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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미친 아담>과 <비욘드 어스>, 새로운 자연과 사회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미친 아담>과 <비욘드 어스>, 새로운 자연과 사회

OneTiger 2019. 12. 22. 20:21

[새로운 자연 환경, 새로운 생명체들 속에서 개척 세력은 새로운 공유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은 환경 아포칼립스에 부딪힙니다. 더 이상 지구에는 미래, 전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류 문명은 비단 환경 아포칼립스만 아니라 대대적인 빈부 격차에 부딪힙니다. 자연과 문명은 하나이고, 환경 아포칼립스 속에서 사람들은 굶주리고, 병들고, 폭행에 시달려야 합니다. 오염과 빈곤 속에서 자연과 인생 모두 폐허가 됩니다. 결국 인류 문명은 대격변을 만납니다. 대격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대안, 전망을 봅니다. 그들은 새로운 자연 속에서 새로운 문명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자연은 위협적입니다. 새로운 자연은 사람들을 해치거나 위기에 몰아넣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연 환경이 새로워지는 덕분에, 새로운 자연 속에서 새로운 문명은 출발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자연 속에서 새로운 문명은 위협적인 자연과 갈등하나, 새로운 문명과 과거 문명은 다릅니다. 더 이상 새로운 문명은 어리석은 과오를 답습하지 않습니다. 과거 문명은 자연 환경을 파괴했으나, 새로운 문명은 자연 환경과 어느 정도 공존하기 원합니다. 심지어 새로운 문명은 유전 형질을 바꿉니다. 만약 사람들이 유전 형질을 바꾼다면, 사람들은 자연 환경에 훨씬 깊게 동화할지 모릅니다. 자연과 문명은 정말 소통할지 모릅니다. 미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새로운 문명은 시도해야 합니다.



위 문단은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 줄거리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개척 세력들은 또 다른 지구를 찾기 원합니다. 더 이상 그들은 지구에 희망과 미래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게임 설정은 왜 지구에서 개척 세력들이 떠나기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게임 설정은 엄청난 과오 때문에 자연 환경이 크게 오염되고 인류 문명이 심각한 장벽에 부딪힌다고 암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엄청난 과오가 무엇인지 다양하게 해석할 겁니다. 하지만 게임 설정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가장 심각한 위협, 가장 세계적인 위협은 기후 변화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인류 문명이 자연 환경에 적응하고 자연 환경과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세 가지 친화도들 중에서 조화 친화도는 환경 보호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합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알파 센타우리>,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와 비슷한 계열이고, <알파 센타우리>,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에서도 환경 보호 세력이 있습니다. <알파 센타우리>에서 환경 보호 세력 대표 디드리 스카이는 거의 게임 주인공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도 엄청난 과오는 환경 아포칼립스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는 지구 환경을 망쳤을 겁니다.



비단 기후 변화만 아니라 극심한 빈부 격차와 경제 공황 역시 엄청난 과오에 속하는지 모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몇몇 세력, 특히, 아프리카 인민 연합은 식민지 수탈을 가리킵니다. 현실 속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를 끔찍하게 수탈하기 때문에, <문명: 비욘드 어스>는 이것을 반영했는지 모릅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를 수탈했기 때문에, 서구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기반하기 때문에, 외계 개척 행성에서 아프리카 인민 연합이 새로운 문명이 된다고 해도, 아프리카 인민 연합은 자본주의를 답습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카비탄 보호령, 알 팔라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아프리카 인민 연합이 이른바 제3세계인 것처럼, 카비탄 보호령은 제3세계 인도에 기반합니다. 아프리카처럼, 인도 역시 서구 제국주의를 겪었고, 그래서 카비탄 보호령은 자본주의를 답습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대표자 카비타 타쿠르는 영리 기업 경영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알 팔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알 팔라는 아라비아 전통 사상에 기반하고, 대표자 아쉬아 키쉭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속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연합, 카비탄 보호령, 알 팔라는 시장 경제보다 공유 사회를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문명: 비욘드 어스>가 경제 현상을 구체적으로 구현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시장 경제 세력들이 있고, 게임 플레이어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다시 반복할 수 있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다양한 결말들을 제시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결말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카비탄 보호령 역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답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연합, 카비탄 보호령, 알 팔라 배경 설정들은 시장 경제를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세력 설정들은 난민들, 빈곤들, 수탈들, 공유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가 아프리카 인민 연합, 카비탄 보호령, 알 팔라와 공유 사회를 연결한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닐 겁니다.


만약 이런 개척 세력들이 조화 친화도를 선택한다면, 그들은 자연 환경과 동화하기 원할 겁니다. 자연 환경과 동화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척 세력들이 조화 친화도를 선택한다고 해도, 외계 행성에는 토착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외계 야수들은 개척 세력들을 계속 공격합니다. 생물종 갈등을 완전히 막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조화 친화도는 외계 야수들을 길들이거나 외계 야수들을 합성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조화 친화도는 떡대 괴수를 키웁니다. 조화 친화도는 인간 유전 형질을 바꾸고, 비록 새로운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고 해도, 새로운 자연에서 새로운 인간들은 살아갑니다.



이렇게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기후 변화, 빈부 격차,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은 핵심 소재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다른 여러 설정들이 있으나, 기후 변화, 빈부 격차,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은 핵심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알파 센타우리>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가 이런 설정들을 중시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알파 센타우리>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와 <문명: 비욘드 어스>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문단은 <문명: 비욘드 어스> 줄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첫째 문단은 비단 <비욘드 어스>만 아니라 소설 <미친 아담> 줄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미친 아담>은 <오릭스와 크레이크 (인간 종말 리포트)>, <홍수의 해 (홍수)> 속편입니다.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1편이고, <홍수의 해>는 2편이고, <미친 아담>은 3편입니다. 이 소설들은 3부작입니다. 3부작 소설들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환경 아포칼립스를 보여줍니다. 세계적인 환경 오염과 빈부 격차는 지옥이 되고, 인류 사회는 무법 천지가 됩니다. 3부작 소설들 속에서 유전 공학은 엄청나게 발달하고, 과학 기술들은 여러 새로운 동물들을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시장 경제에 저항하기 원하나, 영리 기업들은 독점 권력입니다. 독점 권력에게 저항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의 정원사들은 세력을 꾸준하게 확장합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종교 집단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종교 집단과 달리, 그들은 생태주의 종교 집단입니다. 그들에게 재활용, 생물 다양성, 자연 환경 보호, 채식은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신의 정원사들은 피난민들을 받아주고, 피난민들은 신의 정원사들에게 몰리고, 권력자들은 신의 정원사들이 눈엣가시라고 여깁니다. 권력자들은 폭동을 부추기고 신의 정원사들을 없애기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훨씬 커다란 문제는 '홍수의 해'입니다. '홍수의 해'은 대격변이고, 인류 문명은 완전히 바뀝니다. 신의 정원사들 역시 대격변에 부딪힙니다.


대격변은 자연과 문명을 바꿉니다. 첨단 과학 기술들은 여러 개조 동물들을 만들었으나, 개조 동물들은 야생으로 뛰쳐나갑니다. 이제 사방에서 개조 동물들은 득실거립니다. 도시에서 최고 포식자는 사람을 잡아먹을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이 멸망했기 때문에, 식물들은 도시를 뒤덮고, 사방에서 식물들은 도시를 옥죄고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런 새로운 자연 속에서 새로운 인간들은 나타납니다. 몇몇 신의 정원사, 몇몇 생물학자는 새로운 인간들과 함께 작은 사회를 이룹니다. 문명이 멸망했기 때문에, 아무도 시장 경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주연 등장인물 토비는 돈 욕심이 모든 것을 망쳤다고 경계합니다.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자연과 공존하기 원합니다. 이게 가능한가요? 새로운 인간들이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고 자연 환경과 공존할 수 있을까요?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 <미친 아담>은 어떻게 환경 아포칼립스가 극심해지고, 어떻게 새로운 자연이 나타나고, 어떻게 새로운 자연 속에서 새로운 사회가 출발하는지 이야기합니다. 3부작 소설들이 새로운 자연과 문명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미친 아담>은 거의 유사 신화에 가깝습니다. 1편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전형적인 환경 아포칼립스이나, 3편 <미친 아담>은 유사 신화에 도달합니다. <미친 아담>은 어떻게 자연과 문명이 나타나는지 설파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 사이에는 여러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에서 환경 아포칼립스는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으로 승화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대격변(엄청난 과오, 홍수의 해)을 일으킵니다. 대격변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자연 환경과 만납니다. 새로운 자연 환경은 위협적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자연에 적응하고, 심지어 그들은 새로운 인간들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 새로운 인간들은 자연 환경과 소통할 수 있고,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인간들은 함께 어울립니다. 돼지구리부터 제노 타이탄까지, 생체 개조 기술은 핵심적인 역할을 맡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극심한 빈부 격차, 대격변, 새로운 인간, 문자 그대로 자연과의 소통, 돼지구리와 제노 타이탄 같은 개조 생명체들.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한 유사 신화.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에서 이것들은 핵심 설정들이고, 동시에 이것들은 커다란 유사성들입니다. 이건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이 똑같은 주제와 분위기를 공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욘드 어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다양한 결말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미국 자본주의를 답습하고, 순수한 인간들을 내세우고, 토착 생명체들을 열심히 학살할 수 있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새로운 문명이 유전 형질을 바꾸고 자연 환경과 공존한다고 반드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알파 센타우리>에서 디드리 스카이가 게임 주인공에 가깝기 때문에,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가 환경 보호를 중시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문명: 비욘드 어스>에 생태 유토피아를 대입할 수 있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가 생태 유토피아가 된다고 해도,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은 너무 다릅니다. <비욘드 어스>는 진보와 계몽을 찬양하고 거대 문명을 일으킵니다. 반면, <미친 아담>에서 진보는 갈림길을 만납니다. 전형적인 진보는 진보가 아닙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첨단 거대 도시를 강조하나, <미친 아담>은 첨단 과학 기술과 거대 문명보다 소박한 생태 마을을 예찬하고 유토피아를 사변합니다. 첨단 거대 문명과 소박한 생태 마을은 다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조화 친화도와 달리, 미친 아담 공동체는 떡대 생체 병기를 들이밀지 않습니다. 미친 아담 공동체가 개조 생명체들과 연대한다고 해도, 개조 동물 장갑 부대와 떡대 생체 병기는 다릅니다. 제노 타이탄은 공중 부양 구축함을 찢어발길 수 있으나, 개조 동물들은 그저 사람들을 습격할 뿐입니다. 개조 돼지와 제노 타이탄이 다른 것처럼,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은 다릅니다.


개조 돼지가 사람을 습격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규모'가 없습니다. 제노 타이탄이 날카로운 앞다리 낫으로 공중 부양 구축함을 찢어발길 때, 여기에는 '규모'가 있습니다. 소박한 생태 마을과 규모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첨단 거대 문명과 규모는 잘 어울립니다. 아무리 카비탄 보호령이 조화 친화도를 선택하고 자연 친화적인 문명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만약 신의 정원사들이 카비탄 보호령을 본다면, 신의 정원사들은 카비탄 보호령이 그저 또 다른 오염, 또 다른 억압에 불과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어쩌면 카비탄 보호령에게 미친 아담 공동체는 그저 피상적이고 낭만적인 생태 마을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거대 첨단 도시가 자연 환경과 공존할 수 있나요? SF 팬들은 유사성과 차이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이 대립하는 것처럼, 카비탄 보호령과 미친 아담 공동체는 대립할지 모릅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이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똑같이 비판한다고 해도, 양쪽은 너무 다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국유화가 대안이라고 간주하고,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 마을에 희망을 겁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생태 마을이 얄팍하고 낭만적인 프티 부르주아 반동이라고 말하고, 에코 페미니즘은 가부장적인 국가에서 공유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쪽은 쉽게 화해하지 못하고 합의하지 못할 겁니다. 카비탄 보호령과 미친 아담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카비탄 보호령과 자연과의 공존을 선택한다고 해도, 이런 게임 플레이와 미친 아담 공동체는 대립할 겁니다. 미친 아담 공동체는 첨단 거대 문명과 제노 타이탄이 가식적인 환경 보호, 가식적인 진보, 가식적인 공존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에서 주제와 분위기가 대립하기 때문에, 양쪽을 연결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거대한 국유화와 소박한 생태 마을이 어울릴 수 있나요? 지구에서 어떤 국가들은 국유화를 진행하고, 어떤 마을들은 생태 철학을 실현하고, 양쪽은 어울리고…. 이게 가능한가요?



많은 사람들은 이게 쉽지 않다고 고개들을 흔들 겁니다. 사람들이 고개들을 흔드는 것처럼,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은 너무 다릅니다. 비단 주제만 아니라 매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는 4X 게임이고, <미친 아담>은 소설입니다. 아무리 양쪽 사이에 커다란 유사성들이 있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가 <미친 아담>을 읽거나 독자가 <문명: 비욘드 어스>에 관심을 기울이나요? 매체, 형식 측면에서 4X 비디오 게임과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이 골짜기, 4X 게임과 소설 사이를 건너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아프리카 인민 연합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제3세계 식민지들을 수탈하는 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식민지 독립 운동을 지지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연합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까요? 아프리카 연합이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해도, 이건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사회주의보다 제노매스 위치에 관심을 기울일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제노매스 우물을 짓고, 제노 타이탄을 뽑고, 도시를 방어하기 원할 겁니다.



4X 전략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 사상보다 수치 계산입니다. 아프리카 인민 연합이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제노매스 위치가 훨씬 중요하다고 여길 겁니다. 결국 전략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원을 많이 채취하고, 좋은 유닛을 뽑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비록 4X 전략 게임이 사회 사상들을 제시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사상 내용보다 수치 계산을 중시할 겁니다. 4X 게임은 사회 과학 서적이 아닙니다. 이건 전략 게임입니다. 아무리 <문명: 비욘드 어스>가 엄청난 과오를 떠든다고 해도, <비욘드 어스>는 전략 게임입니다.


이건 전략 게임에서 설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설정은 중요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4X 전략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롤플레잉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사회 사상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프리카 인민 연합, 카비탄 보호령, 알 팔라는 그저 허울에 불과할 겁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도, 비디오 게임으로서 <문명: 비욘드 어스>는 등장인물 세계관, 심리, 내면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세계관, 심리, 내면은 추상적이고, 이건 언어 매체와 어울립니다.



소설로서 <미친 아담>은 언어 매체,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 매체로서 <미친 아담>은 세계관, 심리, 내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미친 아담>이 사회 사상을 거시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로서 <미친 아담>은 환경 아포칼립스 속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지 보여줍니다. 만화, 영화,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은 느낌, 생각, 대화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느끼고, 생각하고, 대화하기 위해 우리가 언어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SF 작가가 노력한다고 해도, 시각적인 측면에서 소설보다 만화, 영화, 게임은 훨씬 유리합니다.


만화, 영화, (비디오) 게임은 복잡한 첨단 우주선을 시각적으로 묘사할 수 있으나, 소설에게 이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복잡한 첨단 우주선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설은 세계관, 심리, 내면을 자세히 서술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미친 아담>에서 연애 노선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와 달리, <미친 아담>에서 공동체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 때문에, 마침내 연애 노선은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림보다 언어는 두근두근 심쿵심쿵 설레는 심정을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아무리 만화가 예쁜 그림체를 선보인다고 해도, 두근두근 심쿵심쿵 설레는 심정은 추상적입니다. 시각적인 그림체는 추상적인 심정을 직접 서술하지 못합니다. 시각적인 그림체가 추상적인 심정을 표현한다고 해도, 추상적인 언어는 추상적인 심정을 훨씬 제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화보다 4X 게임은 추상적인 심정을 표현하기에 훨씬 불리합니다. 적어도 만화는 등장인물에 주목할 수 있으나, 4X 게임에서 등장인물보다 게임 규칙은 우선합니다. 4X 게임은 사마타르 자마 바레의 심리보다 게임 규칙을 중시합니다. 이렇게 4X 게임과 소설 사이에는 커다란 골짜기가 있습니다.


양쪽 사이에 커다란 골짜기가 있기 때문에, 매체, 형식 차이를 건너뛰고 양쪽을 연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에서 핵심 설정들은 비슷합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은 환경 아포칼립스, 극심한 빈부 격차, 대격변, 새로운 자연, 새로운 인간, 자연과의 소통과 대화, 돼지구리와 제노 타이탄 같은 개조 생명체들을 이야기합니다. 양쪽에서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인간들은 어울리고, 이건 유사 신화가 됩니다. 아무리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이 대립한다고 해도, 양쪽에는 아주 뚜렷하고 커다란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분류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뭐야? 나는 이런 결혼에 반대…, 아니, 나는 이런 분류에 반대해! 어떻게 <미친 아담>과 <문명: 비욘드 어스>가 비슷해질 수 있어? 아무리 양쪽이 환경 아포칼립스, 새로운 자연, 공유 사회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하나는 세계적인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4X 비디오 게임이야.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들이 <문명: 비욘드 어스>를 재미있게 플레이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이 <미친 아담>을 읽을까? <미친 아담>과 <문명: 비욘드 어스>는 너무 달라. 양쪽은 이어지지 못해! 이건 억지 연결, 과잉 해석이야!"


이런 주장처럼, 아무리 <미친 아담>과 <문명: 비욘드 어스>에 유사성들이 있다고 해도, 만약 양쪽이 이어진다면, 이건 과잉 해석인지 모릅니다. 이건 너무 '의도적인' 해석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캐롤린 머천트는 '자연' 그 자체가 존재하기보다 사람들이 자연을 해석한다고 말합니다. '자연'에게는 본질적인 측면보다 의도, 해석이 있습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은 '자연'을 개념화하고 상징화하고 해석하고 연결하고 분류합니다. 저항하기 위한 목적, 억압적인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여자와 자연을 연결하고 분류하고 해석하는 것처럼, '자연'은 해석, 연결입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자연'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생태학 SF 장르에게 '자연'은 가장 핵심적인 소재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피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자연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것처럼, 만약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자연'을 의도적으로 해석, 연결, 분류한다면, 생태학 SF 장르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가 자연을 의도적으로 해석하고 연결하고 분류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태학 SF 장르를 '의도적으로' 해석하고 연결하고 분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부자연스러운 연결이라고 느낄지 모르나, 자연스러운 연결이 무엇인가요?


어쩌면 자연스러운 연결은 순수한 문학 해석과 비슷한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학 해석이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가 문학 해석에 당파성을 집어넣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해석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순수한 문학 해석이 존재할 수 있나요? 현실은 뒷전이 아닙니다. 현실과 문학은 별개가 아닙니다. 현실이 뒷전이 아니고, 현실과 문학이 별개가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순수성, 순수한 문학 해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문학을 해석하고, 현실이 우리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침에도, 어떻게 순수한 문학 해석이 존재하나요?



이미 이런 사고 방식 그 자체는 순수하지 않습니다. 이미 의도, 해석, 분류는 존재합니다. 순수한 문학 해석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분류 역시 고정 관념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이건 우리가 모든 것을 해석하고 연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과잉 해석이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미친 아담>과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커다란 연결 고리가 있고, 양쪽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미친 아담>과 <시녀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독자들은 이런 연결이 자연스럽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시녀 이야기>에는 개조 동물, 새로운 자연, 자연과의 소통이 없습니다.


<시녀 이야기>와 달리,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개조 동물, 새로운 자연, 자연과의 소통이 있습니다. 만약 <문명: 비욘드 어스>와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V>가 이어진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연결이 자연스럽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V>에는 기후 변화, 극심한 빈부 격차, 서구 제국주의, 개조 생명체가 없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아프리카 인민 연합은 조화 친화도를 선택할 수 있으나, <히마매 V>에서 실반 세력에는 흑인들이 없습니다. 자연 친화적인 실반 엘프들은 백인들입니다. 흑인들은 자연 친화적인 진영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미친 아담>과 <시녀 이야기>가 다르고, <문명: 비욘드 어스>와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V>가 다름에도, 어떻게 이런 연결이 자연스러울 수 있나요? 이게 부자연스러운 연결이 아닌가요? <히마매 V>에 서구 제국주의와 흑인 빈민들이 없음에도, 왜 <문명: 비욘드 어스>가 <미친 아담>보다 <히마매 V>와 가까워져야 하나요? 4X 게임 형식 때문에? 형식이 전부인가요? 만약 형식이 전부라면,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영화이고, <반지 원정대>가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미친 아담>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보다 소설 <반지 원정대>에 가까워져야 하나요? 이게 자연스러운 분류인가요?


'소설' <미친 아담>과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모두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지구 환경을 끝장낸다고 비판합니다. 동시에 양쪽은 생체 개조 기술과 새로운 인간을 내세웁니다. 양쪽에 커다란 유사성들이 있음에도, 소설 형식 때문에, <미친 아담>이 <블레이드 러너 2049>보다 <반지 원정대>에 가깝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미친 아담>이 <블레이드 러너 2049>에 가까운 것처럼, 환경 아포칼립스, 새로운 자연, 생체 개조 기술, 공유 사회, 자연과의 소통이 중요한 기준이 될 때, <미친 아담>과 <문명: 비욘드 어스>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양쪽이 이어지는 것처럼, 다른 생태학 SF들 역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비록 이 3부작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나, 여기에도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공유 사회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새로운 자연, 새로운 인간, 개조 생명체, 공유 사회를 좋아한다면,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조화 친화도)가 그저 또 다른 가부장 제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고, 어떤 사람들은 <미친 아담>이 얄팍하고 낭만적인 감수성에 빠졌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에코 페미니즘이 대립하는 것처럼, 무엇이 옳은지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명: 비욘드 어스>와 <미친 아담>에는 유사성들이 있고, 양쪽 모두 흥미로운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울타리에서 비단 <미친 아담>과 <문명: 비욘드 어스>만 아니라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 공존, 공유는 전반적으로 중요한 소재, 설정, 주제일 겁니다. 이미 현실이 환경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이미 기후 변화가 변곡점, 티핑 포인트를 지났는지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가 엄청난 과오를 걱정하는 것처럼, 이미 산업 자본주의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50년 이후, 100년 이후, 200년 이후, 지구 자연 환경은 크게 바뀔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이 자본주의를 타파한다고 해도, 새로운 '부정적인' 자연 환경에서 사람들은 살아갈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부정적인' 자연에 적응해야 할 겁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문명과 자연이 공존하는지 고민하고, 대안은 생산 수단 독점보다 공유 사회가 되어야 할 겁니다. 자연 환경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생태학, 생체 개조 기술은 디딤돌이 될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미친 아담>과 <문명: 비욘드 어스>는 소설 <붉은 화성>과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위 장르들, 분위기들, 주제들, 소재들은 다르나, <미친 아담>과 <비욘드 어스>와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 모두 환경 아포칼립스,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 공유 사회를 제시합니다.


아니, 이미 고대 홍수 설화는 새로운 자연,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고대 홍수 설화에 근대적인 환경 오염과 새로운 사회 사상과 생태학을 덧붙이는지 모릅니다. 이미 현실이 환경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이미 고대 설화가 환경 아포칼립스와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생태학 SF 장르에서 이것들은 가장 폭넓은 소재, 주제, 설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미친 아담>과 <괴수 행성>이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유사성들이 있고, SF 팬들은 이런 유사성들을 다른 생태학 SF들에 계속 적용/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3부작 마지막으로서 <미친 아담>은 1편과 2편을 합치고 감동적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수학에서 1+1=2입니다. 하지만 이런 3부작에서 1+1은 훨씬 커다란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몇몇 부분은 다소 아쉽고, 몇몇 부분은 너무 성급하게 넘어가나, 1편과 2편은 합치고 훨씬 풍성한 이야기 3편을 낳습니다. 훨씬 풍성한 이야기로서 3편 <미친 아담>은 멋진 생태학 SF 소설입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자신이 SF 작가가 아니라고 부정할지 모르나, 뭐라고 작가가 부정하든, <미친 아담>은 흥미로운 생태학 SF 울타리에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 스크린샷: RayN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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