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보여주는 젖과 꿀 본문
※ 이 게시글에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젖과 꿀을 보여줍니다. 이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생명력이 될 수 있을까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여러 주제들이 있습니다. 가장 커다란 주제는 진짜와 가짜일 겁니다. 그건 정체성 문제로 이어지겠죠. "내가 진짜인가? 내가 가짜인가? 어떤 부분이 진짜이고, 어떤 부분이 가짜인가? 내 안에 진짜와 가짜가 공존한다면, 어떻게 내가 가짜를 버릴 수 있는가? 나는 나를 나라고 생각하나, 정말 내가 나인가? 나는 무조건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 않는가? 나는 무조건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지 않는가?" <블레이드 러너 2049>를 관람한 이후, 관객들은 이런 물음들을 밑도 끝도 없이 퍼부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입니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는 수많은 문제들을 일으키죠. 환경 오염 역시 빠지지 못합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는 붕괴되었습니다. 이건 모든 생물 다양성이 망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농장에서 사람들은 애벌레들을 비롯해 생물들을 키우고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연 생태계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자연적인 동물들과 식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아예 나무와 동물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진짜 나무, 진짜 꽃, 진짜 곤충, 진짜 야생 동물은 귀중하고, 그래서 값비싼 상품이 됩니다.
도입부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거대 인공 농장들을 보여줍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우울한 미래 도시와 인조인간들을 이야기하나, 도입부는 미래 도시와 인조인간이 아닙니다. 도입부는 농장들입니다. 그리고 농장들은 자연 생태계와 떨어지지 못합니다. 농장은 가공된 생태계, 인공 생태계입니다. 농민은 의도적으로 이런 생명체를 키우고 저런 생명체를 없앱니다. 특정한 생명체들을 더욱 많이 키우기 위해 농민은 주변 환경을 바꿉니다. 하지만 농민들이 특정한 생명체들을 키운다고 해도, 생물 다양성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많은 농민들과 농업 전문가들은 혼합 농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죠. 그게 치명적인 전염병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단일화 농사 때문에 사람들은 몇몇 종자를 잃었고 심각한 기근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혼합 농사가 완전히 보편적이지 않다고 해도, 혼합 농사와 생물 다양성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게 생물 다양성 따위는 그저 걸리적거리는 방해일 뿐입니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수많은 상품들을 팔아치워야 합니다. 혼합 농사는 대량 생산에 어울리지 않고, 자본주의는 오직 특정한 환금 작물만을 집중적으로 생산하기 원합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은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런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계를 완전히 없앴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그 자연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농사나 양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무너진 도시에 들렸을 때, 케이 형사는 놀라운 광경을 마주칩니다. 케이는 꿀벌을 봅니다. 무너진 도시에 들리기 전까지, 케이는 꿀벌을 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나무와 꽃이 없는 세상에서 꿀벌들이 존재할 수 있겠어요. 케이는 꿀벌을 따라가고 마침내 양봉 현장을 목격합니다.
다양한 벌통들에서 수많은 꿀벌들은 붕붕거리는 중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케이는 그렇게 수많은 꿀벌들을 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케이는 어떤 벌통 입구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꿀벌들은 케이의 손을 뒤덮습니다. 케이는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느낍니다. 케이는 그렇게 다른 동물들을 느낀 적이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이건 새퍼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영화 도입부에서 새퍼 역시 여러 애벌레들을 만지죠. 하지만 그런 애벌레들과 꿀벌들은 다릅니다. 그런 애벌레들은 무너진 자연 생태계를 드러냅니다. 반면, 꿀벌들은 훨씬 풍성한 생명력, 긍정적인 생명력을 상징할 수 있겠죠. 일반적으로 우리는 꿀벌이 긍정적이라고 여깁니다.
꿀벌들이 달콤하고 향기로운 꿀을 생산하기 때문에 우리는 꿀벌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어떤 사람은 꿀벌들이 부지런하기 때문에 꿀벌들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이기 때문에 꿀벌들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꿀벌들이 부지런하고 사회적이라고 해도, 향기로운 꿀을 생산하지 않았다면, 꿀벌들은 긍정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못했을 겁니다. 흰개미들 역시 부지런하고 사회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흰개미들을 싫어하죠. 흰개미들은 그저 목조 건축을 망치는 바퀴벌레 사촌에 불과합니다.
꿀벌들과 흰개미들이 똑같이 부지런한 사회적인 곤충들이라고 해도, 꿀벌은 긍정적이고 흰개미는 부정적입니다. 꿀벌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흰개미가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겠죠. 꿀벌들이 향기로운 꿀을 생산하기 때문에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건 풍요롭고 번성하는 생명력을 가리킬 수 있죠. 물론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자연 생태계가 붕괴했기 때문에 이런 꿀벌들은 개조 생명체들일지 모릅니다. 결국 이것 역시 인공 생태계일지 모릅니다. (저는 이게 인공 생태계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울하고 삭막한 도시보다 개조 꿀벌들은 훨씬 긍정적이겠죠.
하지만 여기에서 이렇게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생명력'이 있다면, 어디에 젖이 있는가? 케이 형사는 꿀벌들을 만났습니다. 꿀벌들은 꿀을 상징할 수 있죠. 어디에 젖이 있을까요? 무너진 폐허에서 하얗고 진한 젖은 없습니다. 젖이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풍부하고 따뜻하고 하얀 젖은 없어요. 케이는 젖을 마시거나 젖을 만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꿀벌을 만나기 전에 케이는 여자 나체 조각상들을 만납니다. 아니, 여자 나체 조각상들은 다양한 벌통들과 함께 있습니다. 게다가 여자 조각상들은 아름답고 둥근 두 젖가슴을 내밉니다. 볼록한 두 젖꼭지 역시 보입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의도적으로 젖가슴과 젖꼭지를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둥근 젖가슴과 볼록한 젖꼭지는 젖을 뿜을 수 있죠. 젖은 아기를 먹일 수 있고, 그래서 젖은 풍성한 생명력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게시글이 <분노의 포도>를 언급한 것처럼, 젖은 생명을 구원합니다. 젖은 치유와 복원, 연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모순적이게도 무너진 폐허에서 케이는 풍성한 생명력(젖과 꿀)을 만납니다. 게다가 젖과 꿀을 만난 이후, 케이는 데커드를 만나고 본격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데커드는 나무, 꽃, 나무 조각상, 개, 임신, 분만 같은 생명력과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젖과 꿀은 그런 생명력과 이어질지 모르죠. 따라서 젖과 꿀은 풍성한 생명력이고 중요한 플롯 전환 수단이죠.
감독이 이걸 의도했을까요? 영화 제작자들이 이걸 의도했을까요? 젖가슴을 내미는 여자 조각상과 벌통들이 그저 우연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나무와 꽃과 임신과 분만처럼, 여자 젖가슴과 꿀벌들이 풍성한 생명력을 상징할 수 있을까요? 이 영화에서 자본주의는 생명력(자연)을 없앴습니다. 하지만 여자 젖가슴과 꿀벌들은 생명력이죠. 여자 젖가슴과 꿀벌들이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에 저항하는 상징일까요? 정답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번성하는 생명력(젖과 꿀)과 삭막한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비교할 수 있죠. 이런 해석 역시 틀리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