에서 남자는 중요하고, 여자는 보조적입니다.



흔히 우리는 여자(의 육체)가 약하다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여자의 육체가 약한가요? 분명히 남자 근력보다 여자 근력은 약합니다. 문제는 '기준'입니다. 왜 여자의 육체가 약함이 되어야 하나요? 왜 이게 나쁜 것, 부정적인 것, 보조적인 것이 되어야 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규모 산업 노동이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육체)와 대규모 산업 노동은 어울리지 않고, 그래서 여자는 약한 것, 나쁜 것, 부정적인 것, 보조적인 것입니다. 만약 기준이 바뀐다면, 여자보다 남자는 약한 것, 나쁜 것, 부정적인 것, 보조적인 것이 될 겁니다. 만약 기준이 재생산 과정이 된다면, 남자는 보조적인 것이 될 겁니다.


남자는 아기를 직접 먹이지 못합니다. 모빌 슈트 지옹에게 두 다리가 장식인 것처럼, 남자 젖꼭지는 장식입니다. 남자 젖꼭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남자는 쓸모가 없습니다. 남자는 나쁜 것, 부정적인 것, 보조적인 것입니다. 남자는 오직 정자만 제공합니다. 언더다크 드로우 사회처럼, 여자는 주된 존재이고, 남자는 보조적입니다. 이렇게 '기준'은 남자를 차별합니다. 중요한 것은 차별 그 자체보다 '기준'입니다. 왜 여자가 약한가요? 착취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기준'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준을 바꾸기 원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바꾸고, 성별에 상관없이, 돌봄 노동은 사회화가 되어야 할 겁니다.



["생명은 길을 찾는다." 이런 감동적인 문구처럼, 생태학 SF들은 재생산 과정이 중요하다고 증명합니다.]



이렇게 재생산 과정은 중요합니다. 육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에게 식량 노동이 중요한 것처럼, 육체적인 존재에게 재생산 과정은 중요합니다. 비단 <화성의 왕궁>만 아니라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재생산을 중시합니다. 특히,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재생산을 중시합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세요. 고생물학자는 '생명이 길을 찾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길'은 '재생산 과정'입니다. 재생산 과정 때문에, 자연은 번성합니다. SF 팬들은 비단 <쥬라기 공원>만 아니라 수많은 비슷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유물 이론은 오직 식량 생산만 설명합니다. 역사 유물 이론에는 재생산이 없습니다.


역사 유물 이론에서 재생산 과정은 식량 생산에 종속됩니다. 역사 유물 이론은 재생산 과정과 식량 생산 노동이 동등하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연 과학과 재생산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음에도, 역사 유물 이론에서 재생산 과정은 희미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재생산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어쩌면 유물론으로서 역사 유물 이론은 반쪽짜리인지 모릅니다. 육체적인 존재에게 식량 노동과 재생산 과정이 모두 중요함에도, 수많은 생태학 SF들이 이것을 증명함에도, 역사 유물 이론에서 재생산 과정은 희미합니다. 역사 유물 이론은 충분하지 않은지 모릅니다.



<가부장제 이론>에서 실비아 월비는 생산(재화 생산 노동)과 재생산(섹스, 임신, 양육)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텃밭에서 엄마가 작물들을 키우고, 수확하고, 먹고, 영양분을 보충하고,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인다면,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생산인가요, 아니면 재생산인가요?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런 과정들이 생산이 되고 재생산이 되나요? 텃밭 농사가 오직 생산 분야에만 들어가나요? 텃밭 작물-엄마의 육체-모유-아기 사이에 장벽이 존재하나요? 텃밭 작물은 '가치'입니다. 텃밭 작물이 가치인 것과 달리, 모유와 성장하는 아기가 가치가 되지 못하나요? 왜 성장하는 아기가 가치가 되지 않나요?


텃밭 작물과 달리, 성장 과정 그 자체가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성장 과정이 가치가 되지 않나요? 하지만 육아 노동자가 먹이고 돌보기 때문에, 아기는 성장하고 사회 구성원이 됩니다. 왜 이게 가치가 되지 못하나요? 인간(아기부터 성인까지)이 물리적인 실체임에도, 왜 육아 노동이 가치를 만들지 못하나요? 텃밭 작물처럼, 오직 고정적이고 순간적이고 가시적인 실체만 가치가 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만약 인류 사회가 재화 생산 노동과 재생산 과정을 단순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면, 이건 착취를 없애고 성 차별들을 줄일지 모릅니다. 이건 재생산 착취가 가부장적인 폭력의 전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주장은 너무 환원론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육아 노동 착취는 커다란 억압이 됩니다. 육아 노동 착취가 성 폭력 문화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인류 사회는 착취를 막아야 합니다. 분명히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선구적으로 생태학을 연구했고 생산과 재생산이 모두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유물론 관점에서 재화 생산과 세대 재생산이 모두 인류 문명을 뒷받침한다고 떡하니 썼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소비에트부터 오늘날의 남아메리카 좌파까지,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사회주의 흐름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중요하게 실험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재생산 과정을 2차적으로 간과합니다. 역사 유물 이론이 재생산을 소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르크스 유물론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나, 애석하게도 역사 유물 이론은 충분하지 않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게 올바른 비판인가요? 만약 생태학 SF 평론가가 "역사 유물 이론은 반쪽짜리이다. 역사 유물 이론은 재생산 과정을 포함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이 프티 부르주아 반동이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정말 이런 주장이 좌파 소아병인가요? 이게 프티 부르주아 반동인가요? 생태학 SF 평론가가 (저도 모르게) 자본가 계급의 앞잡이가 되나요? 고생물학자가 '생명이 길을 찾는다'고 감동적으로 선언함에도, 유물론에서 재생산 과정이 희미해져야 하나요? 역사 유물 이론에서 재생산 과정이 식량 노동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이게 성 차별이 아닌가요?



이게 성 차별이기 때문에, 역사 유물 이론이 가부장적인 편견으로 흘러가지 않나요? 좌파 운동권들이 성 차별을 저지를 때, 그들에게 이런 사고 방식(재생산 과정은 식량 노동에게 종속된다)이 있지 않나요? 이런 비판, 이런 물음이 타당한가요, 아니면 그저 개인적인 착각에 불과한가요? 제가 헛소리들을 너무 신나게 지껄여대지 않나요? 생태학 SF 평론가에게 이건 아주 중요한 숙제입니다. 자연 환경이 육체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생태학 SF 평론은 유물론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 블로그 역시 '유물론적인 생태학 SF 평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평론가는 역사 유물 이론을 업그레이드해야 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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