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바이오스: 메가파우나>와 장대한 생물권 진화 본문
지구 생물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지구 생물권 없이, 우리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생태학 서적들이 경고하는 것처럼, 만약 꿀벌들이 멸종한다면, 이건 꽃들에게 너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모르고, 식물들이 제대로 수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농사 역시 흉작이 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다른 곤충들이 꿀벌들을 대신한다고 해도, 꿀벌 없는 지구 생물권은 처참할지 모릅니다. 생태계 테라포밍 게임 <테라 닐>에서 꿀벌들이 새로운 생물 군계를 조성하는 것처럼, 살기 위해 우리는 지구 생물권에게 의지합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지구 생물권은 번쩍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행성 역사는 45억 년을 넘어갑니다. 지구 생물권 역사는 38억 년을 넘어갑니다. 캄브리아기 폭발은 5억 년 이전 사건입니다. 6천 5백만 년 전에, (비조류) 공룡들은 멸종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인류는 살아있는 바실로사우루스와 검치 호랑이를 관찰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지구 생물권은 번쩍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지구 생물권은 아주 아주 오랜 역사를 거쳤습니다. 이건 아주 장대한 흐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주류 문학은 장대한 흐름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소설 독자들이 주류 문학들을 읽을 때, 그들은 장대한 흐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백수린 작가는 <시간의 궤적>을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주류 문학에 속합니다. 소설 독자들이 <시간의 궤적>을 읽는 동안, 그들은 장대한 흐름, 지질학적인 연대기를 기대하지 않을 겁니다. 비록 이 단편 소설이 엄청나게 기나긴 역사와 아득하고 지질학적인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 독자들은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독자들이 장대한 흐름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시간의 궤적>이 이것을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 독자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만약 <시간의 궤적>이 장대한 흐름을 묘사한다면, 소설 독자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릴 겁니다.
소설 독자들은 주류 문학이 아주 장대한 흐름을 묘사한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만약 주류 문학이 이것을 묘사한다면, 기대가 어긋나기 때문에, 소설 독자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릴 겁니다. <시간의 궤적>에서 '시간'은 38억 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시간'은 몇 십 년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비단 <시간의 궤적>만 아니라 다른 주류 문학들 역시 장대한 흐름과 지질학적인 연대기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류 문학이 지구 생물권 역사를 묘사한다고 해도, 이 묘사는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주류 문학들에서 장대한 흐름은 주된 소재가 되지 않습니다.
왜 주류 문학이 아주 장대한 흐름을 묘사하지 않나요? 왜 주류 문학에서 이게 주된 소재가 되지 않나요? 주류 문학이 일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주류 문학 소재는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주류 문학은 이것을 묘사하기 원합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검치 호랑이가 길다란 송곳니를 키웠는지 논의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월급, 연애, 학업, 가족, 기타 등등을 떠듭니다. 검치 호랑이는 기타 등등에 속하지 않습니다. 캄브리아기 생물 다양성은 일상 이야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가 쥐라기 야수이든, 백악기 야수이든, 일상에서 이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스테고사우루스는 트라이아이스기 야생 동물이 아니야!" 일상에서 사람들은 골판 공룡을 두고 싸우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월급, 연애, 학업, 가족, 기타 등등을 두고 싸웁니다. 스테고사우루스에게 빗금무늬 골판이 있든, 민무늬 골판이 있든, 일상에서 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일상에서 어떤 사람이 빗금무늬 골판을 집요하게 따진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이 괴상하다고 느낄 겁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고생물학자나 고생물학 덕후인지 모릅니다.
고생물학 덕후에게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은 일상적인 화제일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고생물학 덕후는 골판 화석을 중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개인적인 덕질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일상에서 고생물학 덕후가 다른 사람들과 사회 관계들을 맺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스테고사우루스에게 빗금무늬 골판이 있는지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고생물학 덕후 역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고생물학자에게 스피노사우루스 물갈퀴는 일상적인 문제일 수 있으나, 다른 많고 많은 사람들은 이 공룡이 완전 수생인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스피노사우루스 물갈퀴보다 월급, 연애, 학업, 가족, 기타 등등 때문에, 일상에서 많고 많은 사람들은 다투고, 떠들고, 웃고, 웁니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갑니다. 생태계 테라포밍 게임에서 꿀벌들이 새로운 생물 군계를 조성하는 것처럼, 지구 생물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지구 생물권은 장대한 흐름을 거쳤으나, 일상에서 우리가 지구 생물권 역사보다 다른 (사소한) 것들을 중시하기 때문에, 주류 문학은 장대한 흐름보다 다른 (사소한) 것들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만약 주류 문학에서 스피노사우루스 물갈퀴가 주된 소재가 된다면, 소설 독자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릴지 모릅니다.
이건 주류 문학이 스피노사우루스 물갈퀴를 묘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백수린 작가가 주류 문학 작가라고 해도, 백수린 작가는 단편 소설을 쓰고 스테고사우루스에게 빗금무늬 골판이 있었는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주류 문학은 골판 공룡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백수린 작가가 골판 공룡 생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소설 독자들은 주류 문학 작가가 골판 공룡 생태보다 일상적인 소재들을 이야기한다고 기대합니다. 이건 주류 문학 전형입니다. 전형은 예외를 허용할 수 있으나, 이 예외들은 다수가 되지 않습니다.
예외들이 다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독자들은 백수린 작가가 쥐라기 먹이 그물망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반면, 만약 SF 작가가 단편 소설을 쓴다면, 지구 생물권 역사처럼, 이 단편 소설에서 장대한 흐름은 주된 소재가 될 수 있고, 소설 독자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리지 않을 겁니다. 만약 노라 제미신이 장대한 생물권 변화를 쓴다면, 소설 독자들은 이게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만약 로버트 소여가 쥐라기 먹이 그물망을 쓴다면, 소설 독자들은 이게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SF 문학에서 장대한 흐름은 주된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독자들이 사이언스 픽션들을 읽는 동안, 그들은 장대한 흐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노라 제미신은 어떻게 행성 생물권이 기나긴 흐름을 거치는지 썼습니다. (심지어 개조 생명체조차 기나긴 흐름을 거치고 크게 바뀝니다.) 로버트 소여는 시간 여행과 공룡 멸종을 썼습니다. 프랭크 허버트는 사막 행성 생태계와 진화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사막 행성 생태계는 다른 SF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생명 진화 역사가 아주 놀라운 결과로 이어진다고 썼습니다. 비록 여러 행성들이 멀리 떨어졌다고 해도, 이 결과는 아주 놀랍습니다.
비단 노라 제미신과 로버트 소여와 프랭크 허버트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만 아니라 다른 SF 작가들 역시 장대한 흐름을 묘사합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회화,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체와 상관없이, 사이언스 픽션에서 장대한 흐름은 주된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생물권 진화 그 자체가 SF 설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고생물학자가 양치류 진화 과정을 쓴다면, 이 논문이 SF 소설이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고생물학 논문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스피노사우루스 물갈퀴 그 자체는 SF 설정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사우루스 물갈퀴는 SF 설정으로 쉽게 이어집니다. 기나긴 생명 역사, 장대한 생물권 연대기는 SF 설정으로 쉽게 이어집니다. 노라 제미신과 로버트 소여와 프랭크 허버트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처럼, SF 작가들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독자들이 사이언스 픽션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기나긴 생명 역사, 장대한 생물권 연대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왜 장대한 연대기가 SF 설정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나요?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 격차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2154년 미래 도시에서 인공 지능이 비행 택시를 조종한다면, 이건 SF 설정일 겁니다.
미래 도시, 인공 지능, 비행 택시는 SF 설정입니다. 왜 이것들이 SF 설정인가요? 현실에서 이것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 2154년은 오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인공 지능은 자동차를 능숙하게 운전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택시는 날아다니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인공 지능이 비행 자동차를 운전한다고 해도, 아직 이건 실험적입니다. 현실에서 미래 도시, 인공 지능, 비행 택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 도시, 인공 지능, 비행 택시는 비(非)현실 설정입니다. 현실에서 미래 인공 지능이 비행 택시를 운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시대 격차를 유발합니다.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인공 지능은 비행 택시를 운전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달리, 미래 도시에서 인공 지능이 비행 택시를 운전하기 때문에, 현실과 미래는 다릅니다. 현실과 미래가 다르기 때문에, 이건 시대 격차를 유발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현실 설정을 묘사하고 시대 격차를 연출합니다. 시대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시대는 바뀝니다. 시대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고정 관념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뭔가가 상식이라고 믿으나, 이건 고정 관념인지 모릅니다. "자동차는 하늘을 날지 못한다." 이건 상식입니다. 하지만 2154년 미래 도시에서 이게 상식인가요?
"자동차는 하늘을 날지 못한다." 현실에서 자동차가 날지 못하기 때문에, 이 문구는 상식입니다. 하지만 2154년 미래 도시에서 이건 상식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고정 관념에 불과합니다. 만약 2154년 미래 도시에서 어떤 사람이 자동차가 하늘을 날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리석다고 비웃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 것처럼, 상식은 상식이 아닐지 모릅니다. 시대 격차가 나타날 때, 상식은 그저 고정 관념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 격차를 연출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인식을 크게 확장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비행 자동차는 상식이 아닙니다. "택시는 공중으로 떠오르고 마천루 위를 넘어간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이 문구는 상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2154년 미래 사회에서 이 문구는 상식일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하늘을 날지 못해! 어떻게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어?" 21세기 초반 오늘날, 이 물음은 상식입니다. 하지만 2154년 미래 사회에서 이 물음은 상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상식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묘사합니다. 이건 오직 사이언스 픽션만 상식이 바뀐다고 묘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난한 흑인 여자는 투표할 수 있어!" 이건 상식입니다.
가난한 흑인 여자는 투표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이건 상식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서구 사회에서 이건 상식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노라 제미신이 시간 여행 장치를 타고, 18세기 서구로 돌아가고, 백인 남자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한다면, 백인 남자들이 가난한 흑인 여자가 투표할 수 있다고 인정할까요? 아니, 18세기 백인 남자들은 노라 제미신이 미친 깜둥이 계집년이라고 무시할 겁니다. 18세기 서구 백인 남자들이 노라 제미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상식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SF 소설 없이, 우리는 상식이 고정 관념이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상식은 편견인지 모릅니다.
18세기 서구 사회와 21세기 초반 사회에서 상식이 상식이 아닌 것처럼, SF 소설 없이, 우리는 18세기 서구 사회와 21세기 초반 사회를 대조하고 상식이 그저 고정 관념에 불과한지 모른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사회에서 21세기 초반 사회로 시대가 흐르는 동안, 상식이 고정 관념이 되고 미친 헛소리가 상식이 되는 것처럼, 상식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비단 흑인 여자 투표 권리만 아니라 많고 많은 상식들은 고정 관념들이 되었고, 많고 많은 미친 헛소리들은 상식들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상식이 고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 사회에서도 상식은 고정적이지 않을 겁니다.
미래 사회에서 상식이 바뀌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어떻게 상식이 바뀔지 예언하지 않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상식이 바뀐다고 강조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자유 시장 경제는 상식입니다. 18세기 서구 사회에서 귀족 제도가 상식이었던 것처럼, 21세기 초반 사회에서 자유 시장 경제는 상식입니다. 반면, 공산주의는 미친 헛소리입니다. 18세기 서구 사회에서 흑인 여자 투표가 미친 헛소리였던 것처럼, 21세기 초반 사회에서 공산주의는 미친 헛소리입니다. 하지만 상식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미래 사회에서 미친 헛소리는 상식일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고정 관념을 타파하기 때문에, SF 팬들은 열린 사고 방식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매력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단 인공 지능과 비행 택시만 아니라 훨씬 웅장한 비현실 설정들을 묘사합니다. 만약 궤도 엘리베이터와 행성 궤도 정거장이 이어진다면? 만약 외계 행성에서 개척자들이 개척 기지를 건설한다면? 만약 태양계에서 장거리 우주선이 벗어나고 다른 항성계로 항해한다면? 만약 장거리 우주선이 폐쇄 생태계 구역을 장착한다면? 만약 장거리 우주선이 거대한 나무, 개조 생명체라면? 만약 고리 건축물이 항성을 둘러싼다면?
만약 초거대 고리 건축물이 항성을 둘러싼다면, 이건 엄청난 시대 격차를 유발할 겁니다. 아직 과학자들은 화성에서 개척자들이 개척 도시를 성공적으로 건설할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우주 개척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화성 개척 도시는 자급자족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화성 개척자들이 웅장한 바이오 돔을 건설한다고 해도, 이 바이오 돔은 자급자족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화성 바이오 돔은 지구 생물권에게 의지할지 모릅니다. 화성 바이오 돔이 쉽지 않기 때문에, 초거대 고리 건축물은 너무 엄청난 시대 격차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시대 격차는 주된 감성입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비현실 설정을 예측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래 공학 기술이 궤도 엘리베이터와 궤도 정거장을 연결할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은 예측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예측하지 못합니다. 시대 격차를 강조하고 고정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그저 궤도 엘리베이터를 동원할 뿐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궤도 엘리베이터와 궤도 정거장이 이어진다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궤도 엘리베이터는 고정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노선, 매개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예언한다고 오해하나, 사이언스 픽션은 예언서가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궤도 엘리베이터를 비롯해) 비현실 설정들은 고정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매개체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태양계에서 장거리 우주선이 벗어나거나, 장거리 우주선이 폐쇄 생태계 구역을 장착하거나, 초거대 고리 건축물이 항성을 둘러싼다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저지르기 때문에, 해수면은 상승하고 해안 도시를 덮칠지 모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기후 위기 범죄자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해수면이 해안 도시를 덮친다고 묘사할 수 있으나,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미래 해수면 상승을 예측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미래 지구에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해안 도시를 덮친다고 썼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게 올바른 예측이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이 지적을 인정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예언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단 킴 스탠리 로빈슨만 아니라 여러 하드 SF 작가들과 사이언스 판타지 작가들은 SF 소설이 예언서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SF 소설이 예언서가 아니라면, 왜 SF 작가들이 이 장르를 쓰나요? SF 장르가 시대 격차를 연출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이 목가적이라고 생각하나, 자연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자연 환경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해수면 상승을 묘사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저지르기 때문에, 오직 돈벌이만 위해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구 생물권을 파괴하기 때문에, 미래 자연 환경은 크게 바뀔 겁니다. 미래 자연 환경은 너무 암울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어떻게 미래 자연 환경이 바뀔지 예측하지 못하나,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환경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현실에서 우리는 만년설 봉우리가 상식이라고 간주합니다. 몇 백 년 이후, 만년설 봉우리는 상식이 아닐지 모릅니다.
몇 백 년 이후, 만년설 봉우리가 상식이 되지 않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시대 격차를 강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 격차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기나긴 역사, 장대한 흐름으로 쉽게 이어집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장대한 흐름으로 쉽게 이어지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에서 장대한 흐름은 주된 소재가 됩니다. 지구 생물권 역사가 장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에서 지구 생물권 역사는 주된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지구 생물권 역사가 주된 소재이기 때문에, <바이오스: 메가파우나>와 사이언스 픽션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보드 게임 <바이오스: 메가파우나>는 장대한 지구 생물권 역사를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대륙을 움직이거나, 행성 온도를 높이거나, 행성 수분을 조절하거나, 새로운 동물상을 키웁니다. 새로운 동물상은 대체 진화 역사입니다. 대체 진화 역사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궤도 정거장처럼, 새로운 동물상은 '비현실 설정+시대 격차'입니다. 그래서 이 보드 게임이 SF 장르에 속할 수 있나요? 어떤 SF 팬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어떤 SF 팬들은 고개들을 저을 겁니다. <바이오스: 메가파우나>는 SF 장르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습니다. 장르 분류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SF 팬들은 천문학 다큐멘터리를 흥미롭게 시청합니다. 천문학 다큐멘터리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나, 천문학 다큐멘터리와 장거리 우주 항해가 교집합을 형성하기 때문에, SF 팬들은 천문학 다큐멘터리를 흥미롭게 시청합니다. 만약 하드 SF 작가가 장거리 우주 항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원한다면, 하드 SF 작가는 천문학 지식들에게 기반할 겁니다. 천문학 다큐멘터리와 장거리 우주 항해가 교집합을 형성하는 것처럼, 비록 <바이오스: 메가파우나>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이 보드 게임과 사이언스 픽션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 게임 <바이오스: 메가파우나> 사진 출처: 김하윤,
www.youtube.com/watch?v=y4SjbdhS_YA
※ 게임 <Per Aspera> 스크린샷 출처: Tlön Industries,
store.steampowered.com/app/803050/Per_Aspera/
※ 게임 <다이슨 스피어 프로그램> 스크린샷 출처: Youthcat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