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붉은 내용이 녹색 형식이 되지 못하는가 본문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
어떤 사람들은 위 문장이 인지 부조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위 문장이 색깔(붉은색)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위 문장을 읽을 때, 사람들은 붉은색을 인지합니다. 문제는 글자 색깔이 녹색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문장 내용이 붉다고 인지하나, 문장 형식은 녹색입니다. 내용과 형식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지 부조화를 느낄지 모릅니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문제가 되거나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소설책들은 검은 글씨들을 이용합니다. 검은 글씨들이 다채로운 색깔들을 묘사한다고 해도, 독자는 검은 글씨(형식)로 다채로운 색깔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목처럼, 소설 <우주에서 온 색채>는 색채를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이 색체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소설은 검은 글자들을 늘어놓습니다. 독자는 검은 글자들을 읽어야 합니다.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슬레이크 나방은 날개 무늬를 현란하게 퍼뜨립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 날개 무늬는 아름다우나, 슬레이크 나방의 날개 무늬는 현란하고 어지럽습니다. 독자는 현란하고 어지러운 색깔을 검은 글씨들을 이용해 읽습니다. 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례들처럼,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위 문장은 오직 색깔만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위 문장은 자신이 붉은색이라고 주장합니다. 소설 <우주에서 온 색채> 및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과 달리, 위 문장은 묘사보다 주장입니다. 위 문장이 녹색보다 붉은색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건 문제가 됩니다. 주제와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건 문제가 됩니다. 물론 많은 글들에서 내용과 형식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아, 씨발, 대지불이여."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이렇게 고요 대륙 사람들은 욕합니다. 하지만 고요 대륙은 지구가 아닙니다. 고요 대륙은 남한이 아닙니다. 고요 대륙 사람들은 '씨발'이라는 욕설을 알지 못할 겁니다.
고요 대륙 사람들이 욕설들을 내뱉을 때, '씨발'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노라 제미신 역시 씨발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할 겁니다. 노라 제미신은 21세기 미국 작가이고, 그래서 노라 제미신은 21세기 미국 영어로 소설을 썼습니다. 고요 대륙 사람들에 다른 언어가 있다고 해도, 노라 제미신은 21세기 미국 영어를 썼어야 했습니다. 노라 제미신과 독자들은 불신(不信)을 멈추고 고요 대륙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라 제미신과 독자들이 불신을 멈춘다고 해도, 결국 노라 제미신과 독자들은 21세기 미국 영어를 쓰고 읽어야 합니다. 국내 출판사는 이것을 21세기 남한 표준말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요 대륙 사람들이 남한 표준말을 알지 못함에도, 고요 대륙 사람들은 "아, 씨발, 대지불이여."라고 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형식과 내용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노라 제미신은 소설 작가보다 번역가입니다. 노라 제미신은 고요 대륙 언어를 '번역'해야 했습니다. 노라 제미신이 '번역'했기 때문에, 여기에는 빈틈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모든 번역은 빈틈인지 모릅니다. 21세기 남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와, 호랑이 털가죽은 상당히 누리끼리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언어가 '누리끼리하다'를 말할 수 있나요? 과테말라 언어는? 스와힐리 언어는?
북방 이누이트가 누리끼리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만약 이누이트 언어에 '누리끼리하다'가 없다면, 번역자가 한국어를 이누이트 언어로 번역할 때, 이건 빈틈이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한국어와 이누이트 언어를 대조하고 빈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남한 독자가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읽을 때, 독자는 대조하지 못합니다. 고요 대륙 언어는 가상의 언어입니다. 현실에는 고요 대륙 언어가 없습니다. 노라 제미신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고요 대륙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고요 대륙 언어와 영어와 한국어를 대조하지 못합니다. 번역에 빈틈이 있다고 해도, 독자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다섯 번째 계절>에 빈틈이 있음에도, 독자들은 재미있게 <다섯 번째 계절>을 읽습니다. 독자들은 "아, 씨발, 대지불이여."에 빈틈이 있다고 상관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재미있게 <다섯 번째 계절>을 읽을 수 있다면, 왜 독자들이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가 문제라고 생각해야 하나요? 글자 색깔이 녹색이라고 해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이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문장은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이 문장은 네모난 바퀴와 비슷한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바퀴는 둥그렇습니다. 이른바 바퀴 거미(Carparachne aureoflava)는 몸을 둥글게 말고 사막 언덕에서 구를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에는 바퀴가 없는지 모르나, 바퀴 거미는 몸을 둥글게 말고 구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퀴가 둥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네모난 바퀴는 모순입니다. 네모난 바퀴는 쉽게 굴러가지 않습니다. 이건 여러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아이고, 내 인생은 네모난 바퀴야." 이런 푸념은 인생이 엉망이고 모순이라고 비유합니다. 네모난 바퀴가 일반적인 인식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런 비유는 강렬합니다. "아이고,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야."보다 "아이고, 내 인생은 네모난 바퀴야."는 모순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그저 엉망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인생에는 아주 커다란 부조리가 있고, 엉망진창은 이런 부조리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네모난 바퀴 비유는 중요합니다. 네모난 바퀴가 일반적인 인식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부정합니다. 독자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독자는 (문자 그대로) 문장이 붉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생각을 부정합니다. 사실 문장이 녹색이기 때문입니다. '네모난'과 '바퀴'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문장 내용(붉은색)과 문장 형식(녹색)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내용과 형식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떤 사람들은 당장 글자 색깔을 붉은색으로 바꾸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산문 세계에는 이것보다 훨씬 커다란 모순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숱한 SF 소설들은 모순인지 모릅니다. 숱한 SF 소설들은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런 SF 소설들은 과거 시제를 동원합니다. 2019년 독자가 소설 <2312>를 읽는 동안, 2019년 독자에게 2312년은 미래 사건입니다. 하지만 소설 <2312>는 과거 시제를 이용해 2312년 미래 소행성 테라포밍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미래 소행성 생태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하드 SF 소설 <2312>는 과거 시제를 동원합니다. 왜 2019년 독자에게 2312년 사건이 과거 시제가 되어야 하나요? 이건 모순입니다. 네모난 바퀴보다 이건 훨씬 심각한 모순입니다. 서두에서 소설 <2312>가 현재 시제를 동원한다고 해도, 이건 모순입니다.
하지만 하드 SF 소설이 과거 시제를 동원한다고 해도, 독자는 하드 SF 소설을 탓하지 않을 겁니다. 2019년 독자는 미래 2312년 소행성 테라포밍 생태계가 과거 사건이라고 받아들일 겁니다.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은 이야기가 과거 사건이라고 간주합니다. SF 소설이 미래를 말한다고 해도, SF 소설 역시 이야기(story)이고, 다른 이야기들처럼, SF 소설은 과거를 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형식(과거 시제)과 내용(2312년 소행성 생태계)이 어긋난다고 해도, 독자는 이런 불일치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독자가 불일치를 넘어갈 수 있다면, 독자는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를 넘어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 문장이 인지 부조화를 일으킨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독자들이 숱한 모순들을 넘어갈 수 있다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아직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를 받아들이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이 거짓인가요?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가 녹색이라면, 이게 참인가요, 아니면 거짓인가요? 독자들이 이 문장이 거짓이라고 판단해야 하나요? 아니면 이 문장 그 자체가 명제가 아닌가요? 이 문장이 명제가 아니라면, 이 문장은 참과 거짓 판단에서 독립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이 문장이 인지 부조화를 일으킨다고 느낀다고 해도, 이 문장이 거짓이 되나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게 거짓인가요?
"당신의 마음 속에는 장벽이 있어!" 소설 <빼앗긴 자들>은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어떻게 마음 속에 장벽이 있을 수 있나요? 이게 심장 판막을 가리키나요? 심장에는 여러 방들이 있습니다. 혈액은 방들을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방들에게는 판막들이 있습니다. 판막들은 문짝을 열고 피를 보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장벽이 있어!"가 이런 심장 판막들을 가리키나요? 이렇게 소설 주인공 사회주의자가 외쳤을 때, 소설 주인공이 심장 판막들을 가리키기 원했을까요? 아니, 소설 <빼앗긴 자들>은 우주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우주 시대 사람들에게는 심장 판막들이 없을지 모릅니다.
<빼앗긴 자들>은 우주 시대 사람들에게 심장 판막들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우주 시대 사람들에게 심장 판막들이 있다고 상정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 뭔가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소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 시대 사람들에게 심장 판막들이 있다고 해도, 소설 주인공은 심장 판막을 마음 속의 장벽이라고 가리키지 않았을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거짓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오직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고,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헐뜯고 무시하고 차별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마음 속의 장벽을 쌓습니다. 소설 주인공 사회주의자는 살인, 비난, 무시, 차별을 마음 속의 장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간 마음 속에 장벽이 없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소설 주인공이 거짓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를 찬양하기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거짓말들을 씨부렁거리나, 보수 우파 사기꾼들과 달리, 소설 주인공 사회주의자는 진실을 말합니다. '마음 속의 장벽'이라는 표현은 진실입니다. 소설 주인공 사회주의자가 마음 속의 장벽을 말했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이게 비유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랭스턴 휴즈가 쓴 <엄마가 아들에게>에서 화자 엄마는 말합니다. "내 인생은 수정 계단이 아니야. 계단에는 못들과 압정들이 있고, 판자는 뜯어졌어." 추레한 계단, 못들과 압정들, 뜯어진 판자는 얼마나 흑인 여자들이 차별에 시달리는지 보여줍니다. 인생과 계단은 다릅니다. 하지만 인생이 계단이 아니라고 해도, 흑인 엄마는 인생을 계단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걸음을 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흑인 엄마는 인생 속의 힘겨운 차별을 망가진 계단에 연결했을 겁니다. 흑인 엄마는 자신이 가난했다고 직접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가난을 제대로 가리키지 못합니다.
가난은 비참합니다. 가난은 너무 비참합니다. 가난은 너무, 너무 비참합니다. 안치환은 꽃보다 인간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나, 가난은 아름다운 인간을 망칩니다. 아무리 인간이 아름답다고 해도, 가난은 인간을 망칩니다. 아무리 사상이 정교하다고 해도, 아무리 공동체가 평화롭다고 해도, 가난은 인간을 망치고, 사상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짓밟습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자유고 나발이고 뭐고 없습니다. 생명 현상에게 신진 대사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인간 역시 생명 현상입니다. 인간에게도 신진 대사가 있습니다. 인간은 먹어야 합니다. 원초적으로 인간은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인간은 먹지 못합니다.
가난한 인간은 원초적인 것, 신진 대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가난한 인간은 가장 원초적인 것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굶주리고 비참한 몰골들을 드러낼 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장면을 절대 참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어합니다. (생명 현상에게 신진 대사가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에, 생태계가 영양분 교환 과정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마음가짐은 진정한 생태학 덕질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이렇게 가난이 너무, 너무 비참하기 때문에, 흑인 엄마는 가난을 직접 표현하지 않았을 겁니다. 가난이 너무 비참하기 때문에, 흑인 엄마는 망가진 계단을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흑인 엄마(를 이야기하는 랭스턴 휴즈)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상에서 우리는 '인생은 가시밭길'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인생은 길이 아니나, 사람들은 '인생의 길'을 묻습니다.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나그네가 됩니다. 흑인 엄마는 계단을 말했으나, 한편으로 흑인 엄마는 나그네, 방랑자입니다. 흑인 엄마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합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소설 주인공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 장벽들이 있기 때문에, 흑인 엄마는 장벽들에 아프게 부딪혀야 합니다. 사회주의자가 마음 속의 장벽을 지적할 때, 흑인 엄마가 추레하고 망가진 계단을 언급할 때, 독자들은 사회주의자와 흑인 엄마가 거짓말했다고 판단하지 않을 겁니다.
사회주의자와 흑인 엄마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독자들은 차별과 장벽, 가난과 망가진 계단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고 두 가지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상황들에서 우리 인간은 유사성을 연결하고 싶어합니다. 사회주의자와 흑인 엄마는 특별한 사례가 아닙니다. "오늘 나는 그 언니에게 고백할 거야. 아이 참, 심장아, 제발 멈춰다오." 안 됩니다. 심장이 멈춘다면, 인간은 사망할 겁니다. 화자 역시 이 사실을 알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화자는 심장이 멈춰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화자는 문자 그대로 심장이 멈추기 바라지 않습니다. 화자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원했습니다. 이건 일종의 자기 최면, 자기 유도입니다.
"심장아, 멈춰다오." 같은 표현처럼, 많은 상황들에서 우리 인간은 뭔가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명제가 아니라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글자 색깔이 녹색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글자 색깔과 문장 내용(붉은색)을 연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녹색과 붉은색이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유사성을 찾지 못하고 인지 부조화를 느낄지 모릅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는 풍요로운 삼림과 사회주의 혁명을 연결합니다. 이런 연결은 진짜 녹색이 빨간색이라고 주장하나,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에서 독자는 녹색과 붉은색을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독자는 형식과 내용이 어긋난다고 느끼고 이 문장이 어색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독자가 "심장아, 멈춰다오."를 읽을 때, 독자가 오직 형식만 중시한다면, 독자는 문구를 오해할지 모릅니다. 독자가 뭔가를 읽을 때, 독자는 형식과 내용을 함께 파악할 겁니다. 이렇게 독자는 여러 방법들로 형식과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포장지와 알맹이 중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알맹이입니다. 신동엽이 "껍데기는 가라."고 명령한 것처럼, 형식보다 알맹이는 훨씬 중요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형식은 들러리가 아닙니다.
※ 이 문장은 붉은색이다. (자, 이제 어떤 사람들은 좀 더 만족스럽다고 느낄 겁니다. 솔직히 저 역시 붉은색이 좋습니다. 붉은색은 붉은색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