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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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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과 현실 속의 관객들

OneTiger 2019. 7. 8. 20:07

노래 <연극이 끝난 후>는 연극이 끝난 이후 무대가 쓸쓸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연극을 진행하는 동안, 조명은 무대를 비추고, 음향 설비는 음악을 들려주고, 배우들은 춤추고, 불빛은 바쁘게 돌아갑니다. 이건 마법 같습니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이후, 모두 무대를 떠나고, 무대 위에는 오직 정적만이 있습니다. 이건 너무 대조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연극이 끝난 이후, 무대는 쓸쓸합니다. 연극을 진행하는 동안, 관객들은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관객들은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에게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화를 내거나 크게 웃거나 안타까워합니다.


관객들이 엘리자베스 헨리가 쓴 연극 <마음의 범죄>를 관람한다면, 관객들은 어떻게 세 자매들이 살아가는지 공감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이후, 더 이상 관객들은 세 자매들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배우들은 인사하고, 관객들은 박수를 치고, 조명은 꺼지고, 막은 내리고, 연극은 끝납니다. 이제 더 이상 세 자매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배우들이 세 자매들을 연기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박수는 인정입니다. 연극 <템페스트> 결말에서 프로스페로가 박수를 유도하는 것처럼, 관객들의 박수와 함께 연극(마법)은 끝납니다.



연극이 끝난다면, 더 이상 세 자매들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연극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 자매들이 연대한다고 연극이 암시한다고 해도, 정말 세 자매들이 연대할 수 있나요? 관객들은 이게 궁금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의문이 있다고 해도, 관객들이 세 자매들을 훨씬 자세히 알고 싶다고 해도, 더 이상 관객들은 알지 못합니다. 관객들은 배우들에게 묻거나 연극 작가에게 묻거나 연출자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진짜 대답이 아닐지 모릅니다. 연극 무대가 막을 내렸을 때, 이미 등장인물들은 사라졌습니다. 관객들은 등장인물들보다 배우들과 희곡 작가와 연출자를 만나야 합니다.


배우들과 희곡 작가와 연출자는 등장인물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등장인물들을 쓰고, 연기하고, 연출한다고 해도, 그들은 등장인물들이 아닙니다. 관객들이 배우들에게 묻는다고 해도, 관객들이 세 자매들을 훨씬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연극이 끝난 이후, 등장인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연극 속에서만 등장인물들은 존재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연극을 위한 허구적인 장치입니다. 아무리 등장인물들이 생생한 것 같다고 해도, 현실에는 그들이 없습니다. 연극이 뭔가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그게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관객들은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고 채워야 합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것을 스스로 해석한다면, 이건 많은 논란들을 부를 겁니다. 관객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관객들에게는 아주 다양한 개인적인 경험들과 사고 방식들과 인생관들이 있을 겁니다. 관객들이 이것들을 연극 해석에 적용한다면, 당연히 해석은 수많은 결과들을 내놓을 겁니다. 어떤 해석들은 공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해석들은 대립할 겁니다.  세 자매들은 계속 연대하거나 아니면 심각한 불화를 겪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이후 더 이상 등장인물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무슨 해석이 옳은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엘리자베스 헨리가 직접 대답한다고 해도, 이건 정답이 아닐지 모릅니다.


엘리자베스 헨리는 <마음의 범죄>를 썼으나, 엘리자베스 헨리가 연극 속의 모든 사건을 꿰뚫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엘리자베스 헨리는 그저 연극을 썼을 뿐입니다. 엘리자베스 헨리는 신이 아닙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 헨리는 자신이 무엇을 썼는지 잊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작가들은, 아무리 작가가 세계적인 대문호라고 해도, 작가들은 설정 오류들을 피하지 못합니다. 작가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엘리자베스 헨리에게 묻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정답을 알지 못할 겁니다. 작가는 문학을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나, 작가는 완벽한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작가가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을 창작물에 집어넣는다면, 관객들이 창작물 내용을 해석할 때, 관객들은 작가를 믿지 않을 겁니다. 관객들은 작가를 비판하고 성 차별을 비판할 겁니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원더 우먼은 유일한 여자 초인 영웅입니다. 왜 여자 초인 영웅보다 남자 초인 영웅들이 압도적으로 많나요? 여자가 못났기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가 보조적이기 때문에? 원더 우먼이 유일한 여자 초인 영웅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여자가 보조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나요? 관객들이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하나요? <저스티스 리그>가 뭔가를 말한다면, 관객들이 그걸 받아들여야 하나요?


어떤 관객들은 이게 옳다고 생각하고 여자들을 비하할지 모릅니다. 어떤 관객들은 영화 <저스티그 리그>가 수구 꼴통 같은 헛소리를 보여준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관객들은 왜 유명한 SF 영화가, 엄청난 제작비를 퍼붓는 SF 영화가 이런 수구 꼴통 같은 헛소리를 지껄여야 하는지 파악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럽을 비롯해 자본주의 사회가 가부장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억지로 돌봄 노동들을 맡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착취 사회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노예 제도 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노예 제도 사회가 흑인들을 비하하는 것처럼, 가부장적인 사회는 여자들을 비하합니다. 여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정치, 과학, 탐험, 철학, 산업, 문학, 다른 여러 분야들에서 여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남정네들만 구경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온갖 고초들에 부딪혀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게 문제라고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온갖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가부장 문화가 옳다고 가르칩니다. 여자들이 과학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학교 과학 교과서는 이게 잘못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수많은 남자 과학자들을 봐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학생들이 '과학자=남자'라고 오해한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닐 겁니다. 어린 학생들이 '여자=아무것도 아님'이라고 오해한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성 해방 운동가들이 성 차별을 비판할 때, 수많은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보다 성 해방 운동가들을 욕합니다. 이른바 '여성 혐오 만물 이론'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성 차별들은 차고 넘칩니다. 성 차별들이 차고 넘침에도, 사람들은 성 차별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돌봄 노동자들(여자들)을 착취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착취가 옳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착취를 옹호한다고 해도, 이건 별로 신기하지 않습니다. 흑인 노예 제도는 낡은 사건이 아닙니다. 19세기는 머나먼 과거가 아닙니다. 19세기 노예 해방론자들은 미쳤다고 욕을 먹어야 했습니다. 19세기 백인들은 착취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착취한다고 해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이미 어떤 억압이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그게 옳다고 믿을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보조적인 인간이 됩니다. 여자는 보편적인 등장인물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여자 초인 영웅보다 남자 초인 영웅들은 훨씬 많습니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는 지배적인 관념을 피하지 못했을 겁니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갤 가돗은 원더 우먼을 연기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갤 가돗을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하나요? 갤 가돗이 뭔가를 말한다면, 관객들이 반드시 그 언급을 이용해 원더 우먼을 바라봐야 하나요? 갤 가돗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부장 문화라고 분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자본주의가 가부장 문화라고 이해하지 말아야 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관객들은 노동 가치 이론을 이용해 어떻게 가부장 문화로서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는지 분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창작물을 해석할 때, 이렇게 사람들은 현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창작물이 뭔가를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작가를 절대적으로 믿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작가를 참고할 수 있으나, 작가는 완벽한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엘리자베스 헨리에게 묻는다고 해도, 엘리자베스 헨리는 완벽한 정답이 되지 못합니다. 작가가 완벽한 정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 관객들이 <저스티스 리그>를 비판하는 것처럼, 연극 내용을 해석하기 위해 관객들은 현실에 기반해야 합니다. 결국 관객들은 (현실을 이용해)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학은 수많은 해석들을 포함합니다. 사람들은 문학을 이용해 수많은 해석들을 내놓습니다. 수많은 해석들은 대립할지 모릅니다. 김유정이 쓴 <동백꽃>에서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 화자가 사귈 수 있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어떤 독자는 두 사람이 사귈 거라고 해석하고, 어떤 독자는 두 사람이 계급 차이를 뛰어넘지 못할 거라고 해석합니다. <동백꽃>은 무엇이 옳은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오직 소설 속에서만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 화자는 존재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모두 읽는다면, 더 이상 등장인물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이 정말 사귈 수 있는지, 두 사람이 정말 키스했거나 애무했거나 섹스했는지, 두 사람이 계속 닭들을 괴롭히고 동물 권리를 개무시할지, 독자가 알기 원한다고 해도, 독자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김유정조차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어쩌면 김유정이 소설을 쓰는 동안, 김유정은 대답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소설과 작가에게 완전히 기대지 못합니다. 독자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동백꽃>이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 화자가 사귀는지 보여주지 못하는 것처럼, 창작물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창작물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창작물보다 현실에 기반해야 합니다.



마스다 미리가 그린 만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만화 주인공 수짱은 자기 개발을 고민합니다. 하지만 자기 개발은 연이어 한계에 부딪히고, 나중에 이게 다른 문제들과 뒤섞이기 때문에, 수짱은 대성통곡합니다. 문제는 이런 자기 개발이 자유주의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입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개인의 자유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 비슷합니다.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합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가장 작은 경제 주체는 개인입니다. 개인이 좀 더 확장한다고 해도, 개인은 가족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개인(과 가족)은 가장 작은 경제 주체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자기 개발과 화목한 가족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공동체주의 사상에게 자기 개발은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입니다. 신앙 공동체 속의 수도사들은 자기 개발을 운운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신 앞에서, 경건한 신앙 공동체 속에서 개인이 함부로 튈 수 있나요? 만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수짱은 여러 가지를 고민하나, 이런 고민은 자유주의 고민에 속합니다. 공동체주의 사상은 수짱이 쓸데없이 고민한다고 비판할 겁니다. 사실 만화 속에서 수짱은 온갖 자본주의 시장 경제, 가부장 문화, 개인주의 문제들에 부딪힙니다.



하지만 수짱은 그저 괴로워할 뿐입니다. 수짱은 왜 자본주의, 가부장 문화, 개인주의가 나쁜지 분석하지 않습니다. 만화 <수짱의 연애>는 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부장 문화이고 왜 자유주의(개인주의)가 헛소리인지 분석하지 않습니다. 만화에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분석하기 위한 책임이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는 일상 만화이고, 일상 만화는 그저 일상을 반영할 뿐입니다. 일상 속에서 수짱은 그저 괴로워할 뿐입니다. 수짱은 자본주의 경제와 가부장 문화와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합니다. 아무리 수짱이 울고 불고 대성통곡한다고 해도, 수짱은 가부장적인 지배 계급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수짱은 노예 근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수짱은 여자 임금 노동자가 자본가 계급과 가부장 문화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짱이 지배적인 관념에 복종한다면, 어떻게 독자가 수짱을 바라봐야 하나요? 독자가 간단하고 가벼운 만화 그림체에 쉽게 빠져드는 것처럼, 독자가 만화 내용을 받아들여야 하나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가 가부장 문화를 분석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가부장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일상 만화가 일상을 모두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만화가 말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만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와 현실 (속의 지배적인 관념) 사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온갖 비일상적인 상상력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결국 현실에는 이것들이 없습니다. SF 소설이 기발한 상상력들을 남발한다고 해도, SF 소설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합니다. SF 독자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면, 소설은 끝나고, 더 이상 우주 항해 시대와 항법 인공 지능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독자가 우주 항해 시대와 항법 인공 지능을 알고 싶다고 해도, 오직 소설 속에서만 우주 항해 시대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SF 소설을 해석해야 할 겁니다.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SF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SF 작가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갤 가돗은 원더 우먼을 연기했으나, 갤 가돗은 원더 우먼을 이용해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기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갤 가돗에게는 이런 의도가 없었을 겁니다. 성 해방 운동가가 "자본주의 경제는 남자 경제이다! 여자 동지들이여, 자본주의 경제를 무너뜨리자!"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갤 가돗은 절대 이걸 의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뭐라고 갤 가돗이 생각하든, 성 해방 운동가는 원더 우먼을 이용해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이용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해석할 때, 사람들은 논리적인 근거를 뒷받침해야 하고, 낮은 가능성보다 높은 가능성을 선택해야 하고,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합니다. 아무리 독자가 새롭게 해석하고 싶다고 해도, 독자는 앤서블이 21세기 스마트폰을 비유한다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SF 소설들이 보여주는 여러 무선 통신 장치들을 이용해 21세기 스마트폰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앤서블은 21세기 스마트폰으로 직접 이어지지 않습니다. 어슐라 르 귄과 앤서블과 통신 기술 발달과 스마트폰 사이에서 독자는 논리적인 연결 고리들을 찾아야 합니다.


애니메이션 <컴퓨터 형사 가제트>에서 페니는 전자책을 사용합니다. 전자책은 문자 그대로 전자책, 컴퓨터 서적입니다. 그리고 21세기 오늘날에는 전자책들이 있습니다. <컴퓨터 형사 가제트>가 21세기 전자책을 예상했나요? 애니메이션 속의 전자책이 21세기 전자책을 가리킨다고 우리가 해석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오래 전부터 사이언스 픽션들은 정보 통신 기술 발달을 이야기했습니다. 정보 통신 기술이 발달한다면, 이건 책과 컴퓨터에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속의 전자책은 이런 상상력입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정보 통신 기술들이 계속 발달했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정말 전자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의 전자책과 21세기 전자책 사이에는 이런 연결 고리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연결 고리들을 이야기한다면, 이건 과잉 해석이나 초해석이 아닐 겁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21세기 전자책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연결 고리들을 찾고 페니의 전자책과 21세기 전자책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페니의 전자책이 21세기 전자책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면, 이건 오류가 될 겁니다. '해석'은 현실과 창작물 사이에서 우리가 논리적인 연결 고리들을 찾는 연쇄 과정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 만화 <수짱의 연애>를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로 고쳤습니다. 본문이 설명하는 '수짱 시리즈'는 3편 <수짱의 연애>가 아니라 1편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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